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37)
뭐지?
나는 조금 당황한 심정으로 멈춰 있는 데이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도 깜짝 안 하는 거 보면 분명 연기는 아닌데, 저게 연기가 아니라면 더 이해가 안 간다.
딱히 저렇게 될 정도로 강하게 쓴 적 없는데? 그냥 잠깐 휘청일 때 슬쩍 몸을 피하려는 게 다였다.
“…….”
내가 그렇게 가만히 있든 말든, 데이크는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자리 그대로 멈춰 있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저런 상태면 진짜 마력 못 쓰는 일반인도 녀석에게 유효타 먹일 수 있겠다.
나는 일단 살짝 몸을 틀어 내려쳐 오는 검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조금 기다리는데, 데이크는 여전히 다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으음…….”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는데, 아까부터 저 상태니 이젠 좀 지루하다.
그러고 보니 저런 상태의 인간에게 해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나는 다시 녀석에게 다가가 아까와 똑같이 자리 잡았다. 검의 궤도 끝 위치 그대로.
다만 그전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내 몸이 아니라 검의 궤도가 틀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손으로 슬쩍 밀어 뒀으니까.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데이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앗!”
그것도 틀어졌던 검의 궤도를 순식간에 되돌린 상태로.
이런 걸 기대한 게 아니었는데.
나는 재빨리 신체에 마력을 집중해 그걸 방어해 냈다.
쿵!
큼직한 소리가 검과 신체 사이에 울려 퍼지고, 데이크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제 저 같은 건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해지셨군요. 겨우 신체 강화만으로 제 검을 막아 내다니……그게 이번에 새로 익힌 기술인가 보죠? 과연 굉장하군요.”
“…….”
전혀 그런 거 아닌데. 그건 그냥 혼원력 몰아넣어서 몸으로 버텼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답변하지 않고 조금 망설였다. 아직 상황 판단이 좀 안 돼서.
말하는 걸 보아하니 굳어 있을 때의 기억이 없는 모양인데, 그게 말이 되나? 검 궤도도 순식간에 되돌려 놓고는.
나는 일단 검 자루를 쥐고 있던 손을 떼어 놓고 물었다.
“혹시 의식을 잃지 않았었나?”
“의식을요? 딱히 그런 기억은 없습니다만…….”
“……그럼 검의 궤도를 다시 바로잡은 건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정말 나를 살짝 빗나가게 하는 정도의 수준이라 눈치채기 힘들었을 텐데.
하지만 데이크는 내 말에 나보다 더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순간 어색한 느낌을 받아서 고치기는 했는데…… 혹시 그게 단테 경의 새로운 기술이었던 겁니까?”
“……그걸 그렇게 바로 고쳐 버렸다고? 인식하기도 힘든 찰나였을 텐데.”
“허투루 검을 휘둘러 온 건 아니니까요. 검사라면 누구든 가능할 겁니다.”
“…….”
그 누구든 가능하다는 기술, 나는 할 자신 없는데.
반응 속도에는 나름 자신 있지만, 저런 건 몸에 배인 습관 같은 거다. 정말 어릴 때부터 검을 수만, 수십만 번 휘둘러 온 사람들에게만 깃드는 버릇 말이다.
나는 겉으로 티가 나지 않게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런 데에서 또 부족함을 느낄 줄이야. 야매로 성장해 온 만큼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가끔 이럴 때마다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게 절망이나 좌절감은 아니다. 그보다는 초행길을 앞둔 여행자의 막막함이라 해야 하나?
골인 지점이 어딘지 짐작이 안 가 조금 갑갑한 느낌이 들 뿐, 동시에 왠지 모를 설렘도 느껴진다는 소리다.
21세기를 살아가던 현대인이 검 들고 가질 만한 감상인가 싶기는 한데……. 뭐, 어차피 배워야 할 거 나도 즐길 수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
“아무튼, 의식을 잃었다는 자각은 없다 이건가?”
“네. 그렇습니다. 제가 정말 의식을 잃은 게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데이크는 아직도 본인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멈춰 있었다는 걸 믿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영상이라도 찍을 수 있으면 확실히 확인시켜 줄 수 있었을 텐데.
뭐 됐나. 어차피 비밀병기는 최대한 숨겨 놓는 편이 좋으니까.
나는 데이크에게 사실 신체를 강화했던 것이 새로 익힌 기술이 맞다고 둘러댄 뒤, 일단 녀석을 돌려보냈다.
생각보다 강화된 성능이 뛰어나 사람 상대로 실험해 보긴 부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살짝 내보인 것만으로 저 정돈데, 진심으로 했다가 자칫 의식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되돌리는 방법도 모르는데.
“나중에 몬스터 상대로 실험해 보는 수밖에 없겠네.”
우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내일 또 아이언의 훈련을 견디려면 최상의 컨디션은 필수니까.
* * *
“뭐, 이제 대충 토대는 잡힌 것 같네.”
“…….”
저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지? 토대가 잡혀?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로 아이언을 노려봤다.
“저는 이미 기본은 된 상태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기본이 된 거랑 토대가 잡힌 거랑은 다르지.”
“그게 뭐가 어떻게 다른 건데요?”
“글쎄. 그냥 내 기준?”
만약 아이언이 일부러 저런 태도를 고수하는 거라면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저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어서라도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쳐 오르니 말이다.
“그럼 이제 훈련은 다 끝났다고 보면 되는 거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음을 정리했다. 아직은 얼굴에 한 방 먹일 자신도 없으니까.
홧김에 강화됐던 검의 능력을 최대 출력으로 발동시켜 보기도 했었는데, 그냥 갑자기 조금 노곤해졌다며 하품 한 번 하는 게 다더라.
하긴, 저 녀석한테 조금이라도 유효타를 먹였다는 게 어디긴 하냐만.
아무튼, 이제야 좀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네. 요즘은 자면서도 추락하는 꿈이 나오는데, 그것 때문에 제대로 숙면을 취해 본 적이 없다.
산에서 떨어지는 이 미친 짓거리가 끝이 나면 그런 일도 없어지겠지.
하지만 아이언은 나의 기대를 박살 내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기초 훈련은.”
“……기초 훈련은?”
나도 모르게 반말부터 튀어 나갔다. 그야 아이언 입에서 나온 내용이 너무 황당했으니까.
“제가 알기론 훈련 과정에 기초니 심화니 하는 건 없었던 걸로 아는데요.”
“거참, 도망쳤던 놈들이 그런 것까지 전부 얘기했다고? 자존심 상해서라도 조용히 지낼 줄 알았는데.”
물론 살아남은 훈련생들에게 들은 건 아니다. 녀석들은 아이언과 있던 수련에 대해선 입도 뻥긋 안 하려는 성향이 강하니까.
아이언 말대로 자존심이 상해서라기보다는 혹시나 녀석이 잡으러 올까 봐 최대한 몸 사리는 것에 가깝긴 하지만.
“제 정보력 아시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수련 내용에 대해서 아는 거 거의 없을 거예요.”
“흠……. 그렇단 말이지.”
대충 납득한 듯 아이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그놈들한테 들었으면 모를 수밖에 없겠지. 그중에 한 명도 기초 훈련을 통과한 녀석이 없으니까.”
정말 하나도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애초에 수련이라 해 놓고 산에서 떨어지는 것만 시킬 리는 없잖아. 애초에 그런 건 딱히 내 도움 없이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도움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아이언이 없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그런 미친 짓을 시도하진 않았을 거다.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킨다는 관점에서 보면, 아이언에게도 스승이라는 단어가 어울릴지 모르겠다. 대개 가르치는 입장이란 건 그와 비슷한 법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저 녀석은 너무 나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럼 심화 수련은 대체 뭔데요? 설마 화산에 뛰어들기 이런 건 아니죠?”
“토대는 닦았으니, 이제는 그 위를 건설해야지.”
스르륵. 아이언이 허리춤에서 본인의 검을 꺼내 들었다.
암만 무구가 실력 본연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지만, 보통은 경지가 올라갈수록 비싼 장비를 찾기 마련이다.
그쯤 되면 무기가 부러질 일이 별로 없기도 하고, 폼 나는 거 들고 있으면 나름 만족감 들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런데 녀석의 검은 정말 근처 아무 대장간이나 가도 살 수 있을 만한 평범한 롱소드였다. 마치 그런 불필요한 사치품은 아무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아이언은 그렇게 꺼내 든 검을 내게 겨누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심법은 내가 가르쳐 줄 수 없으니까, 나는 그냥 검술만 익힐 수 있도록 도와줄게.”
* * *
플레이어들에게 ‘벨리아 대륙 전기’에서 가장 강한 인물을 뽑아 보라 하면 보통 이견이 갈리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상성이란 게 있다 보니 어느 하나를 콕 집어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마치 가위바위보 같은 관계라 해야 하나.
얘한테는 이겨도 쟤한테는 진다면 도저히 최강자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반대로 특정 인물에게 이긴 쟤가 내가 이긴 얘한테 지기도 하니까.
말이 조금 이상해졌지만, 아무튼 ‘최강’에 대한 논쟁은 결국 일정 분야에 관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단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커뮤니티에 이런 내용의 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검 제일 잘 쓰는 놈은 누군데?]
패도적인 리카르도? 극단적으로 동작을 줄인 카일? 아니면 안정적인 데이르 칸?
―우리 아이언 님은 대체 왜 빼는 거냐?
ㄴ그 새끼가 무슨 검술이야. 강하긴 해도 검술은 아니지. 그냥 몸뚱이 믿고 밀고 나가는 게 다잖아.
―역시 제국 1기사단장까지 달았던 리카르도 아니겠냐? 실제로 2부 엔딩 시점까지 칸이랑 카일 둘 다 리카르도 못 이기잖아. 뭐, 데이르 칸은 사실상 졌다기보단 무승부에 가깝긴 한데…….
ㄴ전체적인 실력 보자는 게 아니라 검술 하나만 놓고 보자는 거잖아. 나는 그런 경우로 쳤을 땐 당연히 카일밖에 없다고 본다. 리카르도도 결국 카일한테 죽었잖아.
ㄴ지랄하네. 그건 걔가 그냥 죽어 준 거고. 게다가 원래 이긴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놈이 이긴 거라는 법 모르냐? 칸이 작정하고 방어만 하면 리카르도든 카일이든 아무도 못 뚫을걸? 당연히 데이르 칸 검술이 제일 세지.
ㄴ아, 방어를 그렇게 잘하셔서 계속 처맞다가 뒤져 버린 거구나 ㅎㅎ;
ㄴ뭐 새꺄?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흔하게 올라오는 뻘글일 뿐이라 여겼지만,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커뮤니티를 활활 불태워댔다.
아마 사람들이 마침 심심했던 시점이기도 하고, 실제로 뭐라 딱 잘라 정하기 어려운 문제라 더욱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너무 과열되는 분위기에 내가 슬슬 개입해야 하나 고민할 때쯤.
[이건 논쟁할 가치가 없는 문젠데. 리안이 설정에 써 둔 거 안 봄?]
갑자기 올라온 한 게시물이 모든 갑론을박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게임 하면서 설정 같은 걸 누가 보냐? 리안이 검술 최강이라고 박아 둔 사람이라도 있음?
―누구임? 역시 제일 강한 리카르도지?
ㄴ검술만 좀 처 보라고. 당연히 2부 주인공인 카일 아니겠냐.
ㄴ살아남는 게 최고라니까. 방어 최강인 데이르 칸이 제일 뛰어나다니까.
ㄴ그러니까 그 새끼 뒤졌다고.
ㄴ뭐 새꺄?
ㄴ자자, 진정들 하고.
아마 그 게시물 작성자는 그때 커뮤니티의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그러니 일부러 나서기까지 한 거겠지.
하지만 본인이 앞으로 할 대사가 오히려 불길을 키워 줄 장작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 해 봤던 것 같다.
―리안이 설정으로 공언하길, 가장 강한 검술을 가진 건 1부 주인공인 아이언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