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30)
―……단테라.
바포메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렇게 한참을 있더니, 대뜸 피식 웃는다.
―정말 재밌는 시대가 되기는 했군. 별의별 인간들을 다 만나 봤지만, 가진 기운보다 강한 힘을 내는 경우는 보지 못했는데. 그건 네놈만 가능한 방식이냐?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
퉁명스레 말해봤지만, 바포메트도 애초에 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닌 듯했다. 녀석은 조금의 표정도 변하지 않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과연, 신체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었군. 그래서 기운을 뛰어넘는 힘을 낼 수 있었던 거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이하긴 하지만…….
녀석의 시선이 내 심장 부근에 고정된다. 혼원력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정말로 독특한 건 그 상태로 그만한 기운을 모을 수 있었단 거야. 인간은 신체가 강력해질수록 마력을 모으기 힘들어진다 들었는데.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했을 텐데. 다만.”
나는 흑철검을 한 번 털어 내고, 녀석에게 겨눴다.
“네놈이 지금 몰래 준비하고 있는 공격만 해제한다면 대화에 응할 생각도 있다.”
―……눈썰미도 괜찮군.
그렇게 대놓고 보이는데 모른 척할 수야 있나.
[SK-1-68]
근접 공격 스킬 중 하나로, 동작이 은밀해서 눈치채기 쉽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그만큼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지만.
녀석이 뒤로 저런 걸 발동하고 있는 것만 아니었으면 오히려 대화는 내 쪽에서 요구했을 거다.
바포메트는 무안한 기색도 없이 스킬을 취소했다.
―옛날에는 이거에 당하는 놈들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인간들은 강한 존재라면 야비한 수를 쓰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경향이 있더군. 멍청하게도.
“야비한 방식이란 건 아나 보지?”
―물론. 그냥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 그게 실전이니까. 혹시 너는 그런 데 민감한 편인가?
“그랬다면 둘이서 협공한다는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겠지.”
―그도 그렇군. 그럼……
말꼬릴 늘리던 바포메트가 어깨를 으쓱이는 동작 그대로 돌진해 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게 공격이라는 생각도 못 했을 거다. 그저 황당해서 어안이 벙벙해 있는 게 다였겠지.
녀석은 어느덧 내 앞까지 접근해서는 씨익 웃었다.
―지금 시대의 실전이란 걸 경험해 보기 딱 좋은 기회라 이거군.
콰아앙! 살짝 뻗은 팔. 하지만 그것이 내는 위력은 도저히 살짝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이 겨우 버틸 정도였으니까.
“크윽!”
최대한 신음을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단지 일격에 이 꼴이다.
진짜 빌어먹을 세계. 변신 중엔 공격하지 않는 게 상식이듯, 적들도 순서에 맞춰 적당한 난이도로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여기는 좀 익숙해졌다 하면 전설이니 신화니 하는 괴물 놈들이 튀어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순번이라는 걸 모르나?
퉤. 살짝 피가 섞인 침을 내뱉고 있자니, 근처에 있던 빈센트가 바포메트에게 달라붙었다.
“네놈 상대는 나다!”
그 말대로, 지금 전투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보조 역할로 충분하다. 빠르게 빈센트 옆에 서서 바포메트를 견제하는 데 온 힘을 집중했다.
빈센트가 바포메트의 팔을 공격하면 나는 녀석의 발을 노리고, 바포메트가 빈센트를 공격하면 나는 녀석의 급소를 찔러 갔다.
동실력 대비 실전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한 내게도 다른 이들과 차별되는 장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나보다 강한 존재를 상대로 겨뤄 본 경험이 많다는 거다.
이 세계에 떨어지며 운을 엿 바꿔 먹은 건지 계속해서 강자들과만 붙지 않았던가. 아마 다른 인간이 나랑 같은 입장이었으면 진작 죽고도 남았겠지.
아무튼, 덕분에 자랑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깔짝대는 데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다는 뜻이다.
―……정말 짜증 나게 만드는군.
날개를 펼쳐 멀찍이 떨어진 바포메트가 나를 질린 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나는 숨을 몇 번 고르고 조금 평안해진 안색으로 말했다.
“지금 시대의 전투법을 보고 싶다 하지 않았나? 이게 네가 원하던 실전이다.”
―……수단을 가리지 않는 실전이란 것도 다시 생각해 볼 일이군. 설마 인간 중에서 나보다 야비한 자가 있을 줄이야.
“칭찬 고맙군.”
―칭찬하려 한 것이 아니다.
어쩌라고. 우리 세계에서 그 말은 극찬으로 통한단 말이야.
내가 태연한 얼굴로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포메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인정하지. 지금처럼 봉인당한 상태로는 저놈 혼자라면 모를까, 네놈까지 상대할 자신이 없다.
바포메트는 그리 중얼거리더니 허공에 떠서 하늘을 응시했다.
―……결국 조금의 위험은 감수하는 수밖에 없나.
그리고는 아직 남아 있는 오른쪽 뿔에 손을 가져다 댄다. 누가 봐도 변신 동작이었다.
“감히 어딜!”
그걸 본 빈센트가 발을 박차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휘두른 검이 그 팔을 베어 내려는 순간. 바포메트가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피식 웃었다.
―이미 늦었다.
뚝.
또다시 세상이 멈춘다.
놈에게 닿기 직전이던 검이 먼지로 변해 사라지고, 근처에 있던 빈센트는 달려들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튕겨져 나왔다.
그야말로 재앙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압도적인 존재감.
“커헉!”
“괜찮으십니까?”
나는 혼원력을 전부 꺼내 몸을 보호하며 빈센트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그는 충격이 심한지 몇 번 각혈하더니 겨우 정신을 차렸다.
“……대륙에 저런 괴물이 있을 거라곤 도저히 상상도 못 해 봤군. 우리가 과거 사람들을 너무 무시했어.”
“너무 유언처럼 중얼거리지는 마시지요. 제가 눈물이라도 짜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내가 담담히 대답하자, 빈센트는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생각보다 태연하군. 저 정도 괴물이면 왕국의 네 검 중 최소한 셋은 있어야 해. 나 혼자서는 무릴세. 혹시 아까 했던 그 공격을 다시 할 수 있는 건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만약 다시 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 녀석에겐 통하지 않을 거고요.”
바포메트가 저렇게 변하면 공격을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공격이 통하느냐 통하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몸을 감싸고 있는 혼원력을 더욱 끌어 올리며 허공의 바포메트를 바라봤다.
왼쪽 뿔을 꺾었을 때도 압도적이었지만, 오른쪽 뿔까지 꺾은 지금은 녀석이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저 상태의 바포메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공격 수단이란 건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빈센트가 기간트 타고 목숨이라도 바치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겠다만……. 지금 상황에 그럴 여유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어쨌든, 누가 봐도 희망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빈센트는 내 태도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군. 포기한 건가. 무리도 아니지. 나조차도 범접하지 못하는 녀석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제멋대로 판단하는 거 아닌가.
뭐라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나는 시선을 돌려 바포메트를 쳐다봤다. 변신 리스크가 끝났는지 녀석이 땅에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 모습까지 보이는 건 정말 몇 번 안 되는데. 이 세계가 아닌 곳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놈은 갓 태어난 아이라도 된 것처럼 손을 쥐었다 폈다. 본인도 본인의 힘에 적응이 안 되는 게 분명했다.
―만에 하나 아까 그 정체 모를 봉인이 다시 올까 조금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그게 마지막이었던 모양이군. 아니면 나한테 상처를 입혀야 한다는 조건이 있던가.
바포메트는 히죽 웃더니 발을 살짝 들었다, 가볍게 내려찍었다. 휘익. 매우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쿠와아아앙!
“꺄아아악!”
“저, 저게 대체 뭐야!”
“괴, 괴물…….”
미처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이 그 광경을 보고 패닉을 일으켰다. 그들을 지도해야 할 기사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마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사람의 인지 능력으로는 녀석을 보고 제정신을 차릴 수 없기 때문일 거다.
그나마 떨어지는 건물 파편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것만으로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나도 겨우 표정 유지하는 게 한계였으니까.
바포메트는 비슷한 동작을 몇 번 반복해 주변을 폐허처럼 만들더니, 제힘이 마음에 든다는 듯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쪽이든 이제 상관없지. 날 귀찮게 만든 죄를 물어 천천히 괴롭히다 죽여 주마. 나에게 건 봉인에 대해서도 들어야 하니 말이야.
그러더니 조금씩 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우리를 최대한 겁주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걸 거다.
팔을 내 어깨에 기대고 있던 빈센트가 자세를 풀더니 뒤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슈웅! 곧이어 검 하나가 날아와 그의 수중에 잡힌다.
“……여기는 내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지. 자네는 저 하늘 나는 배를 타고 대피해. 그거라면 어떻게든 도망갈 수 있을 걸세.”
그 말에 나는 조금 의아해져서 물었다.
“다른 기사들은요?”
“……미안하지만, 포기할 수밖에. 그 녀석들 챙길 시간까지 내가 버틸 수 없을 거야.”
“…….”
괜히 1급이 아니란 건가. 상황 판단 능력과 맺고 끊음이 명확하다. 원래는 이 자리에서 죽는 인물이지만…… 역시 그리 허무하게 가기에는 아깝지.
나는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제자리에 앉았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쉬는 중이지요. 안 보이십니까?”
빈센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에 대체 왜 쉬냐는 말일세. 혹시 저 녀석 때문에 정신이라도 나가 버린 건가?”
그럴 리가. 만약 내가 정신이 나갔다면 이렇게 얌전히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분명 미친놈처럼 날뛰었을 거다. 나 혼자 죽긴 억울하니까.
나는 제자리에서 운기하며 태평히 말했다.
“그러지 말고 빈센트 경도 옆에 앉아 조금 쉬시지요. 이건 이제 저희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의민가?”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대신 싸워 줄 인간이 있다는 뜻이지요.”
“…….”
빈센트는 참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바포메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 한 명이라도 살아 나가 이곳의 상황을 알리기 바랐는데……. 이제 글렀군. 2급에 걸맞는 힘을 가지고 있어도 정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가.”
사람을 정신 나간 것처럼 취급하니 기분이 썩 좋진 않다. 뭐, 굳이 서 있고 싶으면 서 있으라지.
내가 그 상태로 가만히 앉아 있자, 바포메트가 폭소를 터뜨렸다.
―가관이군. 마지막에는 콩트라도 선보이는 건가?
바포메트가 그렇게 말하더니 팔을 들어 올렸다.
[SK-3-78]
이미 선보인 적 있던 원거리 스킬이다. 다만 그 안에 맺힌 기운은 그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아까와 같이 막으려 하면 그냥 단숨에 소멸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무시무시한 스킬이 나를 노리고 있음에도, 나는 무섭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야, 그럴 만한 이유가 마침 이곳에 도착한 참이니까.
―도망칠 수 없게 딱 다리만 소멸시켜 주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죽고 싶지 않…….
콰아아아앙!
녀석의 말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긴다. 어디선가 날아온 공격에 저 멀리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앞에 있던 빈센트가 그 광경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 검을 놓치는 모습이 보였다.
“내 제자라는 놈이 여기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어느새 앉아 있는 내 옆까지 다가온 존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렇게 재밌는 것까지 덤으로 있을 줄은 몰랐네.”
[PLAYER-1]
1부 주인공의, 정말 주인공 같은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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