너의 코드가 보여 (139)
대충 지었을 게 뻔한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죽을 둥 살 둥 고생한 거에 비하면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상태였는데, 덕분에 나는 요즘 꽤 침울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내 멘탈이 약해서 그런 게 아니라, 한 달 동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은 고생을 했는데 진전이 안 보이면 누구라도 이럴 수밖에 없을 거다.
생각해 보니 이 세계에 와서 부족함을 느끼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싶다.
이런저런 일로 고생하긴 했어도 재능 하나만큼은 언제 어디서나 최고로 꼽히곤 했으니까. 그만큼 배우기 어렵다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정말 아이언 말고는 익힐 수가 없는 검술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평생 동안 풀리지 않을 의문에 빠져 있으려니, 어느새 가까워져 있는 코드가 보였다.
[PLAYER-1]
“오, 먼저 와 있을 줄은 몰랐네. 열정적인 모습 좋은데. 어제 표정 보고 오늘은 도망치지 않을까 했더니.”
당사자는 물론 아이언이었다.
산에서 떨어지는 훈련시킬 때는 저런 말 한마디도 안 했는데, 그만큼 엿 같은 수련이란 건 본인도 알고 있나 보지.
“……이제 와서 포기해 버리면 그만큼 억울한 것도 없으니까요. 그래도 성과 없는 수련에 하염없이 매달릴 시간도 없는데, 지금이라도 방식을 바꿔 보는 게 어때요?”
“다른 수련 방식은 생각나는 거 있고? 기술 쓸 수 있는 나도 못 떠올리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냈다냐.”
아이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나도 이것 말고는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아이언은 그런 나를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심정인진 알겠는데, 너무 조급해하지 마. 나도 이거 익힐 때까지 십 년은 걸렸어.”
“……저보고 십 년 동안 이러고 있으라 하는 건 아니죠?”
“나는 맨땅에 헤딩하느라 오래 걸린 거고, 너는 나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으니 그것보다는 훨씬 빠르지 않겠냐?”
지금 내가 하는 게 맨땅에 헤딩하는 거랑 뭐가 그리 다른가 싶기는 한데.
하긴, 일단 아이언이 교본을 보이니 그것보다 조금 더 낫기는 한가. 정말 조금이지만.
“아무튼, 저는 그렇게 오랫동안 여기 못 있어요. 전에 말씀드렸듯이, 수련 말고도 해야 할 게 많단 말이에요.”
“뭐,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면 되지. 원래 이 감각이라는 게 전혀 안 잡힌 것 같으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대뜸 잡히곤 한단 말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한 아이언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이제 닥치고 다시 수련하자.”
“……네.”
나 역시 저항하지 않고 곧바로 공격해 오는 아이언에게 맞섰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 다시 한 달이 지난 시점.
나는 아이언으로부터 검술을 그만 익혀도 된다는 일방적 통보를 받았다.
* * *
상당히 오랜 기간 신세를 지게 된 여관 방. 나는 그곳에서 남은 짐들을 정리하고 있다.
어차피 중요한 것들은 죄다 스바 안에 보관하고 있어서 그런가. 별로 챙길 것이 많지는 않다. 그냥 편하게 갈아입을 옷가지 몇 개가 사실상 전부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반년 가까이 머문 방이라기엔 너무 휑한 거 아닌가 싶기는 한데.
“후우…….”
그렇게 정돈이 모두 끝나고. 나는 조금 심란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원래 게임 설정대로라면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을 도시. 하지만 분명 그랬을 장소가 지금은 골목골목마다 아이들이 웃고 뛰놀며 활기를 띠고 있다.
실제로도 바포메트가 쳐들어오기도 한 만큼, 사실상 여기를 지킨 건 반쯤 나의 업적이라 해도 과장은 아니겠지.
물론 그건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해해야 할 일은 맞다. 수만 명의 목숨을 구한 것과 다름없는데, 어찌 안 그러겠나.
저 사람들도 뭔가 얘기를 들었는지 밖에 나갈 때마다 구원자님의 제자니 뭐니 하며 뭐라도 챙겨 주기도 하고.
그러나 내가 마냥 기뻐할 수 없는 것은, 역시나 그놈의 무영검 때문이다.
“하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총 두 달의 수련 기간. 나름 길다면 긴 시간인데, 정작 그동안 얻은 거라곤 밤마다 꾸는 악몽뿐이다. 내용이 추락하는 것에서 아이언이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바뀌긴 했지만.
나는 아직 단순한 베기 찌르기로 보일 뿐인데, 아이언이 갑자기 이제 그만해도 된다며 대뜸 포기를 선언해 버린 거다.
아니. 어차피 이제 다른 일도 있으니 슬슬 그만둬야겠다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포기하는 것과 포기당하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자존감이 와장창 부서지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이제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라 하면 조금 오버겠지만, 거의 그에 맞먹는 부근까지 가기는 했다는 소리다.
“…….”
창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싸 둔 짐을 스바에 넣어 버렸다.
결국 원래 했던 계획대로 그 검술을 찾으러 갈 수밖에 없나. 아이언의 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것도 나한테 딱 알맞는 기술이긴 하지.
마치 무영보처럼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검술이라 해야 하나. 문제는 그걸 얻으려면 앞으로 1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거지만.
나는 최대한 무영검에 대한 미련을 떨쳐 내려 노력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여관의 체크아웃을 마치자, 주인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반년 가까이 되는 숙박비를 돌려주려 했다. 스승께서 목숨을 구해 주신 것에 대한 답례라나.
내 입장에선 푼돈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구태여 거절하고 밖으로 나왔다. 마음은 고맙지만, 저 사람 입장에선 굉장히 큰돈일 테니까.
게다가 데이크가 2층을 부숴 버리며 크게 신세 졌던 일도 있고.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도 관여돼 있기는 하지 않나.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테 경!”
꼭 특정 인물을 떠올리고 있으면 그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걸 무슨 법칙이라 하더라?
이제는 희미해진 지구의 기억을 더듬으며 뒤로 돌았다.
“데이크.”
“아이언 경에게 들었습니다. 오늘 다른 곳으로 떠나신다고요?”
“그렇다.”
내 말에 데이크가 아…… 하는 탄성 소리를 냈다.
“그것참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아직 단테 경과 검술에 대해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요.”
또 검술.
애써 잊으려 했던 무영검이 다시 생각나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데이크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수련 기간 동안 내가 물어보는 것에 답해 준 건 거의 다 데이크였으니까. 아이언은 몸으로 때울 줄만 알지, 이론 같은 건 모른다.
“원래 여긴 예정에도 없던 곳인데 생각보다 너무 오래 머물러 버렸으니까. 밀린 일이 꽤 많은 상태다.”
“그렇군요. 아쉽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혹시 아이언 경도 같이 떠나시는 겁니까?”
미쳤냐? 그 인간을 레이튼에 데려가게?
그랬다가는 제2차 제국전쟁이라도 펼쳐질 거다. 리카르도와 아이언이 맞붙게 될 테니까.
“스승님도 떠나긴 하겠지만, 같은 곳으로 가지는 않는다. 다른 볼일이 있다더군.”
“그렇습니까…….”
데이크가 말꼬리를 늘리며 푹 고개를 숙였다.
어째 나 떠난다고 할 때보다 더 서운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석판 하나를 꺼냈다. 그 겉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칼자국이 빼곡히 새겨진 채였다.
“이거라도 가져가겠나?”
“……그게 뭡니까?”
“스승님이 검을 휘두른 석판이다. 내 검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려고 만들어 달라 했지.”
내 말에 데이크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 그런 귀물을 정말 저 같은 게 받아도 되는 겁니까?”
귀물은 무슨. 대체 아이언의 뭘 보고 팬이 됐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만나기 전에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실물 보고 나서도 환상 가질 만한 인간은 아닌데.
“딱히 필요 없으면 그냥 근처에 버리겠다.”
“저에게! 부디 저에게 버려 주십쇼!”
이젠 좀 무서워지려 한다. 조금 놀리다 주려 했는데, 기세가 부담돼서 바로 건네 버렸다.
데이크는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석판을 정말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다듬더니, 이윽고 정신을 차린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빈센트 님께는 인사드리지 않고 바로 가시는 겁니까?”
“그분은 얼마 전 떠나신 거 아니었나?”
수백에 달하는 기사와 왕국 4검 중 하나인 1급. 아무리 여기서 큰일이 터졌다고는 하나, 계속해서 내버려 둘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그 때문인지 몇 달 전부터 조금씩 수도로 귀환하기 시작했는데, 빈센트도 그중 하나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습니다만, 그 직전 본인이 직접 취소하셨습니다.”
“이유는?”
“마지막으로 바포메트가 봉인되어 있던 곳을 한 번 더 둘러본다더군요. 만약 그런 괴물이 또다시 나타난다면 왕국의 위기라면서요.”
거 꼼꼼하기도 하지. 그런다고 더 발견할 게 있지는 않을 텐데. 뭐 나야 아무래도 좋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렇군. 어쨌든 그분을 만나 뵐 예정은 딱히 없다. 아르곤 소속이 아니니 보고할 의무도 없고.”
“의무에 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보상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만…….”
“보상? 그건 전에 전부 얘기가 끝난 것으로 아는데.”
왕국으로 직접 와서 받으라기에 필요 없다고 거절해 놨던 차다. 거기 가면 바포메트의 시체에 관한 얘기가 나올 것이 뻔했으니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굳이 그런 고생을 하느니 그냥 안 받고 마는 게 낫다.
어차피 더 이상 아르곤에 탐나는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
데이크는 곤란하단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왕국 체면이 우습게 되니까요. 이런저런 소리가 오가긴 한 것 같지만, 결국 왕국으로 부르지 않고 보상을 주는 쪽으로 타협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빈센트 경에게 가야 한다?”
“원래는 그렇습니다만…….”
내가 귀찮아하는 티를 팍팍 내자, 데이크가 품에서 뭔지 모를 패를 하나 꺼내었다.
“이번만큼은 예외로 해드리겠습니다. 귀한 석판도 주셨으니까요.”
“이게 뭐지?”
“아르곤 왕국의 후작임을 증명하는 패입니다.”
……뭐?
예상 이상의 발언에 당황하고 있는데, 데이크가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세습 직위는 아닙니다. 왕국민이 아니니 부여되는 영토도 없고요. 그래도 어딜 가든 아르곤 왕국의 후작급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물질적인 보상만 생각했지, 이런 것은 상상도 못 했다.
내가 이룬 업적이 후작 직위 받기에 결코 모자란 건 아닌데, 어디까지나 그건 그 대상이 왕국민일 경우다.
자기네 나라 사람도 아닌 자에게 직위를. 그것도 최고위급인 후작의 직위를 줄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역시 이건 아이언의 제자라는 후광이 많이 들어간 거 같은데.
어느 쪽이든 나한테는 좋은 일이다. 책임은 없고 권한만 있는 자리. 지구든 벨리아 대륙이든 누구나 꿈꾸는 위치일 테니까.
나는 너무 좋아하는 티가 나지 않게 유의하며 데이크의 손에서 패를 건네받았다.
“사양하지 않고 받도록 하지. 거절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그래 주신다면 다행입니다.”
그 후로 아르곤의 후작이 가지는 권한에 대해 일일이 설명한 뒤, 데이크가 작별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마지막에 좋은 선물 하나 남기고 가네.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넉넉해진 마음으로 축복을 빌어 주며 자리를 뜨려는데, 갑자기 품속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툭.
떨어진 것은 아까 데이크에게 건넸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석판이었다. 아이언의 것과 비교해 보기 위해 나도 칼자국을 남긴 건데, 아마 그건가 보다.
나는 그걸 들어 올려 마지막 미련을 떨치듯 겉을 유심히 살폈다.
“……진짜 무슨 차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아이언의 것이든 내 것이든 똑같이 베고 찌른 흔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설마 아까 건넸던 게 내가 남긴 건 아니겠지?
“……뭐 됐나.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할 테니까.”
나도 구별 못 하는 걸 걔가 어떻게 분간한단 말인가.
나는 속에서 살짝 찔러 오는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며, 다시금 도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