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33)
아이언의 뒤에는 대체 어디다 쓰는지 모를 물건들이 한 줄로 늘어져 있었다. 언뜻 보기엔 고문 기구 같지만, 아마 아이언 용 훈련 도구들일 거다. 내가 지구에서 대충 생각했던 것들이랑 얼추 닮았으니까.
판단을 보류하고 자리를 떴다 생각했는데, 저것들을 챙기러 간 거였나?
“…….”
일단 당황하지 말자. 지금 상황에서 냉정을 잃었다가는 처참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로 덤덤하게 대꾸했다.
“혹시 마음대로 제자를 사칭했던 것이 기분 나빴던 거라면 다시 한 번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그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제가 그쪽이 있는 대사막 중심부까지 갈 수 있는 실력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오, 내가 대사막 중심부에 있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나 봐?”
아이언이 재밌다는 듯 싱긋 웃었다.
“그런데 스승님한테 그쪽이라니. 이것저것 아는 체해도 정작 말버릇은 별로 배우지 못한 모양이네.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가 그쪽까지 충분히 교육시켜 줄 수 있으니까. 내 초기 별명이 예절 주입기였거든.”
그러더니 금방이라도 칠 듯한 기세로 주먹을 뱅뱅 돌린다.
빌어먹을.
저게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더 무섭다. 이 나이 먹고 남한테 처맞고 있으면 마음이 무너져 내릴 거야.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스승 제자 놀이는 이제 그만둬도 괜찮아요. 내일 바로 사실대로 정정하고, 앞으로 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일도 없을 테니까요.”
“응? 왜? 그럴 필요 없어.”
아이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이대로 네가 내 진짜 제자로 들어오면 끝이잖아. 너는 거짓말쟁이 낙인을 벗을 수 있어서 좋고, 나는 드디어 제자를 받을 수 있어서 좋고. 동방에서는 이런 걸 일석이조라고 하던가?”
일석이조는 시X아. 나 이전에 받았던 제자 수백 명이 수련 중에 죽었다는 얘긴 왜 쏙 빼놓냐? 그게 제일 중요한 거잖아.
나는 그리 말하고 싶은 걸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꾹 참았다. 그랬다가는 진짜 저 주먹이 내 얼굴로 날아올 것 같았으니까.
“……혹시 실질적인 보상을 원하는 거라면 차라리 대놓고 말씀을 해 주시죠. 말하는 조건에 최대한 맞춰드릴 테니까.”
“세상에 나한테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생각해? 설령 있다고 해도, 그걸 네가 구해다 줄 수는 없을걸?”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지금 시점의 나로서는 아이언이 원하는 물건을 구해다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돈도 나보다 많을 거다. 1부 완결 이후 버는 족족 은행에 모아 뒀다는 설정이던가. 그냥 겸사겸사 저금한 것이 꽤 잘나가는 상단 운영하는 나보다 많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갑자기 의욕이 꺾이려 하네.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 냈다. 지금 중요한 건 당장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지, 재산 문제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될 거란 건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다. 나는 깊게 심호흡한 뒤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진짜 제자가 필요하신 거면 제가 따로 소개시켜 드릴 수도 있어요. 이래 봬도 사람 보는 안목은 좀 있거든요. 당연히 수련 중에 죽을 걱정도…….”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나는 너만 제자로 들이면 되거든.”
……어렵게 준비해 둔 말이 이렇게 쉽게 파훼당할 줄은 몰랐는데. 특정 인물에 집착한다는 설정은 없었거늘.
“혹시 제가 뭐 크게 밉보일 일이라도 했습니까? 마음대로 제자 사칭한 거 말고요.”
“그런 건 없는데, 슬슬 생기려 하네. 내가 제자로 받아 준다는데 왜 그런 반응이야? 예전에는 나한테 제발 제자로 받아 달라고 비는 놈들 천지였는데.”
이젠 아무도 없다는 게 문제잖아. 나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수련 방식이요.”
“수련 방식이 뭐?”
“너무 무식하잖아요. 통과율 제로. 생존율 십 프로. 이게 정상으로 보여요?”
“아, 난 또 뭐라고.”
아이언은 정말 대수로울 것 하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수련하는데 그 정돈 당연한 거 아니야? 대체 얼마나 편하게 강해지려는 건지 모르겠네.”
“…….”
고생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걸렸다는 게 문제라고.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이마를 감싸 버렸다.
이 인간의 기준은 보통과 안드로메다급으로 격차가 벌어져 있다. 그러니까 별로 제자가 되고 싶지 않은 거다. 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강해지긴 할 텐데, 그 전에 내 정신이 먼저 부러지는 게 더 빠를 거니까.
레이튼에서 독종 소리까지 들으며 수련해 왔던 나다.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 정도는 이미 파악했다는 소리다.
노오오오력으로 될 거 같았으면 내가 먼저 부탁했지.
“……정말 제자 될 만한 사람 소개시켜 주는 걸론 안 되겠어요?”
“응. 나는 너 가르치는 게 더 재밌을 거 같거든.”
“제가 때려죽여도 못 하겠다 하면요?”
“그럼 반만 때려죽여 줄게. 보통 내 제자 사칭해서 사기 치고 다닌 놈들 절반은 그렇게 만들어 줬거든.”
아이언 기준에서 반만 때려죽인다는 게 어느 정돈지 모르겠다. 설마 진짜 반으로 갈라 놓고 반죽음이라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결국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내뱉었다.
“그럼 좋아요. 그쪽 제자가 되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나한테 조건을 붙이려는 인간은 또 처음 보네.”
아이언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재밌어. 뭔지 한번 얘기나 해 봐. 들어줄지 말지는 내 마음이지만.”
“수련은 제가 원할 때만 할 거예요.”
녀석이 딴소리를 하기 전에 재빨리 치고 나갔다. 내 말을 들은 아이언이 코웃음을 쳤다.
“아직 수련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꾀부릴 생각부터 한다고? 설마 내가 그런 걸 받아들일 거라 여긴 건 아니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걸요.”
“왜? 안 그러면 그냥 나한테 맞고 말 거니까?”
“아뇨. 제가 그렇게 수련만 하고 있으면 이 세계는 멸망할 거니까요.”
아무리 아이언이라도 이 급속한 논리 전개에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나를 미친놈 보듯 바라봤다.
“별로 들을 가치는 없어 보이지만, 대체 왜 그렇게 되는지 일단 한번 설명해 봐. 들어 보고 판단하지.”
“문이요. 제국 황제한테 들었죠?”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묻자, 아이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분명 그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그냥 정보 관련 능력이 조금 있다고 해 둘게요.”
내 대충대충인 대답에 아이언은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당장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판단한 듯 곧바로 안색을 되돌렸다.
“뭐, 좋아. 대륙엔 요상한 능력 가지고 있는 놈들이 한둘도 아니니까. 그보다 문이랑 너랑 무슨 관계라는 건데?”
“제가 막을 수 있으니까요.”
“제국 황제도 포기한 걸, 네가?”
“네. 제국 황제도 포기한 걸, 제가요.”
“…….”
아이언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근처 의자로 가서 앉더니, 단번에 확언했다.
“역시 미친놈이었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음에 나올 대사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언이 곧이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조금 맛이 간 놈들이 좋더라. 평범한 애들은 금방 고장 나 버리거든.”
인간이 어떻게 고장 나냐는 질문은 할 필요 없었다. 어차피 좋든 싫든 내가 곧 겪게 될 테니까.
“네 말을 전부 믿는 건 아니지만, 일단 조건은 받아들일게. 다만, 그냥 꾀부리고 싶어서 거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바로 끝일 줄 알아.”
“그 정도면 충분해요.”
“좋아. 혹시 더 요구할 건 없고? 이참에 하고 싶은 말 전부 해 봐. 웬만한 건 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저건 거짓말이다.
녀석을 만들고 플레이했던 입장에서 단언할 수 있었다.
이럴 때 좋다고 이것저것 요구하면 건방지다며 기합을 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이언 기준에서 주는 기합은 보통 생각하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겠지.
내가 그런 뻔한 기선제압 수법에 걸릴 줄 알고?
나는 속으로 슬쩍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굳이 더 요구할 건 없어요. 하나 들어준 것만으로 감사하죠. 제가 제자로 들어가는 입장인데요, 뭐.”
“그래? 그럼 됐고.”
일부러 정중하게 대답했는데, 의외로 아이언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뭐지? 슬쩍 아쉬운 기색이라도 보일 법한데. 원래 반항하는 제자를 한 번 줘패 주고 시작하는 만큼, 저렇게 나오니 오히려 더 불안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살짝 초조해하고 있는데, 아이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덤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바로 준비해.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밖으로요? 왜요?”
“왜긴 왜야.”
아이언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내 쪽을 바라봤다.
“언제 못 한다고 할지 모르니까 할 수 있을 때 바로 수련하러 가야지.”
* * *
그렇게 한 시간 뒤. 나와 아이언은 어느 산의 정상에 도착해 있다. 상당히 높은 곳이었는데, 올라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스바를 타고 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뭐 잔뜩 들게 한 다음 마력 쓰지 말고 따라오라 할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인걸.
내가 그에 대해 물어보자, 아이언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 대꾸했다.
“진짜 내가 그런 무식한 훈련을 시킬 거 같아? 이래 봬도 나름 과학적인 방법을 신봉한다고.”
“살아남은 몇몇 수련생들 얘기로는 풀 플레이트 갑옷 입혀 놓고 토끼뜀으로 올라오게 했다던데요.”
“그건 진짜 기본도 안 된 놈들한테만 시킨 거고. 너는 그런 거 해 봤자 아무 도움 안 되잖아.”
……그게 정말 수련생 맞춤 강의였다고? 내가 알기로는 토끼뜀 안 하고 넘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대체 기본의 기준이 어느 정도인 거야.
아무튼, 분명 할 거라 생각했던 훈련을 건너뛰어 버리니까 오히려 조금 믿음이 생겼다. 실제로 그런 짓 해 봤자 나한테는 시간 낭비일 뿐이긴 하지.
의외로 진짜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걸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일말의 기대심을 품고 절벽에 다가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럼 그렇게 산 타기 할 것도 아니면서 굳이 여기까진 왜 올라온 건데요? 설마 좋은 공기 마시며 수련하자고 그런 건 아닐 테고.”
아이언의 수련 방식에 대해 전부 다 서술한 건 아니지만, 일단 대부분은 알고 있다. 그중 산 정상에서 해야 하는 수련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이언은 내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그냥 거기서 뛰어내리면 되는 거지.”
“아, 그냥 여기서 뛰어내리면 되는…….”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멈춰 버렸다. 별거 아니라는 듯 얘기해서 눈치채는 게 늦었는데, 뭔가 너무 자연스럽게 인간의 입에선 튀어나오지 말아야 할 소리를 내뱉지 않았나?
설마 하는 심정으로 절벽 아래를 바라봤다. 그동안 아파트 10층쯤 되는 높이에서도 뛰어봤지만, 이건 그거랑은 비교가 안 된다. 아무리 초인의 몸이라도 바로 납작해져 버릴 거 같은데.
나는 그 절벽을 가리키며 아이언에게 물었다.
“……혹시 뛰어내리라는 게 여길 얘기하는 건 아니죠?”
“여기 뛰어내릴 곳이 거기 말고 더 있나?”
아이언은 내일 아침 메뉴라도 얘기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뭐 해? 얼른 안 뛰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