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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15화 (115/225)

너의 코드가 보여 (115)

몸이 무너지려 하는 걸 간신히 붙잡았다.

순간 충격이 너무 강해서 패링이 제대로 안 먹힌 건가 했는데, 발록이 아주 잠깐이지만 몸을 멈춘 거 보면 발동이 된 건 확실할 거다.

문제는 그러고도 겨우 버티는 게 다라는 거지.

―그르르르…….

발록이 분노한 신음을 토해 냈다. 그럼에도 눈에는 당혹의 빛이 깃드는 게, 설마 내가 버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모양이다.

나는 놈을 마주 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분명 위력의 절반은 흘려 냈을 텐데도 왼쪽 어깨가 삐걱거리고 있다.

‘용의 피’ 덕에 엄청난 속도로 회복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상태로 공격을 받으면 버티지 못하고 바로 날아가 버리고 말 거다.

때마침 발록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방금 했던 공격이 막힌 이상 당연히 이번 건 더 강하게 오겠지.

……어차피 그럴 거라면, 시간을 조금 끌어 볼까.

나는 살짝 어깨를 풀며 발록에게 검을 겨눴다.

“사람 말은 대충 알아들을 수 있겠지?”

기습을 위해 연기까지 하는 녀석이다.

그 정도 지성이면 적어도 어조로 분위기 짐작은 가능할 터.

과연, 발록은 자신에게 하는 얘기라는 걸 알아챘는지 들어 올렸던 팔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지능이 높다는 것의 또 다른 단점은 바로 눈치도 빠르다는 점이다. 녀석은 내가 시간을 끌려 한다는 걸 읽어 버리고 공격을 서두르려 했다.

나는 그 팔을 응시하면서 툭, 내뱉었다.

“바포메트는 잘 있나?”

순간, 발록의 움직임이 멈췄다. 녀석은 아까 내가 공격을 막았을 때보다 훨씬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설마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는 반응이다.

나는 놈이 정신을 되찾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바포메트가 아직 봉인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다. 물론, 바로 근처에서 요양 중이라는 사실도.”

그쯤에서 잠깐 뜸을 들였다. 발록의 눈동자는 이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역시, 인간의 언어를 대충 알아듣나 본데.

녀석은 전투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더니, 천장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그라아악!

발록은 그렇게 몇 번을 더 포효하고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해 보려고 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원인을 배제하기로 한 모양이다.

뭐, 조금 아쉽지만, 이 정도면 됐나.

내가 지금 말로 끈 시간이 다른 기사들이 싸워서 끈 시간보다 훨씬 길기도 하고.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차피 곧 죽을 놈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말이야.”

―그라아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녀석이 팔을 들어 올렸다.

이미 내 어깨는 거의 회복된 상태다. 최상급 포션이라도 미리 뿌려 둔 듯한 속도다.

나는 재빨리 검을 쥐고 타이밍에 맞춰 공격을 패링 했다.

쾅!

마치 대포라도 맞은 것 같은 충격. 거의 나았다 싶던 어깨가 바로 너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시간을 벌었으면 충분하겠지. 다음 공격을 대충 흘리면서 안전히 착지하면…….

그 순간, 갑자기 밑에서 들리는 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아래를 확인할 여유는 없다. 곧바로 검을 늘어뜨리고 마력을 집중했다.

콰앙!

“큭…….”

나는 벽에 처박힌 채 숨을 쿨럭거렸다.

부상은…… 생각보다 심하지 않다. 내가 잘 막아서라기보다는 애초에 공격이 약했기 때문일 거다. 녀석도 제대로 된 자세를 잡지 못한 채 날린 동작이었으니까.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발록을 바라봤다.

놈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위로는 팔을 내리치면서 아래로는 무릎을 이용해 내 복부를 찍어 버린 거다.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행위는 아니었지만, 설마 저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발록은 팔로 하는 공격 외엔 전부 쓰레기 취급한다는 설정이 있었으니까.

그만큼 내 말에 분노한 건가 했는데, 발록의 눈에 비친 건 그것과는 좀 다른 감정이었다.

“……바포메트가 그렇게 두려운 건가.”

자그마치 2급이나 되는 발록이 겨우 놈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 공황장애라도 온 것처럼 굴고 있다.

공동 안에 있는 수백 명의 기사를 보고도 그리 놀란 기색도 없던 녀석이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르르르…….

나를 벽에 처박은 걸로는 부족했는지, 발록이 인상을 찌푸린 채 내게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이참에 끝장을 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젠장, 지금은 좀 곤란한데.

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려는 찰나, 내 앞을 막아서는 등이 보였다. 상당히 묵직해 보이는 뒷모습이다.

“정말 잘 버텨 주었네. 한 방에 뻗은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말이야.”

그 주인은 바로 국가기사 베리안이었다. 그는 듬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기서 잠시 쉬고 있게. 덕분에 회복도 얼추 끝났으니까.”

……믿어도 되나? 물론 나보다 강한 기사기는 하지만, 패링도 없이 윗급을 상대로 버틸 방법은 없을 텐데.

일단 내가 참견할 이유는 없기에 그 말대로 마음 편히 벽에 등을 기댔다.

어디 이번에는 얼마나 맞설 수 있는지 한번 볼까.

베리안은 앞으로 조금 걸어나가 발록에게 검을 겨눴다. 부상 상태인 나를 배려해서 거리를 벌리는 걸 거다.

그렇게 그와 발록이 서로 대면하고.

콰앙!

베리안은 발록의 공격 한 번에 다시 구석으로 처박혔다.

“…….”

아니, 예상했던 결과긴 한데…… 뭔가 허무하네. 멋이라도 부리지 말든가.

나는 제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부상이 심해서 다음 순번으로 넘길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워낙 시간을 오래 끌어서인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해있었다. 간신히 기는 하지만.

“……왜 그렇게 보는 거요?”

“네 차례다.”

나는 딱 그 한마디만 하고 말없이 제논을 바라봤다.

녀석은 얼굴에 철판 깔고 버티는가 싶더니 곧이어 똥 씹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걸 보니 일부러 심하게 다쳤을 거라는 의심이 더 강해지는데.

이번에 보면 알겠지.

“……젠장.”

제논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발록에게 다가갔다. 발록은 녀석을 귀찮은 벌레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힐끗거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전력으로 대응해 주겠다.”

정말로 그리하겠다는 듯, 제논이 결연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아까 고의로 힘을 뺐다는 건 착각이었나?

잠시 의심했던 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르르르…….

발록이 팔을 내리치는 순간. 제논이 슬쩍 검에서 힘을 빼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적당히 다쳐서 빠지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 제논의 행동은 판단도 잘못했고, 조절도 잘못됐다.

“끄어억……!”

부상의 후유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힘을 너무 빼 버렸다. 검은 두 동강 나 부러지고, 발록의 팔은 제논의 옆구리에 직격했다.

본인보다 윗급의 힘을 정통으로 맞았는데 버틸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 없다. 제논은 단 일격에 허리가 접히며 절명해 버렸다.

나는 그 꼴을 보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만 제대로 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텐데. 저것도 그냥 자업자득인가.

―그르르륵……

발록은 이게 다냐는 듯 씨익 웃더니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누구나 두려워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아까와 다르게 나는 그냥 벽에 기댄 채 멀뚱히 녀석을 지켜봤다. 데이크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테 경은 회복에 전념해 주십쇼. 이번에는 제가 맡지요.”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지금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건 저밖에…….”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나는 긴장 풀린 몸을 살짝 늘어뜨리며 옆쪽을 가리켰다.

“우리 역할은 이미 끝났다는 뜻이지.”

“그게 무슨…….”

데이크가 대꾸하면서 시선이 내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거기서는 두 명의 남자가 칼집을 만지작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놈은 이제 우리가 맡지. 고생이 많았군.”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에 발록이 몸을 돌렸다. 여기선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으나, 당황하고 있는 표정이 눈에 훤했다.

녀석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곳에선 어느새 전투를 끝낸 2급 기사 둘이 놈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 상처가 꽤 심하게 남은 걸 보아하니 이쪽 상황을 지켜보고 무리를 좀 한 모양.

생각보다 쉽게 풀린 것 같기는 하지만…… 그만큼 내가 끈 시간이 상당히 오래되긴 했지. 전투로든 입으로든.

일단 일은 잘 끝난 것 같은데.

태평히 앉아 두 명과 한 마리가 싸우는 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나타난 메시지가 내 시야를 가렸다.

[스토리 분기! / 「아르곤 전력의 존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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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듣자 하니 이번에도 역시 자네의 공이 컸다고 하더군.”

빈센트가 잔을 건네 오며 말했다. 그냥 술이겠거니 하고 받으려 했는데, 안에서 청명한 마력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뭐지?

바로 위에 떠오르는 코드를 바라봤다.

[IT-A-72]

“이건…… 극명초를 우린 차군요.”

“안목이 대단하군. 냄새를 맡은 것만으로 종류까지 알아차리다니.”

빈센트는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자네 말대로 극명초를 우린 게 맞네. 그 외에 몇 가지 더 첨가하기는 했지만.”

그러더니 사양 말고 마시라는 듯 내게 손짓했다. 나는 그 잔을 빤히 쳐다보다 한입에 삼켜 버렸다.

이미 영약으로 경지가 오를 시기는 진작 지났는데도 마시는 순간 상당한 양의 마력이 몸에 더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과연 영초 중에서도 최상위급으로 꼽히는 극명초라 해야 하나. 이 정도면 거의 반년은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양과 맞먹겠다.

그걸 곧바로 혼원력으로 치환시켜 버리고, 빈센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귀한 물건, 감사합니다.”

빈센트가 피식 웃었다.

“오히려 지금 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 미안하다 해야겠지. 잠시 파견 나온 곳일 뿐이다 보니 가진 것이 없더군.”

“이거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포인트도 벌었고.

빈센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굳이 겸손 부리지 않아도 추후 왕국 차원에서 보상이 갈 걸세. 아니, 그냥 이참에 아르곤으로 소속되는 건 어떤가? 줄 수 있는 대가도 훨씬 커질 텐데.”

“…….”

영입 제안은 아르곤 왕국 특징 같은 건가?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정중히 말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군요.”

“스승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아이언 경이 어떤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기로 한 것은 알고 있네. 허나 그게 제자인 자네의 문제는 아니지 않나.”

나는 뻔뻔하게 답했다.

“스승님의 뜻입니다.”

“흠…… 그럼 어쩔 수 없군. 더 곤란하게 하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빈센트는 입맛을 몇 번 다시고는 근처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리고 정말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툭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혹시 ‘재앙’에 대해서 좀 아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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