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17)
거인의 심장과 괴멸초를 섞어 영약으로 만든다는 건 설정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얘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냥 내가 심심해서 써넣은 문장일 뿐이지 않나. 게임 내 어떤 캐릭터들도 직접 복용해 본 적은 없다는 얘기다.
그래도 이독제독(以毒制毒). 독으로 독을 다스린다는 소리도 있고, 여태껏 이런 스킬이나 영약에 관련된 설정은 틀린 적이 없어서 쉬이 넘겼는데…… 조금 안일했나?
“……큭.”
입으로 신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삼켰다. 이런 상황에서 입을 열었다가는 상당한 내상을 입을지도 모르니까.
역시, 예상보다 기운의 흐름이 훨씬 격렬한데.
보통 이런 경우는 두 가지다. 약이 잘못 들어 몸을 해치고 있다든가, 오히려 약이 너무 잘 들어 몸의 변화가 극심하다든가.
이왕이면 후자가 좋겠지만, 전자의 상황도 감안은 해 둬야겠지.
일단 기운이 유난히 강하게 작용하는 장소 몇 군데를 혼원력으로 감싸 뒀다. 이러면 최악의 지경에 이르더라도 영구적인 손상까지 갈 일은 없을 거다.
그럼 보험도 들어 뒀고, 제대로 한번 관조해 볼까.
“후…….”
내부를 살펴보니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마력패스 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패스를 줄이려 드는 거인의 심장과 패스를 늘리려 드는 괴멸초가 충돌 중인데, 어느 한쪽이 뚜렷한 승기를 잡지 못하고 계속 부딪히기만 반복해서 몸에 타격을 주고 있는 거다.
이를 해결하려면 한쪽 기운에 힘을 실어 줘야 할 텐데…… 이제 이걸 어디에 얼만큼 주느냐가 문제다.
거인의 심장에 힘을 더해 주면 패스는 조금 줄어들겠지만, 안정된 발전을 꾀할 수 있다. 현재 거의 200에 가까워진 마력패스 수치가 조금 줄어든다고 몸이 위험해질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아마 원래 수십은 감소할 거에서 괴멸초 효능 덕에 5 정도 사라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까. 그만큼이면 조금 아쉬워도 애써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반면 괴멸초에 힘을 실어 준다면…… 마력패스 수치가 확실하게 200을 넘고 말겠지.
전 종족 중 가장 마력 친화력이 높다는 엘프들도 150을 넘기지 못하는 판국에 200이라.
경이로운 일이지만, 그 지경까지 가서 몸이 버텨 줄지 모르겠다.
신체가 단련될수록 패스가 좁아지듯이, 패스가 늘어나면 육체에 해가 가는 것이 보통이니까.
‘초인’ 덕에 그 관계를 조금 바꿔 놓긴 했지만, 그게 어디까지나 통용될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으니까.
요컨대, 괴멸초에 힘을 실어 준다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패스 조금 늘려 보려다 신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도 있겠지.
결국은 선택의 문제인데.
“…….”
나는 고민 끝에 괴멸초 쪽으로 힘을 실어 주기로 했다.
만약 패스가 과포화 상태까지 왔다면 몸에 어떤 신호라도 왔어야 정상일 텐데, 여태까지 내 신체는 멀쩡했기 때문이다.
‘초인’을 얻은 뒤 그냥 놀기만 한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단련하지 않았나.
그래. 내가 쌓아 온 노력과 성과를 믿어 보자.
마음을 정한 뒤 혼원력을 살짝 내밀어 괴멸초의 기운을 북돋아 줬다.
지지지직.
곧바로 몸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며 거인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효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그냥 방향을 바꾼 거다. 일부는 그대로 소멸됐지만, 대부분은 신체를 향상시키는 곳으로 이동해 그쪽에 힘을 더했다.
……이건 또 예상 못한 전갠데.
이 상황에서 육체가 더 단련되는 것이 이득인지 아닌지 모르겠네. 어느 쪽이든 이제 와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어차피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부분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이라 빠르게 넘어갔다.
아무리 나빠져 봤자 죽지는 않겠지. 다치는 경우엔 고치면 되는 거고.
그대로 하던 걸 계속해서 이어 갔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이 기나긴 여정에도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팽창해 가던 마력패스가 슬슬 성장을 멈춰 가고 있던 거다.
나는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이 정도면…… 30은 올랐으려나?
범재 취급받던 인재가 순식간에 영재 취급받을 수 있는 수준의 수치다. 나한테는 역사상 최초로 200을 넘긴 인간이라는 칭호를 주는 값이고.
“뭔가 색다르긴 하네.”
‘초인’ 덕에 몸이 상당히 가벼웠는데, 지금은 그 전보다 훨씬 더한 느낌이다. 마치 중력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라 해야 하나.
나는 비슷한 행동을 몇 번 반복해 보다가, 씨익 웃었다.
“좋은걸.”
자칫하면 나한테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엔 다행히 긍정적인 쪽으로 먹혀든 듯했다.
신체만 좀 향상시켜 보려 한 건데, 마력패스까지 증진되고. 이제는 베리안이랑 붙어도 해볼 만할 거 같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얼마나 효과를 본 건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진짜 RPG 게임처럼 상태 창을 볼 수 있는 게 아닌 한, 역시 직접 경험해 보는 편이 확실할 테니까.
바로 시험해 보기 위해서 스바를 타고 근처 숲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코드를 살폈다.
“주변에 사람은 없고.”
있는 건 몬스터 한 마리뿐. 마침 딱 향상된 몸을 시험해 보기 좋은 녀석이라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아아아!
커다란 바위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오우거가 나를 보고 기운찬 함성을 질렀다.
안 일어나면 몇 대 때리고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은걸.
나는 오우거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가 더 강하니까 패널티 먹을게. 네가 거기서 돌진해서 나한테 먼저 공격하고, 나는 그걸 피하지 않고 받는 거야. 어때?”
―크와아아!
나름 공평한 제안이라 생각했는데, 오우거 입장에서는 아니었나 보다. 녀석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성을 잃은 듯이 내게 달려왔다.
아니, 오히려 받아들여서 저러는 거 같기도 하고. 사람 말을 알아듣진 못할 테니 그럴 리는 없으려나. 그냥 내가 손가락 까딱인 걸 도발이라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오른발을 뒤로 쭉 내밀고 충격에 대비했다.
콰아아앙!
―……크응?
오우거가 막혀 있는 본인의 주먹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기보다 10분의 1은 될까 말까 한 손이 공격을 막고 있으니 의아할 만도 했다. 나도 신기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저 주먹을 막은 건 마력을 하나도 들이지 않고 한 일이다. 그런데 가속력까지 더해진 오우거의 힘을 내 신체 능력만으로 버틴 거다.
만약 영약을 먹기 전이었다면 이런 건 절대로 불가능했겠지. 혹시나 다쳐도 용의 피로 회복하면 된다 생각해서 저지른 일이지만…… 이렇게 쉽게 버틸 거라곤 나도 상상 못 했다.
이 정도면 신체 능력만으로 오우거를 능가했다고 봐도 괜찮겠는데.
―크아앙!
오우거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계속해서 주먹과 다리를 뻗어 왔다.
나는 그걸 몇 번 더 받아 주다가 확실히 녀석보다 더 강해졌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발을 잡아채 살짝 던져 버렸다.
물론 신체 능력만으론 불가능했고, 마력을 살짝 가미해서.
쿠우우웅!
―……크엉?
오우거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나를 보며 분노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길 던진 게 누구인지 눈치조차 못 챈 거 같은데, 예전 거인족과 오우거의 지능을 빗댄 것이 조금 미안해진다.
아무리 걔네가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종자들이래도 저 정돈 아니지.
속으로 거인족들에게 살짝 사과하며 팔을 들어 올렸다.
신체 능력은 검증이 끝났으니, 이번에는 늘어난 패스를 시험해 볼 차례다.
나는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오우거를 마주 보며 몸 전체에 혼원력을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늘어난 패스 수치는 대략 30. 전보다 약 20프로에 가까운 출력이 더해진 거다. 혼원력은 그 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렬하게 움직였다. 거기에 강화된 신체 능력까지 추가하면…….
콰아아아앙!
나와 주먹을 맞부딪힌 오우거가 달려오던 속도보다 빠르게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팔부터 목까지 뒤틀린 것이, 한 방에 절명한 게 분명했다.
나는 그 광경을 잠시간 멍청하게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오우거랑 힘 대 힘 대결로 단번에 이겨 버릴 줄은 몰랐는데.
“…….”
한 번에 오우거를 죽이는 것은 3급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야 급수가 두 단계는 차이 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겠지.
하나, 그게 오우거와 힘으로 대결했을 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싸우면 결국 이기기는 하겠지만, 3급도 몸이 엉망진창이 되겠지.
애초에 멍청하게 몬스터와 힘겨루길 왜 하나? 좋은 검 놔두고.
문제는 내가 그걸 해냈다는 거다. 그것도 아주 손쉽게.
이제 진짜 칼 든 오우거란 소리 들어도 할 말 없겠는데.
나는 손에 묻은 오우거의 체액을 털어 내며 살짝 웃었다.
* * *
커닐 동굴의 근처, 예전에는 하렐이라고 불렸던 마을. 그곳은 인구 삼백 명이 살던 장소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량함만이 가득했다.
거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들은 기둥만 남은 채 본디 존재했다는 흔적을 과시하고 있었고, 곳곳에 늘어진 수많은 핏자국들은 여기에 더 이상 살아남은 인간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한줄기 싸늘함 마저 내비치는 그 공간의 중앙에서, 산양의 머리를 한 괴물이 발록에게 무언가 보고를 듣고 있는 중이었다.
―……둥지가 전부 털렸다고? 분명 내가 인적 드문 곳에 설치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머릿속으로 전해져 오는 싸늘한 음성에 발록이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발록들 중 가장 강한 2급 최상위 존재였지만, 주인 앞에 서면 한 마리 벌레가 된 기분이 드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답 없이 떨기만 하는 발록의 모습에 바포메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내가 그리 대충 키운 기억은 없는데, 아무래도 불량품이 생긴 모양이야.
그제야 발록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려 했다. 허나, 바포메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그보다 훨씬 더 빨랐다.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 됐다. 그냥 직접 확인해 보면 되니까.
서걱.
어떠한 전조도 없이 발록의 목이 절단되어 날아가 버렸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도 바포메트는 아무 감흥 없는 표정으로 떨어진 머리통에 다가가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쩌어어억.
그 입은 도저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준까지 늘어나더니, 이내 발록의 머리를 한 번에 삼켜 버릴 수 있는 크기까지 늘어나 버렸다.
그리고 바포메트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머리통을 덩크슛이라도 하듯이 입안에 던져 버렸다.
꿀꺽.
―……음. 둥지는 확실히 내가 말한 대로 인적 드문 곳에 설치했군. 괜히 먹었나?
바포메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어깨를 으쓱였다.
―뭐, 됐지. 어차피 적적해서 기르고 있는 녀석들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리고 살짝 손가락을 튕겨 발록의 시체를 불태워 버렸다.
화르륵!
아무리 죽은 몸이라지만, 2급 최상위의 신체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1분조차 걸리지 않았다. 그 광경을 무심히 보던 바포메트가 고개를 서쪽으로 돌렸다.
―그보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기사가 500명이라……. 확실히 인간들 평균 실력이 오르긴 오른 모양이야. 자그마치 발록 둥지 몇 개 파괴하는 데 그 정도 전력을 동원할 수 있다니.
바포메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곧이어 히죽 웃었다.
―정말 대견한 일이군. 내 먹이가 되기 위해 드레싱까지 끝냈다는 소리 아닌가.
그 말을 마치자마자 바포메트의 날개가 들썩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어 미치겠다는 기색으로.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날갯짓이 순식간에 뚝, 하고 멈췄다.
―……지금은 참아야지. 아직 몸이 원상태가 되려면 조금 남았으니까 말이야.
바포메트는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서쪽을 계속해서 지켜보다가, 살짝 혀를 차며 고개를 정면에 되돌렸다.
―부디 내가 회복할 때까지 한 마리도 떠나지 않기를 비는 수밖에 없겠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