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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23화 (123/225)

너의 코드가 보여 (123)

정령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적어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와 같다면 말이다.

분명 지금이 세상 첫 경험일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닌데, 그런데도 저 몸짓 언어는 쓰는 거 보면 저건 교육보단 본능의 영역인 건가?

사소하게 떠오른 의문은 뒤로하고, 계속해서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네 이름은 알아?”

아까와 반대로 갸웃거린다.

“태어난 곳은?”

이번에는 반응이 조금 다르다.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아니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나는 그걸 보고 조금 놀랐다.

벌써부터 간단한 의사소통이 된다고?

본래 정령은 대화 같은 걸 나누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실 생물이라기보다는, 자연이 몸체를 갖추고 형상화된 형태에 가까우니까. 그냥 존재하면 되는 걸 왜 굳이 귀찮게 이야기를 나누냐는 식이다.

그래도 일단 물질계에는 존재하다 보니 언어라는 걸 이해하긴 하는데, 당연히 태어나자마자 가능한 것은 아니다.

보통은 수천 마디 정도는 들은 뒤에야 간단한 인사라도 알아듣건만, 이 녀석은 내가 하는 세 마디 말만 듣고 그걸 해내 버린 거다.

정령계의 영재 같은 건가?

뭔가 똑똑한 자식이라도 생긴 기분이라 절로 흐뭇해진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내 말, 대충 알아듣겠어?”

고개를 젓다가 살짝 끄덕인다. 의미는 알겠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이러다 보면 금방 익힐 것 같아서 잡담을 이어 갔다.

레이튼에 있는 동료들 얘기부터, 지금 내가 향하는 곳의 상황까지.

녀석은 갸웃거리는 횟수가 점점 줄기 시작하더니, 얘기가 끝날 때쯤에는 눈을 반짝거리며 내 입만 바라봤다.

조금 귀여운데. 나는 슬쩍 웃으며 손가락으로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이름을 붙여 주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

이번에는 고개를 다섯 번이나 끄덕인다. 얼른 안 지어 주고 뭐 하냐는 뜻인가 보다.

녀석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고, 깊은 고심에 빠졌다.

어떤 존재든 이름은 중요하겠지만, 정령에게 이름이란 건 다른 종족들보다 훨씬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그야말로 이름에 따라 개체의 성격이 결정되기도 할 정도니까.

정체성이 희미한 정령을 물질계에 붙잡아 두는 끈 같은 거라 볼 수 있다. 그러니 허투루 지을 수는 없지. 나중에 동사무소 가서 변경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음…….”

일단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건 유명한 정령왕들의 이름이다. 바람의 미네르바, 불의 이프리트, 물의 엘퀴네스, 땅의 트로웰 같은 거.

나쁘진 않지만, 역시 오리지널리티가 너무 부족하다.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녀석들이기도 하고.

나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데. 정령은 무성의 존재다 보니 한쪽 성별에 얽매이는 것 같은 이름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속성에 따라 성향이 천차만별인 녀석들이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것 하나는 정령 모두가 같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좋은 이름이 하나 떠올랐다.

“리베라는 어때?”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의미를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닐 테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걸 거다.

“자유라는 뜻이야.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생각해 볼게.”

작은 얼굴에 함박만 한 미소가 번지더니,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인다. 좋다는 말이겠지?

나 역시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부터 너는 리베라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그렇게 말을 끝내자, 녀석을 들고 있는 손 반대쪽 손등에 갑자기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빠르게 시선을 내려 확인해 봤다. 커다란 원 안에 동서남북으로 물, 불, 땅, 바람이 새겨진 문신.

저건 분명, 정령과 계약했다는 증표였다.

* * *

어디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자유라는 이름을 붙여 줘 놓고 바로 얽매어 버리는 건 어떤가 싶다. 굳이 따지자면 사기꾼이나 글러먹은 부모에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도시 근처 숲에 내린 뒤 떨떠름하게 표정을 구기고 있자, 머릿속으로 의아함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본인이 원해서 계약된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별로 죄책감 느끼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너, 옷 속에 있으면서 내 얼굴이 보이는 거냐?”

―예. 제가 뭐 눈이라도 달린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시선이 아니라, 연료를 사용해 주변을 인식합니다.

“…….”

그런 세세한 설정까지 넣은 적은 없는데.

하여간 이놈의 세상. 역시 내가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이런 것들이 너무 많이 튀어나온단 말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리베라가 흥미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계속해서 둘러보고 있었다.

“쟤가 원해서 계약이 된 건 맞는데, 뭔가 찜찜하니까 그러지. 순진한 애를 사탕으로 꾄 기분이라 해야 하나.”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계약할 목적으로 받은 거라 생각했는데요.

……이게 아픈 곳을 찌르네. 그보다, 내가 카르달로스의 정령석에 대해 이미 알고 받았을 거란 투다. 경비대장과 하는 대화를 전부 들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를 너무 제대로 파악한 거 같은데. 과연 공백의 시대 정수라 이건가.

“그때는 저렇게 순진한 애가 나올 거라곤 생각 못 했으니까. 정령들은 대부분 날 때부터 싸가지가 없단 말이지. 당연히 쟤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해하기 힘듭니다. 순진한 정령을 꾀든, 싸가지 없는 정령을 꾀든, 행동의 본질은 결국 같을 텐데요.

“이런 건 죄책감 문제야. 게다가 애초에 정령이 원하지 않으면 계약도 불가능해. 그러니까 내가 뭐 진짜 나쁜 짓이라도 하려 한 것처럼 얘기하지 마라.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그럼 본인이 원했으니 더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쟤가 뭘 알고나 했을 때 얘기지. 내가 설명해 주기도 전에 바로 계약돼 버렸잖아.”

상대방을 꼬드기는 것과 속이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제대로 얘기해 준 후에 뇌정석 기운을 살짝 내보일 예정이었는데, 그런 과정들이 전부 생략된 거다.

게다가 그것 외에도 문제는 또 있었다.

―정작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입니다만.

스바의 말대로, 리베라는 분명 여기서 하는 대화를 듣고 있었을 텐데도 그저 태평히 주변을 구경하기 바빴다.

저게 나를 더 심란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다. 저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다 보면, 진짜로 내가 무슨 사기꾼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거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이름 짓기 전에 일단 계약서부터 들이밀 걸 그랬나?

갓 태어난 애한테 계약서부터 들이미는 어른이라니. 그건 또 그거대로 어떤가 싶기는 한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뱉고 있자, 스바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마스터는 가끔 일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계약이 정령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그건 이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깨워 주고 이름까지 지어 준 사람과 계약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사실 당연한 일입니다.

“…….”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리베라에게 물어보시지요. 혹시 본인과 계약한 걸 후회하냐고. 만약 그렇다 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면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스바의 얘기대로기는 하다.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정령과의 계약을 해지하는 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끙끙대고 있는 것도 내 스타일은 아니었고.

아마 갓 태어난 존재라는 걸 처음 겪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긴장한 모양이다. 하긴, 지구에 있을 때도 애들 대하는 건 좀 힘들긴 했지.

싫어해서가 아니라, 어려워서다. 뭐든 쑥쑥 흡수하는 나이라 괜히 나한테 안 좋은 영향을 받을까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리베라가 그걸 보더니 재빨리 날아왔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은 살면서 처음 봐서,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런 걸 버티기엔 내 마음이 너무 세속에 찌들어 버렸어.

스바가 황당하단 듯 말했다.

―마스터의 약점을 하나 찾았군요.

“시끄러.”

머릿속으로 스바와의 연결을 끊어 버리고, 리베라에게 계약에 대해 설명했다.

내가 시선을 피할 때마다 앞으로 날아와 고개를 갸웃거리는 통에 생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내용 자체는 완벽했다.

심지어는 정령왕들도 잘 모를 이야기도 포함시켰는데, 그걸 전부 들은 리베라의 반응은 간단했다.

―……?

뭐 어쩌란 거냐는 식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거다.

……지금까지 본 얘 지능을 보면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건 아닐 텐데. 진짜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라 조금 걱정된다.

모르는 아저씨가 따라오라고 할 때를 대비해서 교육이라도 시켜 둬야 하나?

―그거 보십시오. 제가 별문제 없을 거라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너, 연결 끊어 놨는데 대체 어떻게 얘기하는 거냐?”

―역시 기능 중 하나입니다.

“그놈의 기능, 몇 개인지 전부 정리해서 나중에 보고해. 쓸모없는 건 싹 다 지워 버리게.”

스바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리베라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크게 호선을 그린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절로 녀석의 머리로 향해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건 바이론도 참을 수 없었을 거야.

나는 그렇게 잠시 평화의 시간을 즐기다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리베라, 계약 문제는 넘어간다치고 네가 알아둬야 할 게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표정을 보고는 심각해진 얼굴로 끄덕거린다. 그게 마치 어린애가 어른 흉내라도 내는 듯해서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걸 참아 냈다. 지금 할 얘기는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어쩌면 계약에 관한 것보다 더.

“아직 입을 열기 힘든 건 알겠지만, 일단 이것만은 기억해 둬. 네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말이니까.”

이번에도 역시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적어도 내 얘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는 진지한 얼굴을 유지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 속으로 따라해 봐. 멈춰!”

―……?

“나쁜 사람을 막아 주는 마법의 주문이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다가오려 하면 바로 외쳐야 한다? 알겠지?”

리베라는 잠시 갸웃거리더니, 내가 몇 번이고 강조하자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정도면 교육은 완벽하지. 나는 알려 준 동작대로 앞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리베라를 바라보며 흡족히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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