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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36화 (136/225)

너의 코드가 보여 (136)

바포메트의 몸뚱이는 버릴 거 하나 없는 보고와 같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놈의 뿔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뻔한 일이다.

뿔은 녀석의 힘이 분출하는 걸 막고 있던 근원.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만큼, 많은 기운이 집중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굳이 그런 이론까지 갈 것도 없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기도 하고. 아이언이 놈에게 녹용 운운했던 말도 그렇게 틀리지는 않았다는 거다.

뭐, 그렇다고 진짜 녹용처럼 달여 먹지는 않을 거지만. 뭔가 살아 있을 때 모습 생각나서 기분 나쁘기도 하고.

아무튼, 그쯤에서 나는 팔을 쭉 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네.”

아까까지 방 안에 같이 있던 아이언도 저 멀리 어디론가 가 버린 상태다. 아무리 녀석이라도 이 정도 거리에 이쪽이 뭔 짓을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은 없겠지.

조금 오버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지금부터 할 것은 이 세계에 알려진 방법이 아니다.

대체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냐는 질문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라며 넘어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않은가.

가능하면 최대한 안 걸리고 넘어가는 것이 최고란 뜻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주변의 코드 확인을 마친 뒤, 흑철검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바포메트의 뿔 하나를 옆으로 걸치게 살짝 얹었다.

요컨대, 흑철검과 바포메트의 뿔을 마치 십자가처럼 만들었다는 거다.

―무슨 의식 현장을 보는 거 같군요.

품속에 있던 스바가 대뜸 혼자 빠져나오더니 말했다.

어째 점점 자율성이 강해지는 거 같은데……. 아니, 그보다 연료 아깝다. 저렇게 떠 있는 것도 전부 내 혼원력이잖아.

나는 녀석의 밑을 손으로 감싸며 입을 열었다.

“의식이라.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겠네.”

―……정말로 의식을 하실 거란 말입니까? 전에 분명 믿는 신은 없다고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신한테 기도하는 게 아니야.”

내 말에 스바가 더욱더 의아한 기색을 띤다. 녀석은 내 손을 벗어나더니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를 위해 의식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야 당연히 나를 위해서지.”

―……본인을 위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 뿔은 내 검을 강화시키기 위한 물건이거든.”

* * *

내가 만든 ‘벨리아 대륙 전기’에는 장비 강화라는 개념이 딱히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RPG 게임이라는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딱히 과금 요소를 없애고 싶었다거나 하는 숭고한 이유는 아니고, 그냥 먼저 만들어 둔 설정 탓이다. 바로 마력은 모든 물리력에 우선한다는 것 말이다.

그놈의 설정 때문에 무구의 성능 여하는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야 실력 있는 드워프 장인이 수년간 영혼을 불살라 만든 검이든, 그저께 처음으로 망치를 들어 본 초보 대장장이가 만든 검이든. 나오는 성능은 완전히 같으니까.

자연스레 기사들은 검의 선택 기준을 디자인과 길이만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내가 흑철석 시리즈를 만들기 전까진 거추장스럽다고 갑옷은 입지도 않았고.

얼마 전 빈센트와 바포메트의 싸움만 봐도 이런 인식은 명확하다.

빈센트의 검은 1급이라는 실력에 걸맞게 상당한 명품이었는데, 부서지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근처의 아무 검이나 가져와 싸우지 않았던가. 물론 전투력에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이렇듯 태생부터 다른 무기로도 아무런 차이가 안 나는데, 그걸 강화한다고 해 봤자 무슨 변화가 일어날 리 없다.

결국 게임에서 강해지는 방법은 본인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뿐이었다는 소리다.

“진짜 무슨 생각으로 만든 설정인지 모르겠다니까.”

RPG 게임에서 장비 성능을 제한시켜 버리면 대체 무슨 재미를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좋은 무구를 얻고 강해지는 걸 보는 게 가장 큰 낙 중에 하난데.

하지만 정작 게임의 재미를 위한다며 그렇게 싫어했던 마력회생까지 넣었던 나는 이상하게도 끝까지 이 설정을 포기하지 못했다. 유저들의 원성까지 들으면서 말이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굳이 얘기하자면…… 그냥 그게 맞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해야 하나? 이 세계는 원래 그런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건 또 무슨 감상에 가득 찬 상념인지.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 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바포메트의 뿔이다. 강화가 없는 세상에서 몇 없는 무구를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이니까.

물론 일반적인 게임에서의 강화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리베라, 여기 물 좀 만들어 줄래? 최대한 깨끗한 걸로.”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가리켰던 그릇에 딱 봐도 깨끗한 물이 가득 찼다. 나는 고맙다는 의미로 문양을 쓰다듬고, 그 안에 바로 준비해 온 재료들을 때려 넣었다.

생각보다 귀한 것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또 다른 도시까지 다녀왔어야 했을 테니까.

“됐다.”

그릇에 찼던 물이 어느새 짙은 푸른색을 띠기 시작했다. 준비해 온 것이 제대로 적용됐다는 뜻이다. 나는 그 물을 바포메트의 뿔과 내 흑철검이 맞닿은 부분 위주로 꼼꼼히 뿌려 줬다.

지이잉.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색은 마치 두 물건으로 옮겨간 것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이때가 딱 완벽한 타이밍이다.

나는 그대로 바포메트의 뿔을 들어 흑철검을 향해 휘둘렀다. 꼭 망치질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두들길 때마다 조금씩 마모되어 가던 바포메트의 뿔은, 무려 쉰 번에 달하는 두들김을 끝으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후…….”

손 몇 번 휘둘렀다고 힘들어질 신체가 아님에도 순식간에 몸 안의 기운을 다 빼앗겨 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느낌 그대로일 거다. 강화 재료 중에는 작업하는 사람의 기운도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제 3급에 오른 내 혼원력이 다할 정도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그만큼 대단한 재료였다는 거겠지.

나는 흑철검을 들어 겉을 면밀히 살펴봤다. 그 칼날은 처음에 눈이 부실 만큼 밝은 푸른색을 띠더니, 이내 점점 사그라져 은은하게 바뀌었다.

원래 칠흑같이 어둡던 색에서 살짝 형광을 더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사실상 양산품과 같던 모습에서 조금 고급스러움을 가미한 느낌이다.

나는 그걸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외형은 마음에 들지만…… 설정엔 색이 변한다는 얘기 같은 건 넣은 적 없는데. 분명 본래대로 되돌아온다고 써 뒀었을 거다.

혹시 강화가 잘못된 건가?

극히 낮은 확률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다. 가끔 무기와 재료의 상성이 오질나게 안 맞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은 금세 쓸데없는 것이 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흑철검에서 코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SW-2-S]

“…….”

이게 뭐지? 여태까지 흑철검에서는 아무런 코드도 떠오른 적이 없었다. 그냥 내가 게임 내에 구현하지 않은 물건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강화한 흑철검 역시 마찬가지다.

“음…….”

어쩌면 강화가 된 것으로 게임 내 존재하던 물건처럼 인식됐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고유 코드가 아니라 공용 코드로 뜨기도 하고.

아무튼, 중요한 건 강화가 제대로 먹혔느냐 안 먹혔느냐 하는 거지.

나는 딱 적당한 실험 상대를 떠올리며,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몸을 향했다.

* * *

“……갑자기 대련을 말입니까?”

데이크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하긴, 내가 4급일 때도 졌는데 3급에 오른 지금 왜 굳이 대련을 하자는 건지 짐작도 안 가겠지. 만약 녀석이 속 좁은 녀석이었다면 그런 말을 듣자마자 내게 모욕을 주려는 것이냐며 화를 낼 수도 있었다.

나도 데이크가 그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 꺼낸 말이지만.

“솔직히 말하지. 이번에 스승님과 수련하며 새로 깨달은 기술이 있다. 그런데 이걸 실험해 보자니 마땅히 떠오르는 상대가 없더군.”

내 말을 들은 데이크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그렇군요. 하긴, 단테 경은 저 말고는 대화하는 상대도 없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 뭔가 기분이 조금 언짢다. 마치 따돌림이라도 당한 것 같은 느낌이라. 내가 무슨 초등학생도 아니고…….

나는 굳이 그에 대해 변명하는 대신 데이크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무튼, 그런 사정인데 조금 도와줄 수 있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약속하지.”

“단테 경의 부탁인데, 혹시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더라도 당연히 들어드려야지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데이크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곧바로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어쩐지 나보다 의욕 넘치는 모습인데. 그냥 녀석 인성이 좋아서라고 넘기기엔 조금 과장된 느낌이다.

여태 티는 안 냈지만, 역시 나와 설욕전을 겨루고 싶었던 건가?

데이크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토너먼트에서 녀석을 이기긴 했지만, 그건 정말 아슬아슬하게였으니까.

사실 데이크가 이겼어도 하등 이상할 거 없는 경기였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만약 내가 코드를 볼 수 없었다면 분명 녀석이 이겼겠지. 데이크도 승부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는 사실을 분명 느끼고 있었을 거다.

뭐 어찌 됐든 의욕적으로 나서 주면 나도 좋지. 실전에서도 먹히나 실험해 보는 것이 목적이니까.

나는 녀석과 반대로 허리춤의 흑철검을 검집에서 빼지 않은 채 자루만 움켜쥐었다. 데이크가 그걸 보더니 말없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검을 쥔 순간부터 대화 같은 건 의미가 없다는 뜻인가. 좋은데.

녀석이 천천히 다가오는 걸 바라보며, 내가 만든 설정을 떠올렸다.

‘벨리아 대륙 전기’의 강화가 일반적인 게임의 강화와 가장 차이 나는 점은 바로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깃드는 능력이 전부 다르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바포메트의 뿔이 가진 능력은 ‘개념의 강화.’ 무슨 무구든 가지고 있는 성질을 상승시켜 준다는 데 있다.

즉, 장비의 특수 능력을 상승시켜 준다는 얘긴데, 마침 내 흑철검에는 딱 좋은 힘이 깃들어 있지 않던가.

바로 바이론을 베고 얻은 최면 말이다. 말과는 달리 그냥 4, 5급 이하 적들을 잠깐 멈칫하게 하는 정도가 전부였지만……. 강화를 마친 지금은 얼마나 발전했을지 나도 짐작이 안 간다.

“……저기, 실례지만 공격해도 되겠습니까?”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데이크가 검을 내려치기 직전의 모습으로 멈춰 서 있었다.

아무래도 그대로 공격하려다 내가 방어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으니 망설여졌나 보다.

“당연하지. 내가 실전처럼 해 달라고 하지 않았나. 너는 실전에서 상대의 허락을 받고 공격하는 타입인가 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무방비의 상대를 공격하는 건 조금…….”

“상관없다.”

나는 덤덤한 얼굴로 녀석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내가 깨달은 건 지금 이 상태로도 쓸 수 있는 기술이니까.”

“…….”

데이크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지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무리 녀석이라도 조금 자존심이 상한 듯 표정을 굳혔다.

“그럼 사양 없이 가겠습니다. 혹시 조금 다친다 하더라도 나중에 저한테 뭐라고 하지는 마시지요.”

“물론이다.”

내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데이크의 검이 무서운 기세로 내려쳐 오기 시작한다. 마력을 조절한 만큼 죽지는 않겠지만, 정통으로 맞으면 보통 신관 신세를 면치 못할 거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게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긴 벌써 산 정상에서 수십 번씩 자진해 뛰어 놓고 검 조금 맞는 게 무서울 리가 있나.

덕분에 나는 조금 여유로운 기분이 돼서 데이크를 바라볼 수 있었다. 녀석의 얼굴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인다.

검의 성능이 얼마나 향상됐는지 모르니까…… 일단 살짝 조절해서 사용해 볼까. 데이크가 잠깐 휘청일 정도로만.

그렇게 마음먹고 내가 검의 능력을 개방한 순간.

우뚝.

데이크의 몸이 마치 뭔가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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