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38)
“검술이란 건 사실 별거 없어.”
아이언은 내게 겨누고 있던 검을 치우더니 피식 웃어 버렸다.
“어떤 동작이든 결국 베고 찌르는 행위의 연장선일 뿐이지. 화려하게 베든 웅장하게 베든. 크게 보면 별 차이 없다는 소리야.”
너무 간단하게 얘기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다름 아닌 아이언의 말이다. 어떻게든 새겨들을 가치는 있겠지.
심지어 아까 녀석이 했던 말대로 훈련생 중에 이 단계까지 왔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요컨대 설정에도 아이언의 검술 수련에 관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이 세계에서 설정과 빗나간 일들은 나를 골치 아프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이런 숨겨진 내용에 대한 거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뭔가 제작자로서도 보지 못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는 기분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산에서 떨어지라 하는 정신 나간 수련보다는 훨씬 낫다.
덕분에 나는 꽤 의욕적인 기분이 되어서 아이언에게 물었다.
“하지만 더 잘 베고 더 잘 찌르는 방법은 존재하잖아요. 실제로 위력이나 스피드에서 꽤 차이가 나기도 하고. 그렇다면 역시 동작이 비슷하다고 같은 분류로 묶는 건 힘들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긴 하지.”
뭐야, 왜 이리 순순히 수긍해?
당연히 반박하는 말이 나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잠시 당황했다.
아이언은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정작 네가 검 휘두르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네. 나름 스승이라 하는 인간이 말이야. 이왕 말 나온 김에 일단 검부터 한번 휘둘러 봐라.”
그러더니 마음 편히 감상하겠다는 듯 구석에 가서 털썩 앉는다.
별로 어려운 요구도 아닌 데다, 사실 검술 수련하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아무 불만 없이 근처 공터에 가서 검을 꺼내 들었다.
“그전에 조금 익혀 둔 검술이 있는데, 그거부터 선보이면 되나요?”
“마음대로. 그냥 베기 찌르기만 써도 되고.”
검술이나 베기 찌르기나 거기서 거기라고 하지 않았었던가?
나는 그런 의문을 품는 대신, 그냥 두 가지 전부 써먹기로 했다. 얼추 배워 뒀던 검술과 단순한 베기 찌르기 모두 사용하기로 한 거다.
그렇게 내 장기자랑 시간이 전부 끝난 후.
“나름 기본은 되어 있네.”
아이언은 그런 평가를 남겼다.
예상보다 싱거운 반응이라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또 토대부터 만들어야겠다고 하는 건 아니죠?”
“토대는 됐어. 검술은 오히려 토대를 부숴야 하는 작업이니까.”
……토대를 부숴?
그게 무슨 소리냐 물어보려 했지만, 그보다 아이언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그런 점에서 너는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할 수 있겠네. 검술은 대충 배운 듯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다고 초보잔가 하면 정작 불필요한 동작이나 습관은 보이지 않아. 그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야. 혹시 나 말고도 스승이 있었나?”
……칭찬을 하려는 건지 비난을 하려는 건지 조금 헷갈린다. 어쨌든 맺음말은 기분 좋게 끝났으니 칭찬인 거겠지?
만약 아니라 해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아 보호 조치 차원에서.
“스승은 아니고, 자세를 잡아 준 사람은 하나 있었어요.”
“누군지는 몰라도 꽤 괜찮은 실력자였나 보네. 언젠가 한 번 만나 보고 싶은걸.”
아이언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녀석이 저러는 경운 흔치 않은데, 그 상대가 검 잡아 본 지 얼마 안 된 꼬맹이라는 걸 알게 되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그냥 대견스럽다며 넘어갈 것 같기도 하고, 황당해하며 기가 차 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어느 쪽이든 제자로 들어오라고 설득하는 건 똑같겠지.
카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녀석이 가르쳐 줬다는 사실은 꼭꼭 숨겨 둬야겠다. 아직 어머니도 살아 계신데, 자식 먼저 보내 버릴 순 없으니까.
“뭐, 그 실력자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아이언은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단 나부터 한번 공격해 봐.”
“검술 이용해서요?”
“아니. 네가 생각해도 그 허접한 꼬라지보다는 그냥 휘두르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않겠니? 원래 싸우던 대로 해.”
“……아무리 그래도 허접한 꼬라지라뇨.”
나름 라이놀에게 칭찬까지 받았던 건데. 그쪽이 워낙 오냐오냐해 주는 성격이어서 그랬던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야매로 익힌 검술보단 마음 편히 휘두르는 게 더 자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더 군말하지 않고 아이언을 향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당연히 전력이다. 녀석을 합법적으로 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으니까.
별로 먹힐 거라곤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도전은 해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나 그런 판단조차 너무 순진했던 것인 모양이다.
위력만 따지면 2급 국가기사에도 맞먹을 내 공격은, 막혔다는 느낌조차 없이 녀석에게 막혀 버렸다.
아니. 이걸 막았다고 표현해도 될까?
내 검은 녀석의 무기나 몸 어디에도 닿지 않았는데, 갑자기 저 혼자 멈춰 서더니 움직이질 못하고 있는 거다.
……게임 내에서 그런 식으로 서술한 건 기억하는데, 실제로 겪어 보니 더 요상한 기분이네.
아이언은 본인 검을 어깨에 걸친 채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때?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지?”
“……솔직히 그러네요.”
저 얼굴이 재수 없어서라도 한 번 부정하고 싶었지만, 너무 저 말 그대로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예전에 무영보에 당했던 데이크가 아이언과 같은 표현을 쓴 적 있는데, 아마 지금 녀석과 맞붙었으면 그런 말은 철회했을 거다. 여긴 진짜 귀신이라도 있는 기분이니까.
“네 검과 나 사이에 있던 공간을 조금 베어 낸 거야. 그러니까 절대 나한테 닿을 수가 없지.”
아이언이 당연히 안 될 소리를 당연한 것처럼 해 왔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방금 일을 겪고도 웬 미친놈인가 싶겠지만, 설정을 직접 작성한 나로서는 저 말이 단순한 사실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 어때. 내가 방금 무슨 검술 교본에 들어가 있는 화려한 동작이라도 펼친 것 같아?”
“아니요.”
“그래, 아니지. 내가 한 건 단순한 베기였을 뿐이야. 하지만 네가 아는 그 어떤 검술로도 공간을 베어 낼 순 없을걸.”
아이언은 피식 웃으며 검을 수납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검술이라는 건 큰 쓸모가 없다, 이 소리지. 그냥 더 잘 베고 더 잘 찌르면 끝인 일이잖아.”
“……보통 검술이 그 더 잘 베고 더 잘 찌르는 방식을 익히는 건데요.”
“그 노력을 하찮게 여기는 건 아니야. 어느 정도 성과도 인정하고.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런 걸 익히는 것만으로 충분하겠지. 어차피 내가 하는 걸 알려 준다고 배울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저는 그걸 익힐 수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는 거예요?”
내 말에 아이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뭐든 확신 같은 거 안 해. 그냥 가능성을 조금 봤다고 해 두자.”
“너무 무책임한 소리 같은데.”
“그러는 넌 무슨 일을 하든 성공시킬 확신이라도 있나 보지?”
“그런 건 없죠.”
“그럼 우리 닥치고 수련이나 하자.”
“네.”
조용히 수긍하고 검을 들어 올렸다.
쌓인 것 때문에 뭐라도 한마디 하고 싶었을 뿐, 진짜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원했던 건 아니니까.
이 세계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도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수두룩하지 않았던가.
그런 와중에 게임 내내 아이언만 시전 가능하던 기술을 무조건 익히게 해 달라 요구하는 건 그냥 도둑놈 심보지.
만약 아이언의 검술을 배우지 못한다 해도, 어차피 원래 예정해 놨던 계획은 따로 있다. 애초에 저 녀석의 제자가 되는 일부터 의도치 않은 일이기도 하고.
마음 편히 먹어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제대로 검술 수련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보통은 어떤 식으로 진행해요?”
“나도 몰라.”
“……네?”
이번에는 조용히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걸 네가 모르면 어떡해?
“지금부터 바로 수련한다는 거 아니었어요?”
“수련은 해야지. 그런데 여기까지 온 거는 네가 처음이라 했잖아. 요컨대 나도 딱히 무슨 방식을 정해 놓지 않았다는 거지.”
아까는 그냥 뭐라도 한마디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한 말이었는데, 지금은 진짜로 뭐라도 한마디 해야겠다.
“너무 무책임한 소리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나도 누가 가르쳐 줘서 배운 건 아니니까. 나랑 비슷한 방식으로 수련하다 보면 너도 익힐 수 있지 않겠냐.”
그 말에 나는 다시금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야 아이언이 해 온 수련 방식이라는 게 보통 정상적인 것이 없었으니까.
“맞아.”
아이언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검을 검집 채 들어 올렸다.
“내가 계속해서 너를 공격할 테니까, 너는 그걸 받으며 알아서 깨달으면 돼.”
* * *
심화라고 하니 이제 나름 상식적인 수련이 되겠다 기대했던 내가 잘못한 걸까.
어떻게 보면 오히려 산에서 떨어지던 방식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때는 재생하는 시간 동안이라도 쉴 수 있었으니까.
“헉…… 헉…….”
“굳이 힘들어하는 티 낼 필요 없어. 어차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 생각이니까.”
“헉…… 이게, 무슨, 꾀병처럼…….”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입에서 각혈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타격이라곤 받은 적도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최근엔 산 정상에서 추락해도 장기는 멀쩡했는데.
아연해진 얼굴로 리베라에게 부탁해 피를 씻고 있자니, 아이언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해 왔다.
“확실히 네가 몸이 튼튼하기는 하네. 나는 대충 비슷한 일 겪었을 때 한 일주일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될 걸 알았으면서도 했다는 거지?
진짜 주먹이 우는데 당장 어찌할 방도가 없다. 저 얼굴에 한 방 날릴 수 있을 날이 오긴 오는 걸까.
입 밖으로 그런 소리를 꺼내고 싶었지만, 너무 숨이 차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아이언은 그런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더니 검집을 다시 허리춤에 채웠다.
“그래서, 뭔가 느낀 거는 있어?”
나는 한참 더 숨을 고르다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아니요. 그냥 단순한 베기처럼 보이고, 단순한 찌르기처럼 보였어요. 특별한 거 하나 없는 것처럼요.”
내 말에 내심 실망하지 않을까 했는데, 아이언의 얼굴에서는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 차차 나아지겠지. 하루 만에 깨닫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어?”
“그럼…….”
“맞아.”
아이언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앞으로도 한참은 더 이렇게 수련해야 한다는 뜻이지.”
“…….”
진짜 한 방 날리고 싶다.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은 뒤로하고, 나는 어느 정도 몸을 회복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런데 이 검술, 이름은 있어요?”
“이름? 그런 거 안 지었는데.”
“뭐 스승님 혼자 쓸 때는 그래도 상관없다 치지만, 이제 저도 배우는데 뭐라도 붙여 놓긴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칭하기 까다롭잖아요.”
“음…… 그것도 그러네.”
아이언은 잠깐. 정말 잠깐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귀찮단 듯 하품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무영검. 무영검으로 하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