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26)
침묵밖에 남지 않은 적막한 방 안. 그곳에서 빈센트와 동쪽 요새를 맡고 있던 2급이 심각한 표정으로 외팔 외다리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받은 남자가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키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보고 드릴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혹시 처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처벌이라.”
빈센트가 기사의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그리고 담담히 물었다.
“자네에게 처벌을 내린다면 죄목은 무엇으로 붙여야 좋겠나? 혼자 살아 돌아온 죄?”
“…….”
기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요새에서의 기억을 버티는 것만으로 한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이다. 죽은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정상적인 사고기능의 둔화.
빈센트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이라면 그렇게 배치를 한 나한테 있지, 직접 싸운 자네에게 있는 게 아니야.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일단 돌아가서 요양부터 해. 혹시 어느 신을 믿나?”
“……키탄을 믿고 있습니다.”
“대중적인 신이라 다행이군. 그럼 그쪽 신관을 붙여 주겠네. 혹시 팔과 다리 중 일부라도 건진 건 없는가?”
“……없습니다. 놈이 제 눈앞에서 한입에 먹어 버렸거든요.”
“……그렇군. 그럼 그만 들어가서 쉬게.”
그 말에 기사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뒤돌아섰다. 상관에게 의례해야 할 인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모양새였지만, 방안의 누구도 그걸 가지고 핀잔을 주지 않았다.
겨우 그런 것으로 탓하기엔 기사가 묘사한 요새의 현장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구르는 게 일상인 그들마저 신음을 내뱉을 정도로. 저런 상태로 멀쩡히 보고를 마친 것만으로 훈장감이다.
방 안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2급은 기사가 완전히 멀어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살며시 입을 열었다.
“2급인 안델이 도망칠 틈도 없이 패배할 줄이야……. 재앙은 확실히 1급이겠군요.”
“그래. 왕국에서 최악으로 가정하고 있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 거지.”
빈센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운을 퍼뜨렸다. 지금부터 할 대화는 누가 들어도 좋을 게 없었으니까.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이 확실해지자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최악이야. 듣자 하니 놈은 의지로 말을 전달할 수 있는 것 같더군. 못해도 인간과 동등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일부러 한 명을 놓아줘서 경고를 보내는 여유까지 부렸어. 이게 뭘 의미하겠나?”
“본인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맞아. 본거지가 아닌 곳에 있던 안델을 상대한 후에도 말이야. 그보다 강한 상대가 있다 해도 감당할 수 있다 판단한 거지.”
“……왕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흠…….”
2급의 물음에 빈센트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들겼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고민을 마친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지원 요청은 일단 뒤로 미루지. 왕국 차원에서는 나 하나 차출한 것만으로도 크게 무리한 거야. 1급은 전부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하지만.”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네.”
빈센트가 창가로 걸음을 옮기며 2급의 말을 끊었다.
“내가 너무 방심하는 것 같아 걱정하는 거겠지. 만에 하나라도 지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아닌가?”
“……무례인 건 알지만, 솔직히 그렇습니다. 안델이 10분도 안 돼서 당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히 가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례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지원을 부르지 않는 건 정말 여력이 없어 서지, 내가 방심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아 줬으면 좋겠군.”
“…….”
최대한 달래려 한 말에도 2급은 인상을 풀지 못했다.
빈센트는 그런 그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까지 조심스레 접근하는 건 원래 저자의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에 죽은 안델이 그런 쪽에 가까웠지.
‘그만큼 이번 일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군.’
그와 동격이었던 기사가 그리 허무하게 죽어 버렸으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진 듯한 기분이라도 들었겠지. 비슷한 수준의 마물을 상대한 것과는 또 다른 심정일 거다.
‘이해는 하지만, 다른 기사들을 지휘해야 할 자가 저러면 곤란한데.’
고민을 거듭하던 빈센트가 결국 살며시 말을 꺼냈다. 상대의 자존심이 상할까 자제하고 있던 내용이다.
“안델이 10분도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이 두려운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럼 묻지. 내가 안델을 이기려면 몇 분이나 걸릴 거 같나?”
그 말에 2급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보통 아래 3급까지는 아래 단계와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그 정도가 위로 갈수록 줄어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3급은 혼자서 4급 수십 명도 상대가 가능하지만, 2급은 3급 열 명도 상대하기 버겁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원래 실력이 올라갈수록 발전하는 것도 어려워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까.
1급에 대한 정보는 극비로 취급되어 2급인 그조차 그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빈센트가 안델을 10분 안에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곤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자,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이는군. 뭐, 나도 2급 때는 자네와 똑같이 생각했으니 비난할 건 못 되지만.”
“……제 짐작이 틀렸다는 말씀이십니까?”
“2급과 1급 사이에는 보통과 또 다른 벽이 있다고만 말해 두지. 그리고 내가 한 질문에 내가 답을 해 보자면…….”
빈센트가 창밖을 향하던 시선을 돌려 2급을 바라봤다.
“나는 안델을 5분 안에 이길 자신이 있어. 그것도 기간트 없이 맨몸으로 말이야. 그런데 이번엔 기간트까지 가지고 와 있는 상태지. 어때, 이제 좀 안심이 되나?”
그 말에 2급이 빈센트를 바라봤다. 허세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자존심이 상할까 걱정하는 모습. 결국 그는 괜한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며 방안을 나왔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것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느낌에, 2급은 문 앞에 한참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꺄하핫!
아, 귀여워라.
나는 리베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평화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새 웃음소리 정도는 낼 수 있게 되었는데, 원래 이때가 가장 천사 같은 때라고 들은 적 있는 것 같다.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지옥이 펼쳐진다던가.
“리베라는 말할 수 있게 되어도 절대 말썽 안 피울 거야. 그렇지?”
그리 물으니 리베라가 꺄핫 거리며 웃었다. 저건 맞다는 뜻일까 아니라는 뜻일까. 그런 고민에 빠져 있자니, 머릿속으로 황당하단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거의 자식 취급이군요. 이참에 친자 등록까지 해 두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그러고 싶지만 레이튼엔 그런 거 없어. 세금도 안 붙는 곳인데 뭐.”
―……진심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나도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다. 아직 지구로 돌아가는 걸 포기한 것도 아니니까. 어느 날 갑자기 애를 부모 없는 고아로 만들 순 없지. 정령이 그런 걸 신경이나 쓰나 싶긴 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스바에게 물었다.
“혹시 질투해? 그런 거면 조금 참아. 이번에는 리베라가 한 건 했잖아.”
―그런 게 아닙니다. 하지만 겨우 도청한 것 가지고 한 건 했다고 하기에는…….
“질투 맞네.”
―아니라고 이미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목소리 깔기는. 알겠다. 아닌 걸로 해 둘 테니 너무 삐지지 마.”
―…….
스바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침묵했다. 폭풍 전 고요라는 지구의 격언을 굳이 떠올려 보지 않아도 말을 돌려야 할 타이밍인 건 분명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 도청 한 번이 1급과 2급 사이 대화잖아. 너는 그 둘 눈 피해서 도청 성공할 자신 있어?”
―……그럴 자신은 없습니다.
“그렇지? 네가 사용하는 탐색 방식도 결국 마력이나 혼원력 쓰는 건데, 그게 안 걸릴 리가 없지.”
말하면서 다시 한 번 리베라를 쓰다듬었다.
요 기특한 것.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만큼 아직 힘은 조금 약하지만, 그것만으로 도움이 많이 됐다.
그래도 그게 이때까지는 일상적인 수준에 불과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실질적인 전력이 된 거다.
“너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야. 아마 1급 기사 수준이 되어도 싸우면 싸웠지 몰래 대화를 엿들을 수는 없을걸. 그러니까, 이건 우리 중에 리베라만 가능하다는 얘기지.”
―……솔직히 조금 이해하기 힘들군요.
스바가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기분이 조금 풀린 듯했다.
―지금 시대엔 정령사라는 직업도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저 정도 되는 실력에 어째서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는 겁니까?
“겔리안 연합 때문이지 뭐.”
―……겔리안 연합 말입니까?
전혀 연관 없는 문제라 생각했는지, 답변이 조금 느렸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극소수밖에 없는 게 정령사인데, 예전에 세 왕국 동맹 맺으면서 정령사는 인간이어도 이종족 취급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거든. 자기네 파벌인 정령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니 그쪽으로 소속돼야 한다나.”
―그런 의견이 먹혀들었습니까?
“오히려 환영했을걸? 어차피 왕국 쪽 전력 대부분이 기사, 마법사인 데다가, 정령사는 보통 성격이 특이한 경우가 많거든. 사사건건 이래라저래라 하는데 옳다구나 싶었겠지.”
―……마법사도 버티는 인간들이 거절할 정도라니.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군요.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확실히, 상황을 자세히 듣지 못했다면 저렇게 여길 만하다.
“뭐, 그렇다고 정령사가 마법사보다 성격이 더 맛이 갔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보다는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
―부가가치요?
“뭐 연구하고 발명하고 그럴 만한 게 없다고. 그냥 정령이랑 노는 게 다잖아. 게다가 정령이 부탁을 거절이라도 하면 그냥 무능력자 되는 거고. 걔넨 되게 변덕스러운 편이라 그런 경우가 꽤 잦거든. 마법사랑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도 자연히 뒤로 밀리게 되는 거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사정으로 자연히 정령사에 관한 대책이 뒤로 밀리게 된 거야. 거의 10년 넘게 코빼기도 못 본 사람이 대부분일 테니까. 특히 그중에서도 도청이 가능한 바람의 정령을 가정하는 경우는 드물걸? 정령사 중에서도 희귀한 놈들이라.”
―저희가 이번에 그 덕을 봤다는 거군요.
“그렇지.”
―한데 괜찮겠습니까?
“뭐가?”
―그 말대로면 리베라와 계약한 마스터도 겔리안에 소속되어야 할 텐데요.
“아, 그런 거라면 걱정 없어.”
나는 주위를 날아다니는 리베라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새로 태어난 정령의 경우엔 꼭 연합에 소속될 필요가 없거든. 그러니까, 나는 겔리안 밖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정령사인 셈이지.”
―……그것참 편리한 조건이군요.
“뭐, 언젠가는 인간들과 완전히 융합되는 걸 기대하고 만든 법이겠지. 같은 대륙 살면서 언제까지 남남처럼 지낼 순 없잖아.”
스바는 내 말에 납득한 듯 조용히 수긍했다. 그래도 아직 서운함이 남은 것 같기는 하니 일단 나중에 혼원력이나 조금 넣어 줘야겠다. 그게 얘한텐 대충 고급 휘발유 같은 느낌인 것 같으니까.
“……그보다.”
나는 동쪽을 쳐다보며 마족의 심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리베라의 바람이 계속해서 전해 오는 얘기를 들으며 씨익 웃었다.
“드디어 잡겠구나. 바포메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