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24)
리베라와 함께 도시로 돌아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산발적으로 발생하던 몬스터 웨이브도 거의 끊기고, 주둔 중인 기사들 사이에선 대체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냐는 말들이 나오는 판국이다.
원래 이럴 때가 가장 긴장해야 할 타이밍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기사들에게 하염없이 경계를 요구하는 것도 가혹한 일이다.
그들은 여전히 단순히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여기 왔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발록 일만으로 충분히 놀랐을 텐데, 바포메트 같은 재앙에 관한 건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냥 말해 주고 싶지만, 빈센트가 거절했다. 국가의 기밀이라나.
다 뒤지고 난 뒤에도 기밀이 그렇게 중요한가 보자 하려다가 꾹 참았다.
빈센트한테 따질 일도 아닌 데다, 어차피 기사들이 안다고 해 봤자 별로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사실 대비한다고 막았을 전력이면 애초에 내가 여기 있을 이유도 없지 않나.
아무튼, 그런 사정들이 겹쳐서 내가 할 만한 것들은 별로 남지 않은 상태다. 예를 들면 집안에 처박혀 수련하는 거라든가.
“드디어 오늘인가.”
나는 구석에 처박힌 통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바로 한 달 전 제조해 둔 마력주다. 때마침 숙성이 끝났는지, 바깥으로 터질 듯한 마력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분명 마력 차단의 술식이 새겨진 통 안에 갇혀 있음에도 말이다.
대체 얼마나 기운이 많으면 저게 넘치는 건지 모르겠다. 게임 내에서 저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는데.
“저번에 거인의 심장이랑 괴멸초 안 먹어 뒀으면 몸이 못 버텼을지도 모르겠네.”
화아악!
침을 꿀꺽 삼키며 뚜껑을 열자, 통 안에 맺혀 있던 마력이 연기가 되어 뿜어져 나왔다.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건만, 그 양이 워낙 많다 보니 형태를 갖춰 버린 거다.
나는 그걸 조금도 놓치지 않고 전부 몸으로 흡수해 버렸다.
그렇게 흩어지려 한 걸 모았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몇 달은 죽을 고생하며 수련해야 할 양의 마력이 쌓인다.
“……먹어 뒀어도 못 버틸지도 모르겠고.”
아무래도 들어간 재료들 중 몇 가지가 서로 이상 반응을 일으킨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기운이 증폭되지는 않았을 거다.
이거 벨리아 대륙 역사상 가장 강력한 영약인 거 같은데.
근처 수납함에서 작은 잔 하나를 꺼내 와 마력주를 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와 동시에 오른쪽 손등에서 빛이 나더니, 화르륵! 잔을 잡고 있는 손에 살짝 불꽃이 일었다. 지금은 문신에 들어가 있는 리베라의 능력이다.
안의 내용물이 적당히 데워졌을 때. 손가락을 다시 까딱거렸다. 손 전체에 맺혀 있던 불꽃이 언제 존재했냐는 듯 사라진다.
나는 고맙다는 의미로 문신을 살짝 쓰다듬어 주고, 잔을 입안에 털어 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윽…….”
바로 몸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너무 많은 양의 마력이 들어오다 보니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거다.
어째 요즘은 계속해서 이런 일만 생기는 거 같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 내고, 자리에 앉아 차분히 운기에 들어갔다.
* * *
데이크는 요즘 도시의 분위기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 같이 일이 전부 끝난 것처럼 늘어져 있기 바쁜데, 정말 끝난 것이라면 그들이 아직도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오백 명의 기사는 왕국 입장에서도 무작정 놀릴 수 없는 막강한 전력.
그런데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걸 보면 아무리 재앙에 대해서 모른다 할지라도 무슨 일이 있구나, 짐작은 해야 하는 것이 옳다.
‘이게 기사 아카데미 교육의 한계인가?’
데이크가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동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발록 둥지에서도 느꼈던 일이지만, 이 인간들은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단순한 군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할지 모르나, 기사는 이런 식으로 바깥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잦다.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여야 하는 일도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기사들이 보여 준 모습은 어땠는가?
명령권이 누구한테 있냐는 둥, 5급들을 내보내 시간을 끌면 된다는 둥. 계속해서 얼토당토않은 말만 지껄이지 않았던가. 만약 단테 경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르곤은 거기서 매우 큰 피해를 입고 말았을 거다.
‘지금 도시에서 제대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건 빈센트 지휘관님과 단테 경뿐이지.’
마침 재앙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역시 이대로는 안 돼. 적어도 뭔가 대책을 짜 놓지 않으면.’
그렇지만 지휘관은 아무리 촉망받는 데이크라도 그리 쉽게 만나 상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 남는 건 한 명뿐.
데이크는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단테가 머물고 있는 고급 여관 쪽이다.
‘그러고 보니 거의 한 달 가까이 보지 못했군.’
발록 둥지 일이 끝나자마자 수도에 갔다 온다더니, 돌아온 뒤로도 방 안에 칩거해 나온 적이 없다.
어쩌면 수련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다.
데이크는 여태까지 단테만큼이나 기사의 귀감이라 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으니까.
‘겨우 한 달 수련한다고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열정이라니…….’
아직 직접 본 것도 아니건만, 데이크의 안에서 단테에 관한 평가가 끝도 없이 올라갔다. 그렇게 그가 내면의 환상을 점점 키워 가고 있을 때쯤.
‘……뭐지?’
데이크가 뚝, 걸음을 멈췄다. 단테가 머물고 있는 여관 안에서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경우는 보통 두 가지다.
기사가 승급하고 있다든가, 강대한 존재가 힘을 뿜어내고 있다든가.
하지만 전자는 말이 되지 않는다. 한 달 전 단테의 경지를 생각해 보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금 시점에 승급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럼 이제 남는 건 강대한 존재가 힘을 뿜어내고 있다는 건데…… 지금 도시에서 저 정도 기운을 뿜어낼 수 있는 건 지휘관인 빈센트뿐이었다.
‘빈센트 님이 그러실 일은 없다.’
1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힘으로 해결하는 걸 즐기지 않는 게 빈센트다. 만에 하나 단테가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해도, 징계 수준으로 끝내지 무력행사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어 단테는 엄청난 공도 세우지 않았나. 어지간한 일은 웬만큼 감안이 될 터.
‘……설마 재앙이 쳐들어온 건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가능성에 데이크가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 판단을 시작했다.
만약 저기 있는 것이 재앙이라면…… 그가 끼어든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놈은 무려 추정 1급에 해당하는 괴물이니까. 그가 간다고 해 봤자 그냥 시체만 하나 더 늘리는 꼴이겠지.
따라서 합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그는 이 자리에서 물러나 지원을 불러오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 전에 단테 경이 죽게 되겠지.’
데이크는 아직 단테에게 갚지 못한 빚들이 떠올랐다. 하늘을 나는 배로 기사들을 태워 준 것부터, 발록의 둥지를 없애는 데 엄청난 도움을 줬던 것까지.
그 하나하나가 왕국 차원에서 갚아야 할 만큼 큰 것들이다.
‘그런데 아르곤 왕국의 기사인 내가 단테 경의 위험을 모른 체할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데이크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을 꺼내 온몸의 마력을 회전시켰다. 탓! 발을 박참과 동시에, 몸이 곧바로 여관 3층 높이까지 떠오른다.
‘컴프레션.’
순간 느껴지는 과부하. 하지만 데이크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고통을 무시했다.
‘……재앙을 이기는 건 무리여도, 이 속도라면 단테 경을 안고 도망치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있는 힘껏 정면을 향해 검기를 내뿜었다.
콰아아앙!
여관의 3층 벽이 종잇장처럼 허물어졌다. 데이크는 다시 한 번 뛰어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젠장! 먼지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여!’
컴프레션에 모든 기운을 쏟아부은 탓에 안광을 강화할 마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그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단테 경! 어디십니까! 지금 당장 도망가야만 합니다!”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벌써 죽은 건가? 데이크의 표정이 절망으로 뒤바뀐 순간.
휘잉!
방의 중심부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어 먼지들을 전부 몰아냈다. 데이크가 바로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그곳에는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을 한 단테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내가 공격하기 전에 말이다.”
약간이지만 살기가 담긴 목소리에, 데이크가 흠칫 몸을 떨었다.
* * *
“……그러니까 여기 재앙이 쳐들어온 줄 알았다, 이 말이지. 아무 소란도 없이, 굳이 지휘관도 아닌 날 노리고 말이야.”
“……그게, 거기까지 생각할 틈은 없어서…….”
“변명은 그게 다인가?”
“……죄송합니다.”
데이크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추론이란 걸 인정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 뒤통수를 갈겨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다,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뒀다.
그래. 능력은 좋지만 가끔씩 큰 착각을 한다는 설정이 있기는 했다. 이제 와 누굴 탓하겠나. 굳이 따지자면 그딴 걸 써넣은 개발자 잘못이지.
곧이어 눈이 휘둥그레져서 올라온 여관 주인에게 데이크가 사례하고, 나는 바람과 물을 이용해 잔해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오히려 너무 시원스레 잘라 버려서 청소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끝이 났다. 의외로 부서진 물건은 별로 없었던 거다. 뭐, 벽이 조금 휑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맨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데이크가 다시 한 번 사과해 왔다.
“다른 기사들에게 생각이 짧다 욕한 제가 이런 꼴이라니……. 뭐라 할 말이 안 떠오르는군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거의 바닥에 닿겠다 싶을 정도로 숙인다. 저거 진짜 쥐구멍이라도 파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애써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는 이제 됐다. 굳이 하고 싶다면 여관 주인에게나 더 해라.”
“……그분에게도 정말 죄송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혹시 필요하다면 제 목숨이라도…….”
“아니. 그럴 것까진 없다.”
그 뒤로도 나는 데이크를 달래는 데 한참을 투자했다. 한 번만 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혀를 뽑아 버리겠다 했는데, 대뜸 그래 달라며 진짜 혀를 내밀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내 필사적인 노력이 통한 걸까. 데이크도 결국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멈춘 거다. 그가 여전히 무릎 꿇은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헌데, 괜찮으시면 하나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말해 봐라.”
“재앙이 온 게 아니었다면, 아까 그 엄청난 양의 마력 파동은 대체 뭐였던 겁니까?”
아, 그게 궁금했던 거구나.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너도 몇 번 겪어 봤을 텐데. 기사의 집에서 마력 파동이 일어났다면, 경우의 수는 한 가지밖에 없지.”
“……설마.”
데이크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나는 우쭐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바로 그 설마다.”
마력을 회전시켜 겉으로 뿜어냈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양의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멍한 얼굴로 그걸 바라보는 데이크에게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는 방금 막 3급에 도달한 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