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28)
콰아아앙!
강철과 살가죽이 맞부딪혔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굉음이 울려 퍼진다. 단지 그 충돌의 여파만으로 성벽은 순식간에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나는 떨어지는 돌덩이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탐색전인가? 생각보다 신중하네.”
―……저게 탐색전이란 말입니까?
스바가 황당하단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하긴, 얘 입장에서는 저것도 대단해 보일 수도 있겠다. 저런 수준의 싸움은 처음 보는 거일 테니까.
“저 둘이 붙었는데 주변이 저렇게 멀쩡할 리가 없잖아. 당연히 전력이 아니지.”
―……별로 멀쩡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둘이 제대로 했으면 아마 저 근처는 이미 평야가 되어 있을걸.”
오히려 그 정도면 다행일 거다. 이 세계의 성벽이란 건 저런 고위급들을 가정하고 만든 것이 아니니까. 애초에 그냥 오크 몇 마리 막아 줬음 하고 만든 물건에 기대감을 갖는 게 잘못된 거지.
그보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으려나.
나는 목에 걸어 놨던 시계를 열어 보며 시간을 가늠해 봤다. 대화에서 별로 못 끈만큼 탐색전이라도 좀 오래 끌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게 혹시 죄라도 되는 걸까.
“준비운동은 이쯤 하면 된 것 같군.”
빈센트가 검을 바포메트에게 검을 떼기 무섭게 그런 소리를 지껄였다.
아니, 준비운동이고 워밍업이고 제대로 좀 하라고! 겨우 몇 번 부딪힌 걸로 몸이 풀릴 리가 없잖아!
속으로 외쳤지만, 역시 나한테 바이론 같은 능력은 없는 모양이었다. 빈센트와 바포메트는 단지 그 한마디로 합의가 끝난 건지 마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젠장,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구경이나 할걸. 꼭 내가 뭐만 떠올리면 이 꼴이 나더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스바. 마격포 준비해 둬.”
―……마격포 말입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까요? 빈센트 경이 더 유리해 보입니다만.
“일단 채워 놔 봐. 출력은 가능한 최대로.”
빈센트가 바포메트를 몰아치는 걸 보면서 담담히 말을 이었다.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형세가 역전될 테니까.”
* * *
‘……뭐지?’
검을 휘두르던 빈센트가 바포메트의 얼굴을 보며 그런 의문을 품었다. 밀리고 있는 상태라기에는 상대의 표정이 너무 여유 넘쳤기 때문이다. 아니, 일말의 흥겨움까지 엿보일 정도.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닌데.’
수천 번에 달하는 실전 경험으로 단언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분명 저 마물은 전력을 다하고 있는 상태였다.
만약 대강 하고 있다면 팔다리의 움직임이나 숨 쉬는 간격에서 차이가 보여야 하는데, 그런 게 일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빈센트는 몰아치던 검을 거두고 크게 점프해서 뒤로 물러났다. 바포메트가 무안해진 손을 내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그러지?
“숨기고 있는 게 뭐냐.”
―숨기고 있는 거?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는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는 상태다. 설마 상대를 조롱하려는 건 아니겠지?
바포메트가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이 시대의 인간은 평균적인 지능은 물론, 인성마저 바닥을 쳐 버린 모양이군. 옛날에는 아무리 나를 싫어해도 조롱하는 인간은 없었는데 말이야.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라.”
빈센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검을 들었다. 그 주위에 폭발적인 양의 마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런 것이 본인을 노리고 있음에도, 발록의 표정엔 단지 흥미만이 가득했다.
“네놈이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눈썰미가 없어 보이나?”
―그럼 대체 뭐가 문제지?
“표정.”
빈센트가 퉤, 바닥에 침을 뱉었다.
“실전 경험도 많은 만큼, 사람 경험도 많이 해 봤다. 아무리 그래도 염소 대가리는 처음 보지만…… 네놈이 지금 짓고 있는 그 여유로운 표정은 절대 꾸며 낸 게 아니야. 뭔가 한 수를 남겨 뒀다는 뜻이지.”
―흐음…….
바포메트는 턱을 문지르며 빈센트를 바라봤다. 그렇게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제법이군.
바포메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대로 인간과는 생김새가 많이 다르다 보니 내 표정을 알아보는 놈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특히 여유 부리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챈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아.
“사람 경험이 많은 것도 많은 거지만, 딱 네놈이랑 비슷한 낯짝으로 다니는 녀석을 몇 번 본 적 있거든.”
―호오……. 인간 중에도 그런 놈이 있다고? 꼭 한 번 봐야겠군 그래.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빈센트가 다시 몸속의 마력을 회전시켰다.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은 이제 알았으니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할 터.
그는 검을 뽑아 들고 바포메트에게 돌진하며 말했다.
“뭘 노리고 있든, 네놈은 여기서 죽을 테니까 말이야.”
콰아앙!
지면에 엄청나게 큰 홈이 파지는 동시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성벽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단지 발걸음을 떼는 것만으로 이런 천재지변을 만들어 낸 것이다.
1급의 기사가 굳게 마음먹고 낸 전력. 하지만 바포메트는 그 광경이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 마냥 여유롭게 웃으며 바라봤다.
―이건 확실히 죽을지도 모르겠군.
바포메트가 그리 중얼거리면서 본인의 왼쪽 뿔로 손을 가져다 댔다.
―네가 말한 그 인간이 누군지도 봐야 하니……. 조금 제대로 해볼까.
그렇게 뿔이 부러진 순간.
뚝.
세상이 멈췄다.
‘이게 무슨……!’
빈센트는 그 괴현상에 기겁해서 발걸음을 그쳤다.
세상이 멈춰?
아니, 그냥 그런 착각이 들었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움직임을 멈춰 버렸으니까.
수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경계하고 있던 기사들이 넋 나간 얼굴로 검을 놓았고, 저 멀리 하늘의 새들이 날갯짓하는 것을 잊고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상대가 무슨 기운을 뿜어낸 것도 아니었다. 바포메트는 그저 뿔을 뽑은 모습 그대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으니까.
단순히 존재감만으로 저런 광경을 만들어 냈다는 말이다.
‘……최악의 경우 추정 1급이라고?’
왕국은 물론이고 그조차도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다.
재앙이라는 단어가 오우거와 연관돼 우습게라도 들렸던 걸까, 아니면 그동안의 발전에 본인도 모르게 자만하고 있던 걸까.
‘……저건 등급으로 매길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왕국에서 관리를 포기한 무저갱(無低坑)의 괴물. 대륙에 단 셋밖에 없다는 그 괴물이, 지금 여기서 하나 더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바포메트는 고개를 들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정말 일상적이고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놈이 그렇게 움직인 것만으로 주위의 마력 없는 생물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녀석이 주는 존재감의 압력을 도저히 버텨 낼 재간이 없었던 탓이다.
―옛날에는 굳이 내가 뿔을 뽑아낼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 많지 않았거든. 이 세계에서 내가 이러는 경우는 이번이 겨우 세 번째다. 이것도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아. 아까 내 표정을 읽은 것과 같이 말이야.
“……자랑스레 여길 테니 다시 그 뿔을 붙여 줬으면 좋겠군. 양쪽 균형이 안 맞으니까 안 그래도 괴상하던 면상이 더 이상해졌잖아.”
빈센트가 이를 악물며 하는 말에 바포메트가 폭소를 터뜨렸다.
―아직도 그런 농담을 뱉을 여유가 남아 있다니! 정말 걸작이군. 너 정도면 그 남 무시하기 좋아하는 해방왕 녀석도 꽤 중용했을 거다.
“이미 죽은 인간의 치하 같은 건 바란 적 없다. 그 지랄 맞은 뿔이나 다시 붙여.”
―그건 좀 곤란하군. 이걸 다시 붙이려면 필요한 재료들이 몇 가지 있거든. 정 그리 거슬린다면 남은 뿔도 떼어 줄 수는 있다만.
바포메트가 남아 있는 오른쪽 뿔에 손을 가져다 대며 씨익 웃었다.
―혹시 그걸 원하나?
“…….”
빈센트는 아무런 대꾸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정황상 저 뿔을 떼는 것으로 힘이 증가하는 것은 틀림없을 터. 왼쪽만으로 저 정돈데, 나머지 하나마저 해방해 버리면 나오게 될 결과는 뻔했다.
바포메트는 본인을 향해 검을 겨누는 빈센트를 보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도 이 반쪽짜리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다. 나와 싸우는 자들은 전부 그런 식으로 결벽증이 금방 사라져 버리더군. 전문 의원을 차리면 돈을 꽤 벌 수도 있을 텐데.
“……잔말 말고 덤벼라. 쉽게 당해 주지는 않을 테니.”
이미 패배를 산정한 듯한 말투. 무려 1급의 기사가 싸우기도 전에 승부를 포기해 버린 거다.
하나 정작 그 말을 들은 바포메트도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뭐, 너무 실망하지는 말도록. 오랜만에 날 즐겁게 해 준 인간이니, 경의를 담아 이곳의 생명체는 절반만 죽이…… 뭐지?
바포메트가 이어 가던 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아까까지는 분명 존재하지 않던 기운이 생겨나고 있던 탓이다.
―혹시 저 위에 복병을 준비해 놨었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 미안하군. 너희가 하늘도 날 수 없는 열등 종족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어.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바포메트가 눈 쪽에 기운을 집중했다. 탐색 당하지 않기 위해선지 수백 미터 밖의 개미 숫자도 셀 수 있는 그의 시력으로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바포메트의 시야가 구름 위까지 뚫고 나가고. 곧바로 상대의 정체가 드러났다.
―……배?
그건 바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 배였다. 아무리 천 년 넘게 살아온 바포메트라도 흔히 볼 수 있던 광경이 아닌지라, 그저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대의 인간은 저런 것도 만들 줄 아는 건가?
다시 고개를 내리고 물었지만, 빈센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하기 싫으면 됐다. 적어도 재미는 있었으니까.
바포메트는 피식 웃으며 오른팔을 위로 쭉 뻗었다. 하늘에서 점점 압축되어 가던 기운이 어느새 그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뭐, 나름 공들이기는 했군. 네가 전력으로 낸 일격에 맞먹을 정도야.
하지만 결국 그뿐. 그의 방어를 뚫고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바포메트는 그저 흥미 가득한 눈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빛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손과 기운이 맞부딪히고.
쿠와아아아앙!
거대한 빛줄기는 다소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빈센트의 기운을 잠재웠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그가 압도해 버린 것이다.
―담긴 마력에 비하면 위력이 조금 아쉽군. 하긴, 인간의 기술로 저런 걸 만들어 냈다는 것 자체가 놀랍긴 하다만.
바포메트가 본인의 오른손을 펼쳐 바라보았다. 아주 작은 생채기. 그게 저 빛줄기가 낸 상처의 전부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그마저 바로 재생시켜 버렸다. 치지직.
―그럼 놀이는 여기까지만 하지. 이제 슬슬 지겨워지려는 참이니까.
그 말에 빈센트가 긴장된 표정으로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저 빛줄기에 희망까지 걸었던 것은 아니나, 생각 이상으로 쉽게 막아 버리니 조금 충격이었던 것이다.
바포메트는 빈센트의 표정에서 그 심정을 읽었다. 조금 가지고 놀다 죽여 버리면 되겠군. 바포메트가 그리 생각하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동작을 멈췄다.
분명 뿔을 부러뜨리며 해방되었을 마나가, 마치 봉인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포메트의 표정이 싸움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