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31)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군. 하나 해치웠다 싶으면 하나 더 나타나는 인간 놈들 특성 말이야. 네놈은 또 뭐냐?
멀리서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난 바포메트가 이쪽을 노려봤다.
녀석의 목소리는 여태까지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엔 별다른 티가 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열 받은 상태라는 걸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거다.
무려 1급 기사조차 상대를 포기한 괴물의 분노한 음성.
하지만 정작 그 질문을 받은 남성의 안색엔 흥미롭다는 기색만 가득했다.
“뭐만 했다하면 제 뿔 뽑으며 변신해대는 놈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무슨 녹용 달여 먹는 것도 아니고.”
―……나는 네놈 정체를 밝히라 했을 텐데.
바포메트가 이를 까드득 씹으며 내뱉었다.
저놈 성격에 아직도 몸이 먼저 나가지 않은 건 역시 새로 나타난 남자를 경계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최소한 빈센트보다는 더 강자라 판단했다는 소리다.
거참, 감이 좋다고 해야 할지. 저만한 실력이면 그런 쪽은 좀 무뎌질 만도 하지 않나.
아무튼, 바포메트의 물음에도 남자는 아무 말 없이 히죽거릴 뿐이었다.
굳이 이름을 밝히기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상대가 열 받아 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걸 거다. 내가 짜 둔 설정에 의하면 그러니까.
그때, 빈센트가 놓쳤던 검을 다시 집으며 중얼거렸다.
“……아이언? 자네가 대체 왜 여기에 있지?”
“대신 소개해 줘서 정말 고맙네.”
남자, 아이언이 팍 김샜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더니 이내 별일 아니라 생각했는지 다시 히죽 웃는다.
“오랜만이요, 영감. 한 5년 만이던가?”
“……10년이다.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거지? 하도 안 보여서 죽었다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거, 말은 똑바로 하지. 내가 죽었다 믿는 게 아니라, 그냥 죽었으면 하는 사람들이었겠지. 하여간 쪼잔한 놈들. 살짝 몇 대 맞은 걸로 아직도 꽁해 있기는.”
아이언은 쯧쯧 혀를 차더니 갑자기 하늘을 바라봤다.
“그보다 벌써 10년이나 흘렀단 말이지……. 그동안 너무 바빠서 시간 지나는 것도 모르고 지냈네.”
“바빠? 제국도 무너진 시점에 그럴 일이 뭐가 있다는 말인가?”
“뭐 그런 게 있더라고. 영감은 신경 안 써도 될 거야.”
그렇게 말한 아이언이 다시 시선을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그보다 나는 여기 단테라는 제자 놈 찾으러 왔는데, 도통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네. 혹시 벌써 죽은 건 아니지?”
“……자네 제자라면 바로 옆에 있다만. 어떻게 본인 제자 얼굴도 못 알아보지?”
그 말에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대던 아이언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됐다. 뚱한 것 같기도 하고, 얼떨떨한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이 녀석이 내 제자라고?”
“그래. 아무리 자네라도 무심함이 과하군. 설마 제자 얼굴까지 잊어버리다니.”
“흐음……. 확실히 내가 사람 얼굴 잘 잊어버리는 편이기는 한데.”
아이언은 무릎을 굽히더니 나와 눈을 맞췄다.
“나는 분명 제자가 4급이라 들었단 말이야. 그런데 이 녀석은 3급이잖아. 그것도 꽤 숙련된.”
“……그건 나도 뭐라 할 말이 없군. 분명 한 달 전 봤을 때는 4급이었는데, 그사이 갑자기 저렇게 돼서 나타났지. 나는 자네 훈련 방식 덕이라 여겼는데…… 그런 게 아니었나?”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나도 한 달 만에 급수 올리는 비법 같은 건 몰라. 그런 게 있었으면 나 먼저 썼지.”
그래도 혼자 쓴다는 얘기는 안 하네. 나는 그럴 마음 한가득이었는데.
사실 위험부담 감수하고 비약을 순식간에 해치운 데는 그런 이유도 조금 있다. 애써 만든 걸 누가 보면 괜히 한 잔 달라고 할까 봐. 특히 아이언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저놈이 흥미 가득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거 보니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 제자님이 생각보다 대단하신 모양이네. 위 급을 이기는 실력에, 한 달 만에 급수를 올리는 재능이라.”
아이언이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 뒤를 향해 손을 뻗는다.
“뭐, 지금 당장 묻고 싶은 게 꽤 많기는 하지만…….”
콰아아앙!
뻗은 손에 가늠도 안 되는 양의 기운 덩어리가 다가와 터진다. 바포메트가 내게 던지려 했던 원거리 스킬이다.
그 충돌 여파만으로 주변이 붕괴되는 게 당연할 정도의 위력이었는데, 정작 그것은 아이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압도적인 힘으로 그냥 짓눌러 버린 거다. 여태껏 바포메트가 몇 번 선보였던 것처럼.
아이언은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털며 뒤로 돌았다.
“일단 저거부터 해결하고 얘기해 볼까?”
이제는 뒤통수밖에 안 보여 확신할 수는 없지만, 졸지에 ‘저거’라 지칭된 바포메트의 굳은 얼굴을 보면 아이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사실 뻔했다.
분명 보란 듯이 웃고 있겠지. 하여간 성격 나쁘다니까.
“뭐, 염소 대가리 하나 써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
아이언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먼저 발걸음을 떼고 바포메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 *
―…….
바포메트가 여유로운 얼굴로 다가오는 아이언을 보며 몰래 분노를 삭였다.
염소 대가리. 사실 그리 드물게 들어 본 말은 아니다. 그를 도발코자 하는 녀석들은 툭하면 그의 얼굴을 염소에 빗대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바포메트는 여태까지 그런 이야기에 단 한 번도 마음 써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염소 애호가여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상대의 심정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들은 본인의 공포를 숨기기 위해 애써 여유로운 척 행동했을 뿐이다.’
분명 눈이 공포로 떨리고 있는데, 그런 상태로 비아냥대 봤자 얼마나 마음에 닿겠는가.
그냥 하찮은 미물이 발악을 하는구나 웃어넘길 수 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저놈의 눈은…….’
그저 평온하다. 그의 힘을 느끼고 있을 텐데, 그런 도발을 해 놓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다.
바포메트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눈빛이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라…….
그래서 더욱 태연하게 굴었다. 상대에게 감정의 동요를 내비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여태까지 그 앞에 섰던 미물들의 행동이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바포메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누구 얘기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 혹시 본인이 그만큼 빠르게 끝날 거라는 자아성찰인가?
“뭐, 그쪽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은 없는데.”
어느덧 백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에 선 아이언이 바포메트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발을 굴렀다.
“나는 싸움을 입으로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와 동시에 아이언의 몸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거기에 있던 존재 중 그 모습을 어렴풋이라도 확인할 수 있던 것은 바포메트뿐이었다. 그는 재빨리 손을 들어 검을 막았다.
푸슉!
이번에는 처음으로 강철과 살가죽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바포메트의 팔 가죽이 뜯겨져 나갔다는 의미다. 바포메트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바로 재생시켜 버렸다.
―……입으로 싸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그랬나?
바포메트가 완전히 복구된 팔을 들어 올리며 기운을 뭉쳤다.
―그 점은 나와 의견이 일치하는군.
주먹 끝에 어둠이 서린다. 비유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어둠이었다. 아직 밝은 대낮에 바포메트의 손에만 밤이 내린 듯이 껌껌해졌다.
바포메트가 쓸 수 있는 것 중에서도 한 손에 꼽는 위력의 기술이었다. 그는 그걸 아이언을 향해 바로 내리쳤다.
―이번에는 네놈이 한번 받아 봐라.
곧이어 검과 주먹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서로 맞부딪혔다. 그뿐만 아니다. 보이는 광경도 아무것도 없었다. 둘이 충돌하는 순간 어둠이 둘의 주위를 아예 감싸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어둠이 걷힌 자리에 멀쩡한 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를 확인한 빈센트가 침음했다.
“……검이…….”
아이언의 몸은 확실히 아무 손상도 없었지만, 그가 들고 있던 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이언이라고 마냥 멀쩡히 넘기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아이언은 쳇, 혀를 차더니 반대편에 차고 있던 검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나름 아껴서 잘 쓰던 건데. 그래 봬도 대장장이한테 10골드나 주고 산 거란 말이야.”
―아까워할 것 없다. 어차피 곧 물질과는 인연이 없는 곳으로 떠나게 될 테니까.
바포메트는 다시 여유가 돌아온 얼굴로 대꾸했다.
여태껏 그를 긴장되게 만들던 가장 큰 이유는 상대의 힘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거였는데, 정작 붙어 보니 어느 정도 짐작이 갔던 것이다.
‘나보다 조금 아래다.’
오른 수준은 비슷한 것 같지만, 역시 기운의 양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본인이 100이라 하면…… 저쪽은 80 정도일까?
인간의 몸으로 그런 기운을 모았다는 것도 잘 믿기진 않았지만, 바포메트는 이미 저보다 강한 존재도 만나 본 기억이 있었다.
‘해방 왕.’
온 인류의 구원자로 떠받들여지던 녀석.
그럴 만한 강함과 행보이기는 했다. 그를 봉인시킨 것도 그 해방 왕이라는 녀석의 짓이었으니 말이다.
‘설마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이 또 나올 리 없지.’
그건 종족 단위의 돌연변이 비슷한 거다. 신조차 다시는 빚을 수 없는 걸작품 같은 거라고나 할까.
‘어쨌든 조금 오래 끌리긴 하겠지만, 내가 질 일은 없겠군.’
바포메트가 피식 웃으며 다시 팔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가지고 있는 최고의 기술을 사용해 기세를 확실하게 꺾어 둘 생각이었다.
슈슈슉.
단지 기운이 모이는 것만으로 공기가 떨린다. 마치 세상이 두려워하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아이언은 그 요상한 광경을 잠깐 힐끗거리더니,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벌써부터 그런 걸 쓴다고? 뿔 두 개씩 뽑아 가며 질질 끈 것 치곤 너무 성급한 선택 아닌가?”
―네놈에게 어울릴 만한 기술을 골랐을 뿐이다.
바포메트는 아직까지 여유 부리는 상대를 보고 피식 웃었다. 행동부터 말투까지 시건방짐의 극치더니, 그냥 사태 파악 못 하는 놈이었구나 싶었던 것이다.
―이걸 막으려면 네놈이 가진 마력 중 절반은 써야겠지. 그럼 이 지루한 싸움을 조금이라도 일찍 끝낼 수 있지 않겠나?
“……지루해? 나는 나름 재밌게 즐기고 있었는데. 너만큼 강한 녀석은 처음 본단 말이야.”
―네놈에게만 그럴 뿐이다. 나는 네놈 정도의 실력자는 수도 없이 봤지. 너로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일으킬 수 없다는 말이다.
바포메트의 신랄한 말에, 아이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도 제일 자신 있는 걸 꺼낼 수밖에.”
그러든가 말든가. 바포메트는 속으로 비웃음을 날리며 말없이 팔을 내리쳤다. 기술의 준비가 전부 끝났던 것이다.
‘여태껏 아무 대비도 없이 떠들고만 있다니.’
처음 했던 말과는 달리 싸움을 입으로 하는 스타일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러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강한 기술에는 그만큼 시간과 동작이 들어가는 법.
얘기에 대꾸해 주면서도 계속 기술의 준비를 끝마친 그와 달리, 상대는 정말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기운을 모으지도 않았고, 뭔가 특별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는 소리다.
이러면 승부는 사실 이미 결정 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냥 가지고 있는 마력만 조금 소진시킬 생각이었는데…… 이대로 끝나겠군.’
바포메트가 그리 생각하며 상대를 응시했다.
그때, 아이언은 다가오는 기운의 덩어리를 보며 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잠시 뜸들이더니, 그대로 그어 버렸다. 정말 별거 아닌 동작인 것처럼.
피잉!
그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날린 검격에, 바포메트가 날렸던 기술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이언이 그걸 보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섰다.
“생각보다 빨라서 아쉽기는 하네.”
그러더니 그대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바포메트는 경악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어떻게 내 최고 기술이 겨우 검 짓 한 번에…….
“응?”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이언이 고개만 돌려 뒤를 확인했다.
“뭐야. 아직도 말할 수 있네? 음성 내는 방식이 조금 달라서 그런가? 보통 생물은 그 상태 되면 말 못 하고 그냥 죽어 버리던데.”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리긴.”
아이언이 어깨를 으쓱이며 검을 집어넣었다.
“목도 안 달린 놈이 징그럽게 계속 얘기하지 말라는 소리지.”
목이 떨어져? 그렇게 대꾸하려 했던 바포메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째선지 세상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정말이군.’
바포메트는 의식이 끊기기 바로 직전에야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말 내 머리가 떨어진 거였어.’
툭. 1급 기사조차 무릎 꿇렸던 괴물의 최후는 그리도 초라했다. 아이언은 그쪽을 일별하고는, 다시 단테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럼 이제 방해꾼도 없어졌으니…… 어디 우리 제자님과 진지한 대화 좀 한번 나눠 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