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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16화 (116/225)

너의 코드가 보여 (116)

나는 곧바로 대꾸하지 않고 빈센트를 조금 쳐다봤다. 무슨 의도로 질문하는 건지 짐작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재앙’은 적어도 현시점에선 그리 널리 알려진 단어가 아니다. 오우거나 몇몇 인물들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존재하기는 하나, 어투를 보아하니 그쪽을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역시 해방 왕 시절 존재하던 24개의 재앙에 대해 아냐고 물어보는 걸 텐데, 이쪽은 대륙의 기밀에 가까워서 아는 사람이 적다.

발록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 한 번 떠보려는 건가?

어차피 이제까지 실컷 아는 체해 놓고 ‘난 아무것도 몰라요.’ 흉내를 낼 생각도 없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다시 묻겠는데.”

빈센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자네 스승, 아이언도 그에 대해 알고 있나?”

“…….”

과연, 그쪽을 걱정했던 건가.

갑자기 재앙에 관한 얘기는 왜 꺼내나 했다.

“스승님께서도 대충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세세한 부분까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게 정말인가? 그런 것치곤 너무 조용하군. 그자라면 바로 녀석들을 찾아다녀도 이상할 게 없을 텐데.”

“스승님도 슬슬 철들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그건 내가 올해 들은 농담 중 가장 웃기는 소리군.”

빈센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리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언이 그 정도는 아닌데. 하긴, 빈센트도 녀석을 만난 일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

제국을 상대로 같은 진영에서 싸웠다고는 해도 둘이 같은 전장에 있는 일은 드물었을 거다. 그만큼 오버스펙이 필요한 전쟁터가 많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소파에 살짝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번엔 제가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히 괜찮네. 웬만한 것은 다 대답해 주도록 하지. 기밀 사항 같은 건 안 되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재앙에 관해 물어본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음. 역시 그쪽인가.”

빈센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책상 쪽으로 다가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혹시 자네는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나?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보통 1급 기사를 몬스터 웨이브 하나 막자고 보내는 건 상식과 동떨어져 있을 텐데.”

“대충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말이지?”

“재앙에 관한 질문을 하신 뒤이니, 재앙과 관련된 일이겠지요.”

정확히는 바포메트.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아르곤 왕국의 입장을 정확히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내 대응 방법이 달라질 테니까.

내가 상정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원작의 스토린데, 지금은 그와 전개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기사가 수백 명 늘어난 것도 그렇고, 그들 대부분이 살아남은 것도 그렇고.

좋은 변화라고 볼 수는 있지만,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의 얘기다.

이제 와서 나비효과니 뭐니 하는 식으로 갑자기 일이 틀어지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빈센트는 이번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뜸을 들이더니 겨우겨우 무거운 입술을 뗐다.

“자네 생각대로네. 자세한 경위는 말해 줄 수 없지만, 이번에 그 시절 존재하던 재앙이 하나 나타났다는 소식이 있었지.”

그게 이 근처냐 라든가, 발록과 관련된 거냐 라든가, 하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고, 몰랐다고 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

대신에 나는 제일 중요한 문제부터 물었다.

“왕국에서는 그 재앙의 경지를 어느 정도라 보고 있습니까?”

“1급.”

역시. 이건 원작과 다를 게 없나.

“믿지 못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발록들을 보고 나니 다들 아무 말 못 하더군. 자네 덕에 잘 끝났으니 하는 얘긴데, 솔직히 이제 와선 발록이 예방주사 같은 역할을 해 준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

빈센트가 걸음을 옮겨 창밖을 바라봤다.

“전부 끝났다 여기는지 안심하고 있는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긴장이 되돌아왔더군. 아무래도 정말 2급까지 올라간 마물들을 보니 이제야 제정신이 든 모양이야.”

“재앙과 싸우는 데 저들도 나섭니까?”

“일단 세워진 계획은 나 혼자 상대하는 거야. 1급과 맞서는데 2급 이하를 내보내 봤자 고기 방패 역할밖에 못 할 테니까. 저들은…… 그래. 굳이 따지자면 예비 전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잠시 생각에 잠기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빈센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걱정 말게.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저들까지 나설 일은 없을 테니까.”

웬만한 일이 터지니까 문제지. 그보다, 저 얘기 중 걸리는 것이 있다.

“……제가 저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내 말에 빈센트가 갑자기 뒤돌아서 나를 바라봤다.

“그럼 아니라고 할 셈인가? 별다른 보상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자진해서 전투에 참여하고, 2급 상대로 시간을 끄는 사실상 자살 임무에서도 엄청난 활약을 보였다고 들었네. 나로서는 자네가 사람들을 아낀다는 생각밖에 안 들던데.”

“…….”

나는 뭐라 대꾸하지 않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 무슨 얘길 꺼내든 이상한 오해만 늘어날 거 같아서.

빈센트는 그런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내 생각만 이런 것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자네를 생명의 은인처럼 여기더군. 환대는 귀찮아할 성격인 거 같아서 자제시켜 뒀지만…… 혹시 필요한가?”

“필요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군.”

그는 뚜벅뚜벅 걸어와서 다시 소파에 앉았다.

“어쨌든, 보고대로라면 발록은 힘만 급수에 맞을 뿐이지, 기술이나 감각 같은 건 동급 기사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더군. 재앙도 결국은 마물이니 비슷하지 않겠나?”

“…….”

“게다가 내 전용 기간트도 가지고 왔네. 아무것도 없는 재앙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간 셈이지. 왕국에서 이 정도 전력을 투입하는 건 예전 제국과의 전쟁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야.”

확실히, 기사 오백에 1급 하나. 근 10여 년간 어디에도 이런 집단이 모인 적은 없었을 거다. 앞으로 5년 안에도 없을 테고.

왕국에서도 나름 방심하는 일 없이 대비하고 있다는 소리기는 한데…….

아무튼, 대충 앞으로의 상황은 예상이 간다.

이대로 가면 내가 직접 송장 오백 개 치우게 되겠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빈센트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방 앞에 서서 잠시 생각했다.

……역시, 결국 그것밖에 방법이 없나.

* * *

숙소에 돌아오고,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두기로 했다. 지금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유익한 일이래 봤자 강해지는 것밖에 없기는 하지만.

나는 스바를 적당한 크기로 키워 안에 있던 거인의 심장을 꺼냈다.

―그건 어디다 쓰려고 그러십니까? 복용하면 패스가 좁아진다고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나만 아는 가공법이 있다는 얘기도 같이 했던 거 같은데.”

적당히 대꾸해 주면서 콘솔 창을 열었다. 현재 남은 포인트는…… 9,000점.

진짜 보기만 해도 든든하네.

머릿속으로 거의 2년 내내 획득처가 없어 빌빌거리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도 실험해 보고 싶고, 저것도 실험해 보고 싶은데, 포인트 아까워서 한 번의 시도도 못 해 보지 않았나.

뭐, 그렇다고 지금도 그 정도로 여유 넘치게 있는 건 아니지만.

콘솔 창을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순간 궁금해져서 거인의 심장을 검색해 봤다.

등급은 A. 소모 포인트는…… 4,000점? 이렇게나 높다고?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봐도 4,000점 그대로다. 이 정도면 거의 하위 S등급 영약이래도 믿겠는데.

아무래도 효능과 그 희귀도 덕분에 높게 측정된 거 아닌가 싶다. 마력패스가 좁아진다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원래 S등급을 받고도 남을 보물이기는 하니까.

아무튼, 원래 얻으려면 비싸게 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갑자기 공짜로 4,000점 얻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나는 살짝 콧노래를 부르며 검색을 이어 갔다. 거인의 심장 가공에 들어가는 재료는 총 6가지. 그중 내가 자력으로 구할 수 있던 것은 5가지다.

접착초와 괴뢰꽃은 예전 영멸초 가공하다 남은 것이 있었고, 다른 세 가지는 빈센트에게 얘기하자 어디서 공수해 왔다.

문제는 가장 마지막으로 남은 재료인 ‘괴멸초’. 영초라기보다는 독초에 가까운 물건인데, 그 효능은 간단하다.

바로 마력패스를 엄청나게 확대시켜 주는 거다.

선천적으로 정해져 있는 마력패스를 늘려 준다니. 여기까지만 보면 굉장한 영초 아닌가 싶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그 정도다.

인간이 버틸 수 없는 한계까지 팽창시켜 끝내 폭발에 이르게 하는데, 기사들 입장에서는 이만큼 무서운 독초도 없다.

무색무취라 먹기 전 미리 알아차릴 수도 없고, 몸이 아니라 패스에 직접 작용하는 방식이라 일단 들어오면 마력으로 태우지도 못한다.

3급 정도쯤 되면 비교적 대항이 가능해지긴 하지만, 4급 이하는 먹는 순간 그냥 시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괴멸초로 인해 독살당한 기사들이 많기도 하고.

결국 이 괴멸초는 기사들의 열렬한 지지를 업고 대륙법으로 판매, 생산, 채취가 전부 금지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사실상 멸종된 수준이라 뒷거래로 구할 수가 없다.

요컨대, 명령어로밖에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괴멸초(A) 2,000포인트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코드를 생성했다. 괴멸초는 하위 품목이 없어서 단계 상승이 불가능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의 허공에 새빨간 붉은색이 감도는 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 데이터 베이스를 전부 뒤져 봐도 그게 대체 무슨 원리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군요.

“나도 뭐 알고 쓰는 거 아니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해.”

대답하면서 바닥에 재료들을 쭉 깔았다.

괴뢰꽃은 옆에서 춤추라고 놓아 놓고, 다른 것들은 전부 손으로 뭉쳐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알록달록한 경단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단순한 방식도 가공법이라 쳐 주는 겁니까?

“방식보다는 들어가는 재료의 조합이 중요하지.”

패스를 줄이면서 비교적 쓸모없는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거인의 심장. 그리고 패스를 너무 비대하게 만들어 폭파시키는 괴멸초.

사실상 독약 취급받는 재료를 서로 섞는다는 생각은 이 세상 누구도 못 해 봤을 거다.

패스를 줄이는 거인의 심장 부작용을 괴멸초의 팽창 능력이 상쇄시켜 주고, 오히려 효능을 상승시켜 줄 거란 상상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 어느 날 심심해서 설정에 아무 말 대잔치 벌이는 개발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걸 떠올리겠나?

“…….”

잠시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리다가, 손에 쥔 경단을 한입에 꿀꺽 넘겨 버렸다.

효과는 위장에 들어가자마자 왔다. 순식간에 패스와 몸이 요동치기 시작한 거다.

……이거 생각보다 반응이 훨씬 격한데.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나는 그런 의문을 품으며 격렬한 기운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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