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25)
“…….”
데이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귀로 들은 말을 정확히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급에 올랐다고?’
머릿속으로 다시 발음해 봐도 실감이 나지 않는 건 여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단테는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4급 중하위. 높게 쳐 줘봐야 중상위 정도인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 수준에서 3급에 오르는 건, 아무리 고명한 심법을 익히고 있다 해도 최소 3년은 걸리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걸 겨우 한 달 남짓한 기간 만에 달성한다니.
‘차라리 재앙이 단테 경을 노리고 몰래 쳐들어왔다는 말을 믿고 말지.’
데이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단테의 마력을 탐지해 보았다. 진작 해 봤으면 되는 일이지만, 벌인 일 수습에 정신을 빼앗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탐지가 끝났을 때, 그는 경악해서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3급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고위급으로 분류되기 시작하는 3급. 그것도 갓 들어선 정도가 아니라, 꽤 완숙한 수준의 중하위급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데이크가 떨리는 목소리를 굳이 숨기지 않고 물었다.
“갑자기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게 아니라면…… 아니, 설사 신의 축복을 받았다 해도 이건 말이…….”
“신은 아니고, 자본의 축복을 받기는 했지.”
“……자본의 축복이요?”
데이크의 말에 단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 내가 수도를 다녀온 것은 알고 있겠지?”
“알고는 있습니다만…….”
“목적은 옵시디언 경매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좋은 물건이 꽤 많이 나왔더군. 덕분에 영약 재료를 사는 데만 십만 골드 넘게 사용했다.”
단테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걸 들은 데이크는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영약을 먹어 3급에 도달했다고 하는 건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게 뭐 어쨌냐 싶겠지만, 이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십만 골드가 그리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금액이냐는 건 둘째 치고, 영약의 힘으로 경지를 올릴 수 있는 건 사실상 4급이 끝이라는 게 보편적 상식인 것이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단순히 3급의 마력 흐름을 돋울 정도의 영약이라면 애초에 몸이 그 압력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가능성에 걸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보통 운이 좋아야 주화입마다. 나쁘면 몸이 뻥 터져 버리는 거고.
더욱 놀라운 점은, 저것도 몇 년의 장기 복용을 염두에 두고 조금씩 먹었을 때의 기준이라는 거다. 한 달 같은 말도 안 되는 기간이 아니라.
데이크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상식이 붕괴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그것이 아이언 님의 비법 중 하나입니까?”
그에게 수강 받던 이들이 훈련 중 꽤 많이 죽어 나갔다는 얘기는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아이언 본인부터가 그 정도 각오가 없으면 오지 말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 수련 내용에 대해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살아 나온 수강생들이 그 당시 일만 물으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벌벌 떨어대기 바빴던 탓이다.
‘만약 억지로 영약을 먹이는 것이라면 그 사망자 수나 수강생들 태도도 이해는 간다.’
그게 윤리적인가는 둘째 치고 말이다.
데이크가 살짝 의심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단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스승님의 수련 방법 중에 영약을 먹는 건 없다. 그분에겐 그런 것이 필요 없으니까.”
“그럼 단테 경의 성과는……?”
“그냥 내 몸이 영약의 압력을 버틴 것뿐이지. 무슨 참신한 비법이 있거나 무식하게 영약을 때려 넣은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는 투다. 그러나 데이크는 그 말에 창피를 느낄 새도 없었다. 단테가 한 다른 이야기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겨우 한 달 만에 등급을 상승시킬 정도로 먹었는데 몸이 그 압력을 버텼다는 말입니까?”
“정확히는 하루다. 어제부터 조금씩 먹어 가면서 운기 했으니까.”
“…….”
가만히 듣자 하니 한술 더 뜬다. 한 달 얘기도 믿기 힘들었는데, 하루면 말할 것도 없다. 데이크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 한 순간.
“못 믿겠으면 저걸 열어 봐라.”
단테가 먼저 끼어들어 웬 통 하나를 가리켰다. 이 난리통에도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한 걸 보면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 듯했다.
“혹시 드셨다는 그 영약을 담아 둔 것입니까?”
“그래.”
“……제가 믿지 못하는 건 그 영약을 먹고 버티는 몸에 관한 것이지, 그런 영약이 있다는 것이 아닌데요.”
“통 안에 남은 영약의 양과 마력의 농도를 확인해 보면 될 거다. 설마 내가 저걸 폼으로 놓아 뒀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진 않지요.”
데이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단테가 가리켰던 통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꿀꺽. 마른 침을 삼킨 뒤, 긴장한 모습으로 뚜껑을 열었다.
“헉!”
뚜껑이 열리자마자 안에서 흘러나오는 농후한 마력의 열기에 데이크가 신음을 내뱉었다.
‘……이건 내가 보고 들은 영약을 다 합치더라도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수준이군.’
이런 걸 한 모금이라도 먹는다면 대부분 곧장 몸이 붕괴될 거다. 외공을 단련한 극소수의 인간들도 바로 폐인이 되고 말겠지.
‘확실히, 농도 자체는 3급에게 통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만…….’
문제는 먹은 양과 그걸 버틸 수 있는 육체. 후자는 일단 제쳐 둔다 쳐도, 전자는 지금 당장 확인이 가능하다. 데이크는 남은 영약을 확인하기 위해 통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렇게 1분의 시간이 흐르고.
안을 살피던 데이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꺼내 단테를 바라봤다.
“……남은 게 한 방울도 없습니다만. 혹시 저를 놀리기 위해 준비해 둔 장난 같은 겁니까?”
“내가 그리 하릴없는 인간처럼 보일 거라곤 생각 못 했군.”
단테는 드물게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안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설마.”
데이크가 경악한 표정으로 아까 내뱉었던 말을 반복했다. 원래 그리 쉽게 놀라는 성격이 아니건만, 단테를 만난 이후론 이러는 일이 잦았다. 그야 단테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을 몇 번씩이나 저지르곤 했으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짐작했나 보군.”
단테는 다리가 하나 날아가 버린 침대 끝에 걸터앉으며 데이크의 경악한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씨익 웃었다.
“네 생각대로, 나는 저 통 안에 들어있던 영약들을 전부 섭취한 상태다. 단 하루 만에 말이야.”
* * *
데이크는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해대다가 떠나갔다. 그게 어찌나 심했는지, 잠깐 동안 마치 시어머니라도 생긴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뭐라더라. 영약은 몇 년씩 텀을 두고 마셔야 하는 거지, 단기간에 해치우는 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자살 방법이라나?
그치만 나는 5급이나 4급에 오를 때도 영약을 그렇게 찔끔찔끔 먹은 적이 없었다. 당장 성장해야 하는 판인데 그리 먼 미래를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뭐, 그 농도나 양은 지금과 비교하기 미안한 수준이긴 하지만.
“후우…….”
사실 이번에는 나도 조금 위험하긴 했다. 마지막 잔 마실 때쯤엔 거의 주화입마가 올 뻔도 했으니까.
평상시라면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은 시점이 시점이다 보니 실력을 조금이라도 키워 두고 싶었다.
아무튼, 그걸 겨우겨우 가라앉히고 있는 와중에 데이크가 습격해 온 거다. 사람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지.
“……그래도 공격한다 한 건 조금 심했던 거 같기도 하고.”
일단 나중에 사과해 둬야겠다. 내 잘못은 없었지만, 걔도 악의 가지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방을 옮기기 위해 짐을 싸고 있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여기는 원래 사람 잘 안 다니는 골목인데. 데이크가 저지른 소란을 듣고 왔다기엔 타이밍이 또 너무 늦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기도 하고.
뭔 얘긴지 궁금해서 혼원력으로 청력을 키웠다. 그리 많은 양을 쓰지 않아도 벽이 시원하게 뚫려 있는 탓에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려왔다.
“이보게. 여기 주둔 중이던 기사님들이 갑자기 엄청나게 분주해졌던데, 혹시 무슨 일인지 아는가?”
“쉿! 너무 큰 목소리 내지 마시오. 안 그래도 다들 예민해져 있으니까.”
“……뭔가 안 좋은 일인가 보지?”
답해 주던 남자가 잠시 망설이는지 한동안 나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그러다 질문하던 사람이 재촉하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연다.
“나도 확실히 아는 건 아니니 어디 가서 나한테 들었다고 하지 마시오. 자칫하다간 목이 잘려 나갈 수도 있어.”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 그만 겁주고 얼른 말해 보게.”
남자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각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지. 거의 기사단 하나 규모가 전멸했으니까.”
“……기사단 하나 규모가 전멸해?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몬스터 웨이브를 막기 위해 온 기사들이 몇 군데 흩어져 있는 건 아시오?”
“그 정도야 당연히 알지. 이 도시에 삼백. 그리고 서쪽과 동쪽에 임시로 지어 둔 요새에 각각 백 명씩. 아마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
그 말에 남자가 살짝 놀란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생각보다 자세히 알고 있군. 그 말대로요. 그만한 전력을 한곳에 몰아넣는 건 비효율적이니 그렇게 해 둔 거겠지.”
“그런 사소한 건 됐고, 그래서 기사들이 뭐 때문에 저러는 건가? 그 요새들 중 하나에서 지원 요청이라도 들어왔나?”
“지원 요청이면 얼마나 다행이게.”
남자가 조금 뜸을 들였다. 아마 주위를 경계하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더니, 목소리를 힘껏 낮춘다. 그만큼 위험한 이야기라는 것처럼. 나도 귀에 혼원력을 더해 청력을 키웠다.
“지원 요청이 아니라, 서쪽 요새의 생존자가 막 들어왔다고 하더군. 그것도 팔다리가 하나씩 뜯긴 채로 말이오.”
“……생존자?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무슨 소리겠소? 지원 요청할 새도 없이 요새가 무너졌다는 뜻이지.”
“뭐? 하지만 분명 각각의 요새는 2급 기사님들이 맡고 있는 걸로 아는데. 설마 그 2급 기사님이 목숨만 겨우 건져 올 정도로 웨이브가 강했다는 건가?”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어이없다는 듯 묻더니, 이내 쯧쯧 혀를 찼다.
“누가 그런 지나가는 애도 안 믿을 소리를 하나? 기사단에 인맥이 있다고 해서 물어봤건만, 혼자 소설을 쓰고 있군.”
“믿거나 말거나지. 나는 내가 들은 대로 얘기했을 뿐이오. 그리고 내가 언제 2급 기사님이 살아 돌아왔다 했소?”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생존자는 2급 기사가 아니라는 뜻이지.”
남자는 한껏 깐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2급 기사님은 다른 기사들과 같이 명을 달리하셨소. 그쪽의 상황을 이곳에 알리지도 못하고 말이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