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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27화 (127/225)

너의 코드가 보여 (127)

―정말 재밌는 시대가 됐군. 안 그래?

바포메트가 반쯤 요새화 된 도시를 바라보며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 앞에 부복하고 있던 발록은 그저 몸을 부들부들 떨뿐이었다.

언제든 주인의 변덕으로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실제로 본인과 가장 오래 지냈던 발록 조차 망설임 없이 죽여 버리지 않았던가. 그것도 단순한 오해로 말이다.

―그르륵…….

―뭐? 잘 모르겠다고?

발록이 떨리는 입을 열어 간신히 대답하자 바포메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발록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시선이 마치 사형선고라도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 이거 미안하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바포메트가 발록에게서 눈을 떼며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봉인되기 전에 활동하던 녀석은 내가 잡아먹었었지? 잠시 깜빡했군. 이 나이쯤 되면 사소한 것들은 잘 기억이 안 나기 마련이거든.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만.

―그르르르…….

―그래. 착하군.

바포메트가 고개 숙인 발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흡사 사이 좋은 주인과 애완견 같은 모습이었다. 그 개가 무려 2급에 달하는 괴물인 데다, 생김새가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너는 비교 대상이 없어서 감이 안 오긴 할 거다. 태어나자마자 바로 봉인 당했을 테니.

바포메트는 시선을 다시 요새로 돌리고, 몸속에서 기운을 내뿜었다.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탐색이 아니라 자신이 왔음을 드러내는 경고의 의미였다.

화답은 금방 돌아왔다. 바포메트의 기운에 맞선 거대한 마력이 요새 안에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두 가지 에너지는 서로 충돌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이 승기를 잡았다. 요새에서 흘러나온 쪽이었다.

―호오…….

본인이 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바포메트는 화내는 일 없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봐라. 내가 봉인되기 전이면 반신처럼 추앙받았을 실력자가 저런 허접한 요새에 처박혀 있지 않나. 옛날엔 절대 수도 밖으로 혼자 나오는 법이 없었는데. 하여간 진짜 재밌는 세상이라니까.

바포메트는 그렇게 말하며 추억을 더듬듯 눈을 감았다. 기운은 꾸준히 뽑아내 요새의 마력과 계속 충돌하고 있는 채였다. 전선은 점점 밀려 어느덧 그들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그 어마어마한 압력에 두려움을 느낀 발록이 고개를 들어 바포메트를 바라봤다.

생의 대부분을 봉인지 안에서 지내긴 했지만, 발록은 내심 자신이 있었다. 밖에 나와도 본인이 최상위 포식자일 거라는 자신이.

한데 저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뭐란 말인가. 세상에서 제일 강할 거라 생각했던 주인과 비슷한…… 아니, 오히려 더 강한 듯한 기운이었다.

설마…… 주인이 질 수도 있나?

―그르르르…….

순간 떠오른 생각에 발록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황급히 입을 막기는 했지만, 이미 바포메트가 눈을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게, 감상을 방해받아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뭐지?

―그라아아!

발록이 재빨리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주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 보려는 시도였다.

쾅!

어찌나 세게 찧었는지, 발록의 이마에 한줄기 선혈이 흘렀다. 일부러 기운을 담지 않고 머리를 박은 탓이다.

바포메트는 땅에 일어난 균열을 보며 피식 웃었다.

―퍼포먼스는 전의 놈보다 좋군. 녀석도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는데.

살짝 기분이 풀린 듯한 목소리다. 발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바포메트의 발밑까지 기어갔다. 마치 애교 부리는 강아지처럼.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알겠군.

바포메트는 주저앉아 발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내가 저놈에게 질 거라 생각한 거야. 그렇지?

―그르아아!

―아닌 척할 건가? 나는 거짓말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바포메트의 목소리에 살기가 담겼다. 살짝 안심하고 있던 발록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라. 그라아아…….

―빠르게 인정하는 태도 좋군. 애초에 그럴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게 최고겠지만 말이야.

―그르아아.

―이제 그만 됐다. 과하게 말이 많은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보다.

기운은 이제 형태까지 갖춰 코앞에서 그를 노려 오고 있었다.

4급이나 5급은 저 마력을 받는 것만으로 죽고도 남을 거고, 3급은 최소 중상. 2급도 경상 정도는 각오해야 할 거다. 그 정도의 에너지였다.

하지만 바포메트는 그런 기운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런가. 나도 너무 즐기긴 했군.

파앗!

바포메트에게 쏟아지기 직전이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원래부터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서로 맞부딪혀 상쇄시키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기예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방식이었으니까.

발록의 얼굴에 다시금 안도의 기색이 깃들었다. 바포메트는 시시각각 변하는 발록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여간 속이 다 보이는 놈이군. 마음에 들어.

―그라아아!

―그래, 그래.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

펄럭!

날개가 크게 펼쳐지며 바포메트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날갯짓해 요새로 향했다.

―네 몫으로 줄 건 남겨 둘 테니까.

―그라아아!

* * *

“……방금 그 기운은, 설마…….”

방 안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상의하고 있던 2급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빈센트 역시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표정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그래. 온 것 같군. 재앙이 말이야.”

“……그래도 상상보다는 못하군요. 빈센트 님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너무 쉽게 말하지 말게. 저쪽에서 기운을 조절한 것뿐이니까.”

“……기운을 조절해요? 어째서 말입니까?”

“그냥 인사 차원이다 이거겠지. 실제로 내가 보낸 대답도 금세 잠재워 버렸어. 뭐, 적어도 예의는 있는 것 같군. 한낱 마물이 말이야.”

빈센트가 긴장 풀린 얼굴로 피식 웃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잠깐 당황하기는 했지만, 예상 못 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이런 경우의 대책도 전부 짜 둔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와 주면 고맙지. 녀석을 대체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라서 여태 도시에 처박혀 있던 거니까.’

빈센트는 그리 생각하며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사전에 훈련시켜 둔 대로 위치시키게. 재앙이 쳐들어온 곳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도록 주의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간트는 바로 탑승하실 계획이십니까?”

“연료가 언제 동날지 모르는데 처음부터 탑승할 순 없지. 일단 준비시켜 두게. 언제든 올라탈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2급이 경례를 마치고 곧바로 밖으로 몸을 향했다. 기사들 지휘에 시민들 피신에. 그 전부를 끝내 두려면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빈센트는 엄청난 속도로 멀어지는 2급의 기운을 느끼며 한쪽 손을 붙잡았다.

“실전에 나서는 건…… 거의 십 년 만이군.”

1급이 나서야 할 전장이란 것이 그리 흔치 않은 탓이다. 하지만 실력이 무뎌졌을까 하는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겨우 그 정도에 무뎌지기에는 쌓아 온 실력이 너무 커다랬으니까.

단지, 그는 오랜만에 조금 달아올랐을 뿐이다. 이 나이에 주책이라고 해도 좋지만, 비슷한 실력의 상대와 붙는다는 것이 흔하게 있는 일은 아니니 말이다.

‘방심하지는 않는다.’

빈센트가 붙잡은 손을 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1급에 오르기까지 탄탄대로만 깔려 있던 건 아니었다. 물론 압도적인 재능이 뒷받침되기는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소리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국가에서 인증하는 최고의 자리가 그리 쉬울 리 없으니까. 십 년 만의 실전인 건 맞지만, 반대로 십 년 동안 하루하루를 실전처럼 보낸 시절도 있었다.

“후우…….”

흥분으로 떨리는 몸을 차가운 한숨으로 식히며, 빈센트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네,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성벽을 지키던 3급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던 흉측한 외형에 그로서는 가늠도 안 가는 압도적인 기운. 갑자기 내려친 재앙에, 그는 현재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인간들 평균적인 실력이 올랐다 싶었는데, 평균적인 지능은 내려간 모양이군. 저런 멍청한 질문이나 하고 있으니 말이야.

바포메트는 검을 향하고 있는 기사가 매우 가소롭단 듯 웃었다. 실제로 가소롭기도 했다. 그가 손가락만 튕겨도 죽어 버릴 놈이었으니까.

―그런 퇴화한 뇌는 먹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는군. 그러니 당장 여기 수장을 불러와. 내가 거의 천 년 만에 베푸는 자비다.

“……마물 주제에 얻다 대고 명령질 하는 거냐! 기사의 자긍심이 대체 어떻게 보이는…….”

―귀찮군.

서걱!

말을 하던 기사의 목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그 입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뻐끔거렸다. 마치 뇌가 목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바포메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걸 바라보다가, 씨익 웃으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조금 기다리는 건데, 아까운 목숨을 잃게 됐군 그래.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전부 알고 있었으면서.”

콰아앙!

어찌나 빨리 움직였는지 몸보다 소리의 도착이 한 발짝 늦는다. 1급인 빈센트로서도 최선을 다해 도착한 것이지만, 제국의 인재를 하나 잃어버렸다.

빈센트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기사의 머리를 응시하다가, 바포메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네놈이 그 재앙이란 것이 맞나?”

―오.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전해져 오고 있었나? 인간들은 겁쟁이 놈들이 대부분이라 나 같은 녀석에 대해선 기록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 거의 없기는 했다. 그저 존재에 관해 아는 것만으로 특급 기밀에 해당할 정도니까. 하지만 그걸 인정하자니 인간이 겁쟁이란 것을 시인하는 꼴이라, 빈센트는 겉으로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나는 네가 재앙이 맞냐고 물었다. 잡소리를 하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음. 지금 시대 인간들은 성격이 꽤 급해졌군. 그것도 염두에 둬야겠어.

바포메트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 식으로 불렸던 적도 있기는 하다. 그렇게 불렀던 놈들은 전부 내 손으로 직접 죽여 버렸지만.

“그럼 오늘이 처음이겠군.”

빈센트가 검을 뽑아 들며 바포메트에게 겨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아니라 들은 놈이 죽게 되는 건 말이야.”

―패기는 좋군. 너무 헛된 꿈이기는 하지만.

바포메트 역시 팔을 들어 올리며 빈센트를 마주 봤다.

당장이라도 맞붙을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그걸 하늘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 대화 좀 더 하면서 시간 좀 끌어 주지.’

이제 와서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리안은 다시금 집중력을 끌어 올려 그 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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