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35)
살면서 이렇게 괴로웠던 순간이 또 있었나 싶다.
무영보 수련할 때가 그나마 비슷하긴 했는데, 그쪽은 내가 조절이라도 가능했지. 이건 그냥 대놓고 생고문 아닌가.
지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저 인간은 징역 수천 년 정도는 받았을 텐데. 아니, 신고해야 할 피해자가 이미 사망한 상태였을 테니 무혐의로 넘어갔으려나.
“……젠장.”
나는 빠드득 으드득 정체 모를 소리를 내며 재생되고 있는 하체를 바라봤다.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거 보면 분명 내 다리인 것이 확실한데, 어째서인지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아마 그 형태가 90도로 꺾여 있기 때문이겠지.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뭔가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다.
“이젠 기절도 안 하네?”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만 살짝 돌려 인영을 확인했다. 얼굴 들 힘도 없어 발밖에 안 보인다. 어차피 여기서 저렇게 재수 없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건 단 한 명밖에 없지만.
……확률 낮더라도 죽빵 날리는 거 시도라도 해 볼걸. 저 인간 면상에 주먹 한 방 먹이지 못하면 억울해서 눈도 못 감을 것 같다.
아이언은 뭐가 그리 흥겨운지 허밍까지 해대며 말했다.
“차라리 기절할 때가 나았지? 아프지도 않고 그런 그로테스크한 꼴 볼 일도 없었잖아.”
“…….”
“그런데 이번이 몇 번째더라? 스무 번쯤 됐나? 사실 원래 목표는 세 번 정도였는데, 혹시 알고 있었어? 혼자 회복을 너무 잘하길래 그냥 말 안 하고 있었지.”
“…….”
“그렇게 노려보진 말고. 그런다고 내 발에 구멍이 뚫리지는 않아.”
저 나불대는 입을 꿰매 준다면 상대가 누구든 만 골드 정도는 지불할 수 있을 거 같다. 세상에 그게 가능한 인간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실현 불가능한 꿈은 접어 두고, 팔을 움직여 품속의 스바를 꺼냈다. 지 혼자만 방어 마법을 펼쳤는지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하다. 배신자 자식.
차마 타박할 힘도 나지 않아 그냥 말없이 준비해 둔 식량을 안에서 꺼냈다. 그걸 본 아이언이 흥미롭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거 이름이 전투식량이랬나? 다음에 나한테도 몇 개만 가져다 주라. 육포는 이제 조금 질리더라고. 어차피 너희 상단에서 파는 거라며.”
“…….”
“이젠 그냥 나랑 대화를 안 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거야? 하여간 사내놈이 쪼잔 하긴.”
“굳이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을 뿐이거든요.”
어느 정도 회복한 다리를 일으켜 세우며 대답했다. 아직 완벽하게 나은 건 아닌지 움직일 때마다 우직우직 소리가 난다. 나는 그걸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보다 그만 가 봐도 되죠? 이것도 이제 효과 다 떨어진 거 같은데.”
“효과가 다 떨어졌다고?”
아이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마치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했다는 것처럼.
괜히 연기하기는. 대체 얼마나 더 이 헛고생을 시키려고.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한 두세 번 전쯤부터 떨어져도 상승하는 마력이 없었어요. 이걸로는 이제 죽음의 위기가 안 된다는 거겠죠. 어차피 다 계산하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렇게 물었는데 한참 동안 대답이 없다. 설마 그런 계산도 없이 무작정 뛰어내리도록 시킨 건 아니겠지? 본인 입으로 과학적이니 뭐니 해 놓고는.
나는 뻐근한 다리를 풀며 의심의 시선으로 아이언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혹시 아무 생각도 없었던 건 아니죠?”
“……아니, 계산은 확실히 해 뒀었는데…….”
아이언이 뭔지 모를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는데, 그게 끝이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던 것이다.
그걸 보고 뭐라 재촉할까 하다가, 그냥 그만뒀다. 혹시 진짜 무식하게 뛰어내리게 한 거라 쳐도 따질 만한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었으니까.
대신에 나는 스바를 조금 더 키워 그 위에 탑승했다.
“더 볼일 없으면 그만 가 보려는데, 안 타세요?”
“…….”
내 물음에도 아이언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두 번 묻지 않고 바로 스바를 띄워 버렸다. 행여 제정신이라도 차릴까 봐.
저 실력에 도시까지 걸어온다고 힘들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귀찮기는 할 거다. 지도 고생 좀 해 보라지.
나는 그렇게 멀어지는 아이언을 향해 소금을 뿌리며 맘 편히 웃었다.
* * *
……아이언을 절대 그렇게 혼자 내버려 두고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시점에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주점의 탁자에 얼굴을 파묻고 그런 후회를 하고 있었다.
설마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산을 찾아올 줄이야…… 이러다가 나중에는 스바 위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는 거 아닐까. 그랬다가는 진짜 죽은 목숨일 거다.
“하아…….”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무튼 훈련의 효과는 확실하다는 거다. 내가 봐도 겨우 일주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발전한 상태였으니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혼자 이렇게 지지리 궁상떨고 있는 것밖에 없다는 소리다.
“……단테 경?”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럴 기운도 아까웠으니까.
그렇게 잠깐 있자, 앞의 의자에 누군가 앉는 기색이 느껴졌다.
“역시 맞으시군요. 경께 너무 안 어울리는 자세라 혹시 착각했나 싶었습니다.”
“……데이크.”
겨우겨우 고개만 살짝 들어 앞쪽을 응시했다. 데이크는 반갑다는 얼굴로 앉아 있다가 나를 보더니 크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저번 전투의 부상이라도 아직 남아 있는 겁니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안색이군요. 신관을 불러드릴까요?”
차라리 저 말대로 바포메트와 싸우다 남은 부상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그건 뭐 영광의 상처라도 되지.
나는 안 나오는 목소리를 애써 쥐어짜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물리적으로 남은 부상은 없으니까.”
“정신적으론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만…….”
제대로 들었네.
순간 저도 모르게 투정이 나오려 해서 잠깐 입을 다물었다. 단테 성격에 안 맞기도 할뿐더러, 내 본래 성격에도 안 맞으니까.
아니, 어떤 성격이든 이 나이 먹은 사내놈이 투정 부리는 걸 보고 싶지는 않겠지.
나는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대로 말을 이었다.
“그쪽도 신경 쓸 거 없다. 그 재앙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니까.”
“재앙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면……. 역시 그 아이언 님과의 수련 때문입니까?”
“그래.”
내가 태연히 답하자, 데이크가 밝게 눈을 빛냈다.
“단테 경이 그렇게 힘들어하실 정도라면 과연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군요. 당연히 평범한 수련과는 거리가 멀 거라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뭐가 있기는 하지. 과학에 근거한 무식이랄까? 그냥 데이크가 얘기했던 아카데미 훈련의 심화 편일 뿐이다.
나는 다시 떠오르는 악몽을 내쫓으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데이크는 대체 어떤 수련을 했나 궁금한 기색이었다. 차마 묻지는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거 보면 확실할 거다.
하지만 나는 대답해 주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딱히 비밀이어서가 아니라, 녀석의 환상을 굳이 깨 버리고 싶지 않아서다.
“뭐, 저는 힘내라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겠군요.”
데이크는 내 굳게 닫힌 입을 보고 이내 포기한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혹시 아이언 경이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전해드릴 말이 있는데, 단테 경과의 훈련 때문인지 계속 보이지가 않더군요.”
“알기는 아는데…… 무슨 볼일이지?”
순간 얘가 아이언 팬이라는 것이 생각나서 물었다. 싸인을 받으려는 것이거나 격려라도 원하는 거면 어떻게든 말리려고. 놈은 그런 대접받을 만한 위인이 못 돼.
데이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바포메트…… 아, 그 재앙의 이름 말입니다. 녀석이 봉인되어 있던 동굴 안에 새로 드러난 공간을 탐색하니 그렇게 적힌 문헌이 있더군요.”
“그렇군. 그래서 바포메트가 뭐 어쨌다는 거지?”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데이크가 품에서 뭔가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탁자 위에 놓았다. 언뜻 권리니 뭐니 하는 단어가 보이는 거 보면 계약서임이 틀림없었다.
이게 무슨 뜬금없는 계약선가 싶어서 보고 있는데, 녀석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이언 경에게 바포메트의 사체에 관한 권리를 구매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상 그분이 죽인 것이니, 권한도 그분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아.”
바포메트를 해치우고 얼마 되지도 않아 산에서 낙하하는 경험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음에도 말이다.
나는 재빨리 탁자 위에 있던 종이를 챙겨 품속에 넣어 버렸다.
“무슨 얘긴지 알겠다. 스승님께는 내가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지. 굳이 네가 고생할 것 없다.”
“아,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러면 저야 감사하죠.”
데이크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금세 시선을 피해 버렸다.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이런 보물을 왕국에 순순히 넘길 순 없지.
나는 품 안의 계약서를 마력으로 슬쩍 태워 버리며, 남몰래 흡족하게 웃었다.
* * *
“그때 그 염소대가리 시체? 그걸 대체 어디에 쓴다고?”
아이언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어왔다. 그 문제는 전혀 생각조차 안 해 봤다는 기색이다.
“굳이 어디에 쓰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어디에 쓸 수 있을지 연구해 보려는 생각이겠지요. 생체 구조가 대체 어떻게 돼먹은 건지도 궁금할 테고요. 대륙에 처음으로 보고된 1급을 초월한 마물이니까요.”
“흐음…….”
아이언은 별로 흥미 없다는 듯 고개 돌리더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는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냥 알아서 처리하라고 그래.”
“그럼 혹시 제가 써먹어도 될까요?”
“네가?”
“네.”
“대체 그걸 뭐에 쓰게?”
“왕국이랑 똑같죠, 뭐. 다시는 구할 수 없을 샘플이니 그냥 이것저것 조사해 보려고 해요.”
최대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노력하며 덤덤히 대꾸했다. 아이언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건 마법사한테나 맡기지? 네가 조사한다고 뭐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저도 무조건 제가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 아니에요.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왕국에 적당한 가격 받고 넘길게요.”
“수련엔 지장 없도록 하겠다는 뜻이지?”
“물론이죠.”
“그럼 됐고.”
아이언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그대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환호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무려 바포메트의 몸뚱이 아닌가. 게임 내에서도 후반부에나 겨우 얻을 수 있는 최중요 아이템. 그런 걸 이렇게 간단히 얻어 버린 거다.
시체 보고 아이템이라 표현하니 무슨 사이코패스라도 된 것 같아 조금 뭐하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녀석으로 만들 수 있는 수십 가지 물건들을 떠올리며,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