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21)
“……푸하하하!”
엘로이는 마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허리까지 휘어가며 웃어젖혔다.
나는 그 모습을 살짝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자기보다 한 급 아래라 생각하고 있대도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닌가? 지금 딱 공격하면 바로 끝낼 수 있을 거 같은데.
안 그래도 빨리 넘기고 싶은 상황이긴 하다. 이제 와서 6성급 마법사 상대로 실력 테스트할 이유도 없으니까.
조금 비겁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냥 끝내자. 이게 무슨 결투 같은 것도 아니잖아. 애초에 잘못한 것도 저쪽이고.
그렇게 마음먹고 달려들려다, 순간 걸음을 멈췄다. 엘로이 주변에서 뭔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하염없이 웃고 있던 녀석이, 제자리에 선 나를 보고는 돌연 웃음을 그쳤다.
“……정말 눈치는 빠른 녀석이군. 쉽게 갈 수 있었는데 말이야.”
놈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근처에 떠오른 코드에 집중했다.
[MG-6-17]
예전 바르나울에서 봤던 코드다. 주변에 깔아 두고, 다가오는 적을 요격하는 트랩형 마법. 엘로이는 방심한 척 폭소하면서 뒤로는 저런 걸 준비해 놨던 거다.
과연 마법사답다고 해야 하나. 분명 냉정할 녀석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방심한다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검을 어깨에 걸쳤다.
“생각보다 겁이 많네. 겨우 4급 상대로.”
“겁? 주제도 모르는 게 착각이 과하구나. 나는 그저 일을 효율적으로 끝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다. 너 따위가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엘로이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금세 표정을 풀고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마법사를 상대한 경험이 꽤 있는 모양이군. 그래 봤자 별 소용은 없다만.”
그러더니 녀석은 바로 다른 캐스팅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트랩 따위가 아닌 전통적인 공격 마법이었다.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 경비에게는 사고라 하는 수밖에.”
“그런 어설픈 변명이 통하겠어?”
“안 통하면 뭐 어쩌겠어? 네놈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을 텐데. 그냥 건물 주인에게 돈 조금 배상하면 되는 문제지.”
엘로이는 피식 웃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에게 바로 죽음을 안겨 줄 테니.”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녀석을 멀뚱히 지켜봤다.
놈이 시체가 흔적도 안 남을 거라고 한 건 허언이 아니었다.
엘로이가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마법은 실제로 평범한 인간이라면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질 만한 위력이니까.
뭐 그렇다고 초인의 신체까지 소멸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걸 몸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소란이 일어나는 건 나도 별로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적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이해가 일치하네.
나는 뭔가 웅얼거리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방어 마법은 안 써?”
“……내가 깔아 둔 트랩 마법을 간파하고 멈춘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그냥 운이 좋았던 건가 보군.”
“아니. 그건 아는데, 그걸로 충분하냐고.”
내 말에 엘로이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또 헛소리군. 아무리 트랩 마법이 비교적 위력이 약하다고는 하나, 4급 정도가 뚫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돌진해 와 주면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 주지. 소란 없이 조용히 끝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녀석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이번에는 연기 같은 게 아니라, 진심으로 내가 저 공격을 뚫지 못할 거라 믿는 눈치였다.
하긴, 저런 인식이 당연하기는 하지. 나도 바르나울에서는 굳이 맞부딪히지 않고 피하지 않았던가. 지금보다 그리 오래 지난 시점도 아닌데 말이다.
무서워서 피한다기보다는 더러워서 피한다는 기분에 더 가깝기는 했지만, 굳이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흠…….”
그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긴 한데, 지금이라면 그때보다 훨씬 무난하게 뚫을 수 있지 않을까? 짧은 기간이지만, 바르나울에 있을 때보다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지지 않았나.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해보자. 어차피 어떻게 해도 내가 이길 텐데 그냥 조용히 끝내는 편이 낫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놈에게 다시 검을 겨눴다.
“미리 말해 두지만, 인사는 필요 없어.”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엘로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설명을 해 주는 대신, 담담한 얼굴로 땅을 박찼다.
“어차피 인사할 틈도 없을 테니까.”
탓. 가벼운 발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몸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 나갔다. 무영보와 내 초인 신체의 조화다. 분명 살짝 움직인 거 같은데, 정작 몸놀림은 전력을 낸 것과 비슷한 거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실제로 엘로이 역시 딱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 무슨!”
녀석은 크게 당황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런다고 멈출 리는 없지만.
그렇게 내가 엘로이와의 거리를 절반으로 줄였을 때쯤. 앞의 허공에 커다란 광채가 맺히기 시작했다.
엘로이는 그걸 보더니 언제 당황했냐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멍청한 선택을 했군. 생각보다 빠르긴 하다만…… 그만큼 마법에 입는 충격이 훨씬 커다랄 거다.”
“…….”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왜 마법사들은 꼭 평상시엔 과묵하다가 전투에만 들어서면 말이 많아지는 걸까.
나는 녀석의 얼굴을 힐끗거리고, 맹렬히 돌진해 오는 광채들을 향해 검을 살짝 휘둘렀다.
콰아아앙!
광채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사라졌다. 하나하나가 건물 하나쯤은 파괴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보다 훨씬 더 강했던 거다.
나도 예상보다 훨씬 수월해서 놀랐는데, 상대 입장에서는 어떻겠나. 엘로이는 캐스팅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입을 크게 벌렸다.
녀석은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별로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엘로이에게 다가가서 다리를 모두 베어 버렸다.
서걱!
“크…… 크아악!”
놈은 피가 솟구쳐 나오는 절단면을 부여잡고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싸움 소리에도 다가오는 일 없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떨어진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냥 팔로 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을 집어넣자, 뒤쪽에서 마력이 섞인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당장 멈춰라!”
생각보다 빠른데. 수도라는 걸 감안해도 치안 수준이 상상 이상이다. 레이튼이었으면 저놈 과다출혈로 죽을 때까지 아무도 안 왔을 텐데.
나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차분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저항 의지가 없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 상태로 천천히 뒤돌아서시오.”
순순히 따랐기 때문인지 말투가 상당히 정중해졌다. 그 말대로, 나는 이번에도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곳에는 가벼운 옷차림의 5급 기사 둘이 서 있었는데, 표정이 상당히 굳어 있었다. 그중 왼쪽에 선 기사가 내 얼굴을 보더니 조심히 물어왔다.
“……혹시 단테 경이십니까?”
“맞다.”
“……도시에서 전투 행위를 벌이는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동행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범죄자를 연행한다고 보기에는 과하게 정중한 표현이다. 아마 저기 계속해서 비명을 꿱꿱 질러대고 있는 엘로이의 영향일 거다.
저 둘로도 녀석을 이길 자신이 없을 텐데, 나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녀석을 제압했으니까. 만약 내가 반항한다면 절대 끌고 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어차피 꿀리는 것도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으로 가득 차 있던 기사들이 눈에 띄게 안도했다. 보는 시선이 없었다면 한숨까지 내쉬었을지도 모르겠다.
“따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그들은 내게 살짝 고개 숙이며 말하더니, 엘로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피를 너무 흘렸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기절해 있었다.
기사들이 결국 크게 한숨 쉬었다.
“……얘기는 일단 저분을 치료한 뒤에 하도록 하지요.”
* * *
“그러니까, 엘로이 그자가 경매 물품을 빼앗긴 것에 원한을 품고 습격해 왔다 이 말인가?”
중년의 남자가 서류를 응시하며 내게 물어왔다.
에르웰의 경비대장.
과연 아르곤 수도를 지키는 직위라 해야 하나. 등급이 무려 2급이다.
그런 만큼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세가 상당했지만, 나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한 건 정당방위일 뿐이다.”
“……정당방위라.”
경비대장은 서류를 내려놓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확보한 증언이나 정황상 그 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 하지만 정당방위치고는 조금 과한 것 같은데.”
“무슨 뜻이지?”
“엘로이, 그자를 바로 신전으로 이송했지만, 알 수 없는 기운에 다리의 신경이 전부 파괴되어 있었다는군. 그것까지 회복시키진 못해서, 어찌어찌 붙이긴 했어도 혼자선 움직일 수가 없는 모양이야. 이거, 일부러 그런 것 아닌가? 아무리 정당방위라도 사적 제재는 처벌 대상인 걸 모르진 않겠지?”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나는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댔다.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당치도 않는 소리?”
“4급의 몸으로 6성급 마법사를 상대한 거다. 힘을 조절할 여유가 있을 리가 없지. 그런 건 그 와중에 생긴 사소한 일 아니겠나?”
내 말에 경비대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힘 조절할 여유도 없었다는 것치곤 상처 하나 보이지 않는군. 3급을 이긴 자네를 일반적인 4급으로 취급해야 할지도 의문이고 말이야.”
“3급을 이긴다고 내가 3급이 되는 건 아니지. 혹시 이제 와서 급수의 기준이라도 바꿀 건가?”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수백 년 넘도록 변한 적이 없는 규칙이니 말이다.
경비대장은 나를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결국 다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좋아. 어차피 원죄는 엘로이에게 있고, 자네가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처벌은 별로 크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팔이 아니라 다리를 날려 준 것도 좋게 봐주는 고위직들이 있는 모양이더군. 이참에 처벌 삼아 평생 각인이나 써넣는 노예처럼 써먹자는 거지. 하여간 생각들하고는…….”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저걸 노리고 다리를 자른 거기 때문이다.
마법사에겐 움직이지 못하는 것보다, 단순 작업을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게 지옥보다 끔찍한 지옥일 거다. 놈들은 탐구심 하나로 살아가는 족속들이니 말이다.
경비대장은 시선을 서류 쪽으로 돌려 혀를 쯧쯧 찼다.
“아무튼, 진짜 중요한 문제는 이제 따로 있지. 이것만 해결된다면 바로 나간다 해도 아무 상관없네.”
“엘로이의 재산 문젠가?”
내 말에 경비대장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맞아. 엘로이의 재산은 아르곤 법률에 따라 전액 국가로 환수조치 되었어. 하지만 그전에 피해자인 자네에게도 그 재산에 관한 권리가 있지.”
그는 그리 말하면서 내게 아까 보고 있던 서류를 넘겼다.
“읽어 보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게 말하면 되네.”
나는 그걸 한 손으로 집어 훑어보았다. 엘로이가 가지고 있는 마법 물품에 관한 자료였다.
이런 건 또 언제 조사해 놨대. 하여간 공무원 놈들, 돈 가져가는 일 하나는 철저하단 말이야.
나는 그리 생각하며 대충 페이지를 넘기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물건이 바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대체 왜 여기 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