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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22화 (122/225)

너의 코드가 보여 (122)

[정체를 알 수 없는 돌]

엘로이의 실험실 한구석에서 발견된 미지의 돌멩이. 검사 결과 마석, 속성석, 정령석 등과 전부 불일치. 특이사항, 가끔씩 혼자서 자체적으로 발광함. 추가 조사 필요.

“…….”

서류를 몇 번 더 확인해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림부터 쓰여 있는 특성까지 모두 내가 설정한 그대로다.

역시 이건…… 카르달로스의 정령석 같은데.

정령으로서는 유일하게 불, 물, 땅, 바람의 네 속성을 가졌다는 혼합체. 얼마 전 거인의 심장 조합법과 같이, 작성만 하고 써먹지는 않은 설정이다.

그냥 이런 것도 있다, 식으로 언급만 해 놨던 건데,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쭉 태연하던 내가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내비쳐서일까. 경비대장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갑자기 안색이 굳었는데.”

“……별거 아니다.”

“2급 상대로 반말을 내뱉으면서 당당히 대꾸하는 자를 당황시킨 별일이라……. 그게 무엇인지 꼭 한 번 듣고 싶군 그래.”

“그냥 경매장에서 구입한 것과 똑같은 물건이 있어서 잠깐 아깝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라고 돈이 어디서 무한정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말하면서 표정 관리에 힘썼다. 최대한 원래의 무뚝뚝한 모습과 비슷해 보이도록. 그동안 단테로 살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이기도 한 만큼, 유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연습했던 세월이 보답받기라도 한 걸까.

“흠…….”

그리 납득 갈 만한 이유가 아니었음에도, 경비대장은 나를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석연찮은 눈으로 응시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그 시선을 외면하고 무심하게 서류를 넘겼다. 굳이 뭔가에 꽂혔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히 알아차려도 상관없기는 한데, 이왕이면 숨기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그 왜, 실력의 3할은 숨기라는 말도 있고.

그렇게 적당한 시간을 들여 고심하는 척하다가, 책상에 서류를 툭 하고 내려놓았다.

“이걸로 하지.”

“……돌멩이?”

경비대장은 펼쳐진 페이지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것들도 많은데 왜 하필 이걸 골랐지? 정체가 확실한 걸 선택하는 게 낫지 않나?”

“정체가 확실한 것들은 언젠가 확실히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구할 수 있어?”

나를 쳐다보며 하는 질문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구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결국 어딘가엔 존재하는 물건들이니까. 돈이든 실력이든 조건만 갖추어져 있다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

“본인이 그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생각하는 건가?”

“적어도 언젠가는 갖출 수 있을 거다.”

“……자신이 과한데, 자만심이라고 하지는 못하겠군. 실제로 그만한 실력을 증명했으니.”

말을 마친 경비대장이 피식 웃었다.

나는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카르달로스의 정령석의 그림을 가리켰다.

“그에 반해 이런 건 내가 구하고 싶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지. 그렇다면 선택은 이미 나온 것과 다를 거 없지 않겠나?”

“말은 그럴듯하군. 기사보다는 마법사의 사고방식에 더 가까워 보이기는 하지만.”

경비대장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본인이 선택하겠다는데 뭐라 할 생각은 없어. 결정은 여전히 그대론가?”

“그렇다.”

“그럼 됐군. 물건은 나가는 길에 바로 찾아가면 된다. 이미 엘로이의 것은 전부 창고에 압수해 뒀으니까.”

진짜 일 처리 빠르네. 사건 터진 지 아직 세 시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아무튼, 나한테도 좋은 일이라, 대충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몸을 향했다.

* * *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기사들이 주둔하고 있는 도시로 향하는 스바의 안에 탑승해 있다. 바닥에는 경매장에서 구매한 물건들과 카르달로스의 정령석을 흩뜨려 놓은 채.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걸 전부 합하면 천억이 넘는 돈이란 말이지…….”

정확히는 이천억이 넘는 금액일 거다. 카르달로스의 정령석은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로 귀한 물건이니까.

지구에서 살 때는 저 십 분의 일……아니, 백 분의 일도 언감생심이었는데, 정작 지금은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는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만약 지구에서 수천억 재산이 생겼어도 같은 심정이었을까?

잠깐 슈퍼볼에 당첨되는 상상을 해 봤는데, 지금과 같이 덤덤할 것 같지는 않다. 좋아서 온 거리를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런 걸까.

그냥 실감이 안 나기 때문이면 좋겠지만…… 그냥 나 자신이 아직 이 세계에 소속됐다는 느낌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된 것 같아도, 결국 나는 여기 온 지 고작 2년이 조금 넘은 것뿐이니까. 가끔씩 찾아오는 이방인이라는 기분을 완전히 버릴 수가 없었다.

“…….”

근데 나는 왜 뜬금없이 감상에 젖어 있는 거지? 뒤늦게 사춘기라도 왔나?

장난처럼 떠올렸다가, 순간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몸은 실제로 사춘기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아닌가. 조금 늦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신연령 서른 넘겨서 사춘기라니. 세상에 그것만큼 추한 것도 또 없는데.

근처에 놓여 있는 물통을 꺼내 머리에 쫙 뿌렸다. 물방울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린다. 그걸 보고 나서야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저는 씻겨 주실 필요 없습니다. 자동 수복 기능에는 청소 역시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갑판에 물이 흘러내리자, 스바가 살짝 망설이는 듯한 어투로 말해 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농담 기능도 있는 줄은 몰랐는데. 원래부터 탑재되어 있던 거야?”

―아니요. 스스로 습득한 겁니다. 처음 시도해 본 건데, 혹시 마음에 드셨습니까?

“아니. 나 아니었으면 네가 농담한 건지도 몰랐을걸. 어지간하면 남들 앞에선 하지 마.”

―……알겠습니다.

스바의 목소리가 살짝 시무룩해졌다. 머릿속으로 전달되는 음성에 목소리라는 표현이 맞는가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맙다.”

―예?

이번엔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얼굴 부분으로 짐작되는 뱃머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 기분 안 좋아 보이니까 되도 않는 농담이라도 해서 풀어 주려 한 거잖아. 그러니까, 고맙다고.”

스바는 잠시 아무 말도 없더니, 꽤 시간이 지나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저, 연기 기능도 별로입니까?

“응. 엄청나게.”

―이건 연습이 필요하겠군요. 반드시 업그레이드 완료해서 마스터께 완벽히 선보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그렇게 말했지만, 스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써 연기와 농담 연습에 들어간 모양이다.

나는 녀석을 몇 번 더 불러 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피식 웃었다.

얘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인간미가 늘었다고 해야 하나. 할 말만 딱딱 하던 기계 같은 모습에서, 점점 사람처럼 변해 가는 것 같다.

갑자기 AI의 반란 스토리가 떠올랐으면 실례일까.

나 위로해 주겠다고 머리까지 짜낸 녀석한테 하기에는 미안한 생각 같아서,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 냈다.

그보다……. 이번에 얻은 성과부터 취해야지.

나는 갑판에 놓인 물건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정제에 필요한 아이템들을 생성해 내기 시작했다.

[현재 포인트: 5,000]

허공에서 몇 가지 물품들이 원래 거기 있었다는 양 생겨났다. 전부 지금 내 상황에서는 구하기 힘들거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에르웰에서 구입한 영약 정제용 통을 꺼내고, 재료들을 죄다 안으로 집어넣었다.

세계수의 열매, 드래곤 하트, 최상급 만드라고라 뿌리 등등. 이번에 구입한 것들은 모두 일정 기간 숙성이 필요한 게 대부분이다.

원래는 하나하나 따로 만들 예정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제작 과정이 비슷하기도 하고, 오히려 한 번에 몰아넣으면 효과가 뛰어나진다는 설정도 있었으니까.

보통 그만큼 부작용도 커지기 때문에 지양하는 방식이지만, 지금 내 신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해도 될 만큼 균형 잡힌 상태다. 이런 건 위험 감수 수준도 아니지.

마지막에 코드로 생성한 마나수를 집어넣고, 통의 뚜껑을 닫았다.

아마…… 한 달 정도면 완성되지 않을까? 세상에서 가장 비싼 숙성주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잔에 몇십억 하는 숙성주.

흡족한 얼굴로 통을 쓰다듬었다. 좋은 말도 같이 해 주면서. 칭찬은 식물도 잘 자라게 해 준다지 않던가.

한참을 자식 키우는 기분으로 감싸 주다, 배에서 가장 지리 좋은 곳에 모셔 놓았다.

부디 날 3급으로 올려 줄 만큼 잘 자라 주길.

그렇게 기도까지 마치고, 다시 갑판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건 카르달로스의 정령석뿐이다.

“얘는…… 일단 바로 습득해 둘까.”

정령과의 계약은 보통 당사자의 자연 친화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이 녀석은 그것보단 다른 걸 따진다.

바로 본인에게 없는 속성에 끌리는 거다.

불, 물, 땅, 바람의 4대 원소와 겹치지 않는 색다른 기운.

마침 내겐 뇌정의 속성이 있으니 조건은 차고 넘치도록 충족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극히 희귀한 속성인 만큼, 저쪽에서 계약하자고 매달려 올지도 모르지.

나는 카르달로스의 정령석을 들어 올리고, 피식 웃었다.

“엘로이에겐 일단 감사해 둬야겠는걸.”

마법이든 정령술이든 익혀 둬야겠다 생각한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나 좋은 타이밍이라니.

어째 4급 찍은 이후론 운이 좀 따라 주는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하며 손아귀에 살짝 힘을 가했다. 내 신체 기준 살짝이라 그 정도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쩌저적!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카르달로스의 정령석이 괴상한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저 돌멩이가 부서지며 낸다기엔 조금 이질감이 있는 소리였다. 곤충이 탈피할 때 내는 소음이 섞여 있다 해야 하나.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딱 그런 느낌이다.

사실 비슷한 특성을 가진 돌멩이가 몇 가지 더 있어서 반신반의하는 기분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여기까지 오면 확실할 거다.

깨지면서 이런 소리를 내는 물건이 카르달로스의 정령석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표면에 균열이 심해져 가면서, 돌멩이는 이상한 변화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차가워지나 싶더니 횃불처럼 뜨거워지기도 하고, 돌처럼 딱딱했던 것이 흙처럼 물러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작은 돌멩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거워지기도 했다.

보통이라면 뭔가 잘못됐나 싶어서라도 그만 멈췄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게 그냥 잠에서 깨기 싫어 부리는 앙탈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곧이어 균열이 정령석 표면 전체에 퍼지고.

“……됐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주먹 쥔 손을 펼쳤다. 그 안에는 작게 부서진 파편들과 함께, 늘어지게 기지개 켜고 있는 정령이 모습을 비췄다.

녀석은 하품까지 야무지게 마치더니,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크기 차이가 워낙 나서인지 고개 각도가 거의 직각은 돼 보인다.

나는 정령도 목이 부러지던가 하는 걱정을 하며, 손을 들어 올려 녀석과 시선을 맞췄다.

“안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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