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19)
아르곤의 수도 에르웰.
그곳은 ‘강철’이라는 칭호를 가진 나라의 중심부답게 육중한 성벽에 투박한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꽉 막힌 느낌만이 들지는 않았다.
그건 건축물이 아닌 사람들의 표정이 만들어 낸 정취일 것이다. 그들에게서는 한줄기 고단함이 엿보일지언정, 입가에는 밝은 미소가 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바쁘지만 희망찬 미래를 그려 나가고 있는 시민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사내 하나가 있었다. 혼자 죽상을 하고 있어서는 아니었고, 단지 그 외모가 너무 튀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힐끗거리며 지나가는 와중에 멋들어진 콧수염을 달고 있는 남자가 흑발의 사내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거, 혹시 단테 아닌가?”
콧수염의 말에 대머리 사내 역시 걸음을 멈추고 흑발의 남자를 바라봤다.
“단테라면…… 이번 갑 전 우승자? 그자는 토너먼트 끝나자마자 왕국 요청받고 변방 쪽에 간 걸로 아는데, 갑자기 여기 수도에 왜 있겠나?”
“아니, 그래도 분명 토너먼트에서 본 얼굴 같은데. 혹시 이번 경매 때문에 잠깐 들른 거일 수도…….”
콧수염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대머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만약의 경우라는 것도 있지 않나.”
“만약은 무슨. 아무리 위 등급을 이긴 최초의 인간이라 해도 그자가 뭐 신이라도 되는 건 아닐세.”
단테가 향한 곳은 말을 탄 뒤 쉬지 않고 달려도 한 달은 걸릴 만큼 먼 거리다. 볼일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물리적으로 올 수 있는 위치가 아니란 말이다.
대머리의 타박을 들은 콧수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흑발의 남자를 응시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닮았는데…….”
“쉰 소리는 그만하고 이만 가지. 이번 경매는 역대급으로 크게 열린다고들 하니까.”
“거, 알겠네. 알겠어.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갈 거야.”
콧수염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뒤에서 지켜보던 대머리가 혀를 쯧쯧 차며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생긴 게 완전히 판박이긴 하군.’
아르곤에서도 흔치 않은 흑발에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 만큼 냉랭한 표정. 그러면서도 신이 대체 어떻게 조각한 건지 근거리에서 한 번쯤 확인해 보고 싶어지는 압도적인 얼굴.
저런 외모의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 거라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거리가…….’
쌍둥이라 해도 믿을 만한 외모의 사람이 하나 더 있다 여기는 것과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 저울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누구한테 물어도 뻔한 일이다.
대머리는 거리가 꽤 벌어진 콧수염의 뒤를 쫓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세상엔 똑같이 생긴 사람이 셋은 있다던가.”
단테의 소식에 대해 아는 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넘겼으나, 에르웰엔 그리 정보에 밝은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이언의 제자다!”
“지금 시점에 수도로 오다니……, 역시 경매인가? 이번 토너먼트로 30만 골드를 벌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30만 골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믿을 수 없는 소리에 근육질의 검사가 눈을 크게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30만 골드가 어디 보통 금액이냔 말이다. 비쩍 마른 마법사가 검사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몰랐나? 저자가 토너먼트에서 30만 골드를 벌었다는 건 굉장히 유명한 이야긴데.”
“……그러고 보니 대충 들은 것 같기도 하고. 3급을 이겼다는 소문에 너무 놀라서 그런 건 아예 잊어버린 모양이야. 근데 토너먼트에서 30만 골드를 어떻게 번단 말이야? 설마 상금이 그렇게나 되지는 않을 텐데.”
“……자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마법사는 한숨을 푹 내쉬고 설명을 시작했다.
“토너먼트에 도박도 같이 운영하는 건 알지?”
“물론이지. 그런데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왜긴. 30만 골드를 그 도박으로 벌었으니 나오지.”
검사가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설마 본인에게 베팅했다, 이 말이야?”
“그래. 그것도 1만 골드나. 최고 비율인 30대1 구간에 걸어서 30만 골드를 벌었다더군.”
검사는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30만 골드에 비하면 빛이 바래지만, 1만 골드도 평범한 사람은 꿈에도 못 꿔 볼 엄청난 돈이다.
아니, 부자들에게도 허투루 날릴 수 있는 금액이 아닐 터.
그런 걸 본인에게 걸었다는 건 경기 시작도 전에 거의 승리를 확신했다는 뜻이다. 무려 갑 전에 4급으로 출전하면서 말이다.
‘……부럽군. 실력이든 재산이든 자신감이든. 나도 그중 하나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검사는 침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흑발의 남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검사만이 아니어서, 거리의 시선들이 대부분 흑발의 남자에게 몰려들었다.
단테, 리안은 집중되는 이목에 몸이 꿰뚫리는 기분을 느끼며 속으로 크게 한숨 쉬었다.
‘모습을 바꾸고 올 수 있었으면 좋았겠는데.’
하지만 그건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경매장에서 구입한 물건을 단테의 모습으로 써야 하는 만큼, 그 출처가 명확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결국 해결법이 없는 문제인지라, 리안은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고개를 높이 들고 허리를 뻣뻣이 폈다는 소리다.
리안이 오히려 그렇게 당당히 행동하자 시선들은 금방 떨어져 나갔다.
그가 단테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자들은 역시나 하는 심정으로 관심을 끊었고, 그가 단테가 맞다 생각하는 자들은 괜히 눈이라도 마주칠까 황급히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역시 단테가 아닌가 보군. 워낙 닮아서 혹시나 했는데, 그랬으면 이 시선을 받고 저리 나올 수가 없지.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게 아닌 이상.”
“야, 야. 얼른 눈 깔아. 그 미친개 제자라며! 성격까지 닮았으면 어쩌려고. 저쪽 기분이 나빠지는 순간 바로 잡아먹힐지도 몰라!”
리안은 황당한 얼굴로 말하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리안이 본인을 바라보자 정말로 몬스터와 눈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고개를 재빨리 아래로 숙였다. 마치 목숨이라도 살려 달라고 비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니, 내가 무슨 오우거도 아니고, 사람을 잡아먹긴 왜 잡아먹어?’
그뿐만 아니라 아이언도 굳이 일반인을 건드리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
‘대체 아이언에 대한 소문이 어디까지 와전된 건지…….’
아무튼, 어떤 이유로든 시선들이 떨어져 나가니 조금 편안해지긴 했다. 리안이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스바에 대한 건 아직 대부분 모르는 모양이네.’
그 사실까지 알려졌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터. 아마 전략물자로 사용될 수도 있는 유물인 만큼, 왕국 측에서 소문을 통제하는 듯했다.
‘이거 아이언 제자라고 안 했으면 암살자 하나 정도는 찾아왔었겠는데.’
보물을 원하는 자들이야 어디에나 있는 법.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본인 능력이든, 든든한 빽이든, 무언가는 있어야 했다.
단테의 경우에는 3급에 맞먹는 실력에 대륙적으로 이름을 떨친 스승까지. 두 가지 전부 충족했다고 볼 수 있었으나, 그것도 가진 것 나름이다.
스바는 대륙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보물.
1급이나 2급에 다다른 고위급 실력자들도 탐낼 만하다는 소리다.
왕국 차원에서 소문까지 관리할 정돈데, 3급이라는 실력이 두려워서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 보긴 어려웠다.
역시 미친개의 보복이 두려워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생각하는 편이 맞겠지.
‘정작 그 아이언은 내가 만약 진짜 제자라 해도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은데. 하긴, 잡아먹니 뭐니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걸 알 리가 없나.’
리안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대륙에선 보기 드문 7층짜리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칼페온의 지르콘 다음으로 크다는 옵시디언 경매장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 여기서 나올 텐데.’
리안이 고개를 들어 건물을 훑어봤다. 사람 제외, A등급 이하 물건 제외, 무구 제외……. 한참을 뒤적거리던 리안은 이내 목표했던 걸 발견하고 씨익 웃었다.
‘찾았다.’
[IT-S-106]
바포메트를 없애는 데 핵심이 되는 아이템, ‘마족의 심장’. 저거 하나 때문에 날아온 거리를 생각해 보면 얼마가 들어가든 확실히 얻어야 수지타산이 맞을 거다.
‘다행인 건 지금 돈이 썩어 넘치도록 있다는 거지.’
토너먼트 도박 선금으로 받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 리안 상회가 순풍을 타며 골드를 갈퀴로 쓸어 담고 있는 게 더 컸다. 미르와 서율의 도움을 받아 시작한 동방 상품 판매가 예상대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그야말로 수만 골드 정도는 장난처럼 써도 문제가 안 될 정도로.
‘여태까지 소처럼 벌었으니, 오늘은 개같이 써 볼까.’
리안은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하고 건물로 들어섰다.
* * *
“이건 그 옛날 드래곤이 남겼다는 하트의 일부로써, 시작가는 팔천 골드부터…….”
“만 오천 골드.”
“다음은 연합에서 정말 힘겹게 구한 물건입니다! 바로 세계수에서 10년에 한 번만 자란다는 열매로, 시작가는 만 골드…….”
“이만 골드.”
리안은 사회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망설이지 않고 가격을 올려 버렸다. 그 압도적인 재력에 다른 사람들은 리안이 참여하는 경매에는 진작 사기를 잃고 포기해 버리기 바빴다.
“젠장, 역시 단테 맞다고 했잖아! 저 외모에 저 재력.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거리가…….”
“멀다고? 시X, 돈이면 안 되는 게 어딨어? 하늘의 신이라도 샀나 보지! 빌어먹게 불공평한 세상. 혼자 저렇게 다 가지면 우리 같은 떨거지들은 어떻게 살라고.”
질투와 시기에 가득 찬 시선들이 그에게 쏟아졌지만, 이번에는 리안도 그 눈빛들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다.
‘생각보다 쓸 만한 게 많네.’
드래곤 하트나 세계수의 열매. 그리고 기타 등등. 전부 평상시엔 돈이 썩어 넘쳐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다. 가격이 이만 골드든 십만 골드든 무조건 사는 게 이득이란 소리다.
이미 몇 번이고 구하려 해 봤던 것들이니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역시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경매장이란 건가. 레이튼에서 열렸던 노블레스 비밀 경매랑은 차원이 다르네.’
그 규모가 수십 배는 차이 난다고 해야 하나. 두 번째로 큰 곳이 이 정도이니, 이보다 훨씬 활성화되어 있다는 칼페온의 지르콘은 얼마나 대단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이제 스바도 있으니 열릴 때마다 들러 봐도 괜찮겠는걸.’
물론 돈이 허락해 줘야겠지만 말이다. 아무리 골드를 갈퀴로 쓸어 담고 있다고는 하나, 벌써 쓴 돈이 오만 골드를 넘겼다. 이렇게 사용하다가는 금세 파산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거다.
‘적어도 오늘은 괜찮겠지. 자제심 같은 건 버리자.’
리안은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전부 풀겠다는 듯 돈을 펑펑 써댔다. 처음에는 마냥 좋아하던 사회자도 그 혼자 쓴 금액이 십만 골드를 넘어가자 부담감에 식은땀을 흘렸다. 이제 옵시디언 경매장 단일 구매 최고 기록을 깨기 직전인 것이다.
사회자는 오늘 새로운 역사가 새겨질까 기대하며 다음 상품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물건이 되겠습니다! 놀라지들 마시지요. 바로바로, 마족의 심장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