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18)
아르곤 동쪽 끝에 있는 대사막.
동방과의 경계선 역할을 맡고 있는 그 장소에는 50년 주기로 한 번씩 일어나는 대재앙이 있다.
이름하여 ‘차원폭풍’이 그것이다.
그 명칭만 듣고 나면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감을 잡기 어려울지 모르나, 실상을 알고 나면 매우 단순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중심부에서 일어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가장자리로 뻗어 나가는 것인데, 이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고위 기사들도 차원폭풍이 일어나고 있는 기간 동안에는 근처에 가는 것조차 꺼리는 수준이다.
인간의 정점에 올랐다는 자들이 그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당연히 가까이 접근은커녕 그쪽 방향으론 시선 주기도 꺼리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인간은 세상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법이라던가.
그런 혹독한 대사막 근처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수가 적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모여 상당한 크기의 도시까지 이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혹시 고통을 즐기는 변태들인가 싶겠지만,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혹독한 거주환경이라 하나, 유일하게 존재하는 동방과의 교역창구 아닌가.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기회의 장소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젠장, 진짜로 재수 옴 붙었군. 기껏 왔는데 차원폭풍이라니…….”
대낮부터 주점에서 술을 퍼마시던 A등급 용병, 앤드류가 투덜거렸다.
그 역시 ‘한탕’을 노리고 도시에 온 인간들 중 하나였는데, 표정은 희망찬 미래를 그리고 있다 보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앞에서 그 얼굴을 보고 있던 상인 딕시가 쯧쯧, 혀를 차며 잔을 넘겼다.
“자네는 그래도 버리는 게 시간뿐이지 않나. 나는 시간에 더해서 동방에 팔려고 한 물건들도 죄다 폐기 처분해야 할 참이야. 이번엔 진짜 파산할지도 모른단 말일세.”
“거, 또 앓는 소리 하기는. 파산해도 나보다 재산이 몇 배는 많을 양반이.”
“그거야 자네가 버는 족족 써 재끼기 바쁘니 그런 거고. 내가 저축 좀 해 둬라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나.”
딕시의 말에 앤드류가 맥주를 한입에 삼키며 킥킥 웃었다.
“용병들 철칙을 모르나 보군. 오늘 쓸 돈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지금 당장이라도 뒤질 수 있는 게 우리 하루살이들 운명인데, 무슨 저축 같은 소리야?”
“그거 아주 주옥같은 교훈이군.”
“……어째 발음이 조금 그런데?”
“착각일세.”
딕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여기, 엘우드까지 왔다는 건 자네도 은퇴 생각은 있다는 소리 아닌가?”
농사 지을 땅도 없고, 마땅한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닌 도시에 용병이나 상인이 이렇게나 많은 이유야 당연히 뻔했다.
대사막을 건너 동방까지 갔다 올 생각이 아니고서야 굳이 왜 이런 척박한 곳까지 오겠나?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대사막에 있는 마물들이다.
위험한 중심부를 피해 가장자리를 멀찍이 돌아감에도 사람이 수없이 죽어 나갈 정도로 저 장소엔 괴물이 득실거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은 A급 용병쯤 되는 인간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에 한탕 하고 끝낼 생각인 자들만 모여드는 게 어느새 당연한 일이 되었다.
앤드류는 다시 잔에 맥주를 채워 넣으며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번에 은퇴할 생각이었지. 이젠 물 건너간 거 같지만.”
“굳이 그럴 이유라도 있나? 그냥 지금부터라도 안전한 임무만 골라 하며 차근히 돈 좀 모으는 게 나을 텐데.”
그 질문에 앤드류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곧 쓰게 웃었다.
“사실 내가 검을 언제까지 잡을 수 있을지 몰라서 그래.”
“그게 무슨 소린가?”
“……그러고 보니 엘우드에 체류한 지 한 달이 넘어간다 했지. 그럼 이번 아르곤 토너먼트도 보지 못했겠군.”
딕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갑자기 토너먼트 얘기가 왜 나온다는 말인가.
그는 속으로 나름대로 추측을 이어 가다가, 이내 답을 깨달았다.
기사와 용병은 같은 급에서도 실력 차가 꽤 나는 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기사는 어릴 적부터 전문 교육을 받고 자라지만 용병은 그런 것 없이 그냥 제멋대로 검 휘두르다 경지에 오른 자들이지 않은가.
그래도 서로 부딪힐 일이 적은 탓에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는데, 가끔 현실 인식 능력이 부족한 용병 중 패기 좋게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자들이 있다.
그 결과야 당연히 뻔한 일이다.
10분이라도 버티면 용병계의 신성이 나왔다고 떠드는 판국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그렇게 정신적 충격을 받고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하는 용병들이 꽤 많다고 들었다.
‘이 자도 그런 경우인가 보군.’
그리 납득한 딕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앤드류의 살짝 비어 있는 잔에 맥주를 더해 주었다.
“너무 상심은 말게. 토너먼트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 아니겠나?”
“그게 무슨 소리야? 용병 나부랭이가 토너먼트에 왜 참가해?”
“……토너먼트에서 기사에게 지고 좌절하고 있는 것 아닌가?”
“기사와는 몇 번 붙어 봤지만, 딱히 압도적이라는 느낌은 받은 적 없어. 물론 이긴 적도 없지만 말이야.”
“……그럼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앤드류는 그 물음에 이번에도 한참을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잠깐 보는 것만으로 벽을 느끼게 만드는 인간도 존재하는 법이더군.”
“……보는 것만으로?”
딕시는 그게 대체 누구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동급 기사와 몇 번 붙어 놓고도 담담한 자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던가?
아마 본인보다 등급이 높은 기사는 아닐 것이다. 애초에 그쪽은 비교 대상이 아닐 테니까. 그렇다면 분명 동급이거나 아래 단계의 인간이라는 건데…….
딕시의 머릿속에 몇 가지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번개와 같은 속도로 공격한다 하여 ‘뇌전’의 칭호를 받은 패트릭, 검에서 위협적인 불꽃을 피워 내어 ‘홍염’의 칭호를 받은 나타샤, 4급의 몸으로 홀로 3급에 맞섰다는 ‘망국의 초신성’ 리안 등등.
모두 하나같이 최근 대륙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재능 넘치는 자들이다.
‘아무래도 그들 중 하나가 토너먼트에 참가한 모양이지?’
앤드류도 용병들 중엔 한 가닥 이름을 날리는 인간이었지만, 저 유명인들에 비하면 빛이 바래는 것이 사실이긴 했다.
딕시는 그리 판단하고 그중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앤드류는 살짝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전부 아니야. 이번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거든.”
“……또 새로운 실력자인가?”
“또라니?”
“저번 리안이라는 자의 경우에도 그러지 않았나. 보통 이름이 알려지면 그 전의 행적도 같이 밝혀 나오기 마련인데, 그런 것이 거의 없으니……. 한동안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냐는 소문도 많았지.”
딕시가 기가 차단 듯 중얼거리자, 앤드류가 피식 웃으며 맥주를 다시 한입에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둘이 닮은 점이 꽤 많기는 하군. 매우 젊은 나이에 4급에 올랐다든가, 아무 소문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다든가. 하지만 이번에 나온 자는 그 출신이 명확한 편이야.”
“어디 명문가에서 몰래 훈련시켜 온 자라도 되나 보지?”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지.”
그리 말한 앤드류가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딱히 비밀이라기엔 민망할 정도로 널리 퍼져 버린 소문이지만, 그 소식을 처음 들어 볼 이 주점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날 만큼 엄청난 이야기니까.
그는 아무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다는 확신이 서고 나서야 딕시에게 작은 목소리로 귀띔했다.
“놀라지 말고 듣게. 단테…… 아, 그자의 이름일세. 아무튼, 단테의 말로는 본인이 아이언의 제자라 하더군.”
“……뭐?!”
딕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크게 소리쳤다. 그 순간 주점의 시선들이 모두 그를 향해 뻗어 왔다. 앤드류는 소란 피워 미안하다며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딕시를 나무랐다.
“거, 놀라지 말고 들으라니까.”
“……그게 사실인가? 그…… 아이언의 제자라는 거?”
“나도 모르지. 아이언, 그분이 직접 등장해서 밝힌 것은 아니니 말이야.”
그 말에 딕시가 김이 샌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난 또 뭐라고. 그럼 이번에도 또 사칭이겠지 뭐. 예전 그분이 활동하던 시기엔 그런 놈들 많지 않았나. 아이언 님이 죄다 족쳐 버린 이후로는 거의 없어지기는 했지만.”
앤드류가 피식 웃었다. 그도 원래는 저리 생각했었으니까.
“그게 중론이기는 했지. 경기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런 말은 쏙 들어가 버렸지만 말이야.”
“……실력이 꽤 대단했나 보지? 그자가 을 전 우승이라도 했나?”
“을 전이 아니야. 갑 전이지.”
딕시가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앤드류의 얘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 이야기를 착각한 것 같군. 아까 분명 4급에 이른 자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갑 전 우승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래도 사실인 걸 뭐 어쩌겠어? 그자는 4급의 몸으로 3급을 이겼네. 그것도 두 명이나.”
“거, 몇 잔 마시지도 않은 사람이 벌써 취하기는. 됐으니 여기 물이나 마시게.”
“아, 진짜라니까!”
둘은 이야기가 맞네, 아니네, 한참을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점점 커져 결국 주점 안의 사람들이 모두 모일 정도가 됐는데, 그들 대부분이 앤드류의 말을 믿지 못하고 딕시의 편을 들었다.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 앤드류가 크게 고함을 치려는 순간.
“이봐, 거기.”
주점의 입구에서 한 사내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앤드류는 갑자기 말을 걸어온 그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저 옷차림은.’
사내의 윗도리와 바지는 거의 해져 너덜거리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거지라고 할 꼴이었다.
하나, 여기 엘우드에는 상인이나 용병은 있을지언정 거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돈에 미친 상인이나 본인밖에 모르는 용병이 남에게 적선을 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엘우드에서 저런 행색을 하고 있을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설마 대사막에 들어갔다 왔나?’
앤드류는 그리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차원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곳에 다녀올 미친놈이 있을 리 없으니까.
‘패션 감각이 좀 특이한 편인가 보지.’
대수롭지 않게 넘긴 앤드류가 남자를 보며 대꾸했다.
“무슨 일이지?”
“지금 하던 얘기 다시 듣고 싶은데.”
“지금 하던 거라면…… 단테에 관한 이야기 말인가?”
남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앤드류가 쯧, 혀를 찼다.
“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면서 묻기는 또 왜 묻나? 그냥 저들이랑 같이 날 놀리기나 하면 될 것을.”
“믿고 안 믿고는 내가 판단할 일이고, 나랑 관련되어 있는 소문에 참견하는 게 뭐 잘못됐나?”
“……혹시 단테 경과 아는 사이십니까?”
앤드류의 목소리가 조금 공손해졌다. 만약의 가능성을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별걸 다 묻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단테라는 이름도 방금 들은 참인데.”
“……그럼 그 소문과 댁이 대체 무슨 관계라는 거요?”
“음. 이건 나도 방금 안 사실인데 말이야.”
남자의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내가 그 단테라는 놈의 스승인 것 같거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