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14화 (114/225)

너의 코드가 보여 (114)

깡!

당연한 얘기지만, 공격은 매우 손쉽게 막혔다. 발록이 따로 뭘 할 것도 없이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몸에 맞고 튕겨져 나간 거다. 놈은 기분이 나빠진 듯 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제논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따져 왔다. 내가 만약 그보다 약했다면 검이라도 뽑아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나! 아주 아이언의 제자라고 세상 여기저기에 광고하고 싶어?”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긴, 아이언이었다면 딱히 이유가 없어도 공격했을 것 같기는 하다. 내가 그런 취급을 받은 건 좀 충격이기는 하지만.

나는 굳이 대꾸하지 않고 발록의 아래 부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행들의 시선이 전부 그 끝을 따라갔다.

“대체 뭘 보라는…….”

제논 역시 짜증 내는 얼굴로 고개를 돌리더니, 금세 표정을 굳혔다. 행실과는 관계없이 실력 자체는 3급 상위급이 확실히 맞는 모양. 적어도 보는 안목은 있는 것 같다.

베리안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발록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닌 척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군.”

그 말대로, 발록이 밟고 있는 바닥에는 명백하게 녀석이 발을 디디려 한 흔적이 존재했다.

제 딴에는 숨기려고 한 것인지 크게 남지는 않았으나, 놈의 힘을 버티지 못한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사방으로 뻗쳐 있던 것이다.

[SK-3-76]

발록의 기술 중 하나인 ‘붕괴 돌진’.

놈은 겉으로는 오만에 가득 차 여유로운 것처럼 굴면서, 실은 몰래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만약 아까처럼 방심하고 있는 상태로 맞이했다면 순식간에 최소 두 명은 죽었겠지. 싸우기도 전부터 패배하고 시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는 녀석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2급은 단순한 몬스터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인간만큼의 지능을 가진 것은 아니나, 오직 전투만을 떠올리며 세월을 보내 온 놈들이니까.”

내 말에 모두가 꿀꺽 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아까 그대로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다들 짐작한 듯했다. 지금이라도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

나한테도 다행인 건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나는 좀 떨어져 있는 발록을 마주 보았다.

―그르르르…….

녀석은 내가 기습을 방해한 것이 아니꼬웠는지 내 쪽만 죽일 듯이 노려보는 중이었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괜히 위험 부담을 진 거 같기도 하고.

뭐 어쩌겠나. 어차피 할 일은 정해져 있는걸. 저놈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목적에는 변한 게 없었다.

―그르아아아!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발록이 돌진해 왔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날아온 것 같지만, 명백히 타이밍을 재고 한 공격이다. 이쪽의 경계심이 완전히 끌어 올려지기 전에 선수를 친 거다.

하여간 영악하기는.

베리안이 가장 먼저 달려나가 녀석을 맞이했다. 그리고 칼과 발록의 팔이 부딪힌 순간.

쾅!

베리안의 몸이 멀찍이 튕겨 나갔다.

죽지는 않았으나, 단 한 번의 격돌로 상당한 타격을 받은 건 분명했다. 슬쩍 보이는 어깨가 덜렁거리고 있었으니까.

비틀거리며 일어나자마자 포션을 들이붓기는 하는데, 대충 치료가 완료될 때까지 못해도 1분은 걸릴 거다.

윗 등급을 상대로 시간을 끈다는 건 이런 것이다. 그 누구도 2급의 공격을 두 번 이상 버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지 않은가.

교대로 돌아가며 부딪히면 되는 문제다.

사람들이 회복하는 속도보다 저 녀석이 우리를 쓰러뜨리는 게 더 빠르면 패배.

다음 타자인 제논이 똥 씹은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젠장, 생각보다 더 강하잖아.”

확실히, 나도 공격 한 번에 베리안의 어깨가 나가 버릴 줄은 몰랐다.

데이크나 이름 모를 기사도 아까보다 안색이 더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발록이 그에 아랑곳할 리가 없다. 녀석은 바로 제논의 검을 향해 팔을 뻗었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베리안 때보다도 훨씬 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제논은 벽에 처박혀 너덜거리는 몸에 포션을 뿌리고 있었다.

……저거 일부러 방어 느슨하게 한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타격이 좀 과한 거 같은데.

딱 적당한 부상을 입고 회복이 늦춰지면 그만큼 발록의 공격을 맞이할 횟수가 적어지는 거다. 그러니 그랬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란 소리다.

설마 제 목숨 걸고 도박을 했을 것 같진 않은데, 워낙 투덜거리던 놈이라 좀 의심 간다. 어차피 죽을 몸이라 생각하고 시도해 볼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뭐, 혹시나 일부러 그랬다 쳐도 딱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저놈한테는 별 기대도 안 했다.

나는 데이크가 앞으로 나서는 걸 보며, 속으로 외쳤다.

‘콘솔 창.’

[현재 포인트: 9,500]

예전 무영보를 익힐 때보다 오히려 늘어나 있는 포인트 수치. 던전에서부터 여기까지 발록들을 해치우며 포인트를 벌어 온 덕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사용하기 위해 아껴 뒀는데, 지금 같은 때가 아니면 언제 쓰겠나.

다른 건 전부 제쳐 두고, 바로 생각해 둔 기술부터 검색했다.

패링(A)

적의 공격을 알맞은 타이밍에 맞받아치면 타격을 반감해 주고, 상대에게 잠시 경직을 먹이는 패시브 스킬이다.

굉장히 유용하지만, 액티브 스킬이 아니기에 배우는 걸 미뤄 왔던 기술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내 검술 실력으로 저런 걸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상대 공격에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그걸 정확한 타이밍에 막아?

그야말로 헛꿈을 꾸는 것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 상대가 발록이라면…… 나도 사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저놈은 아무 수련도 없이 경지에 오른지라 등급에 비해 공격이 단순하고, 나는 발록의 공격 모션을 하나하나 직접 제작한 개발자니까.

패링을 배우는 데 들어가는 포인트는 7,000점.

패시브 스킬은 액티브 스킬에 비해 포인트 소모량이 큰 편이라는 걸 감안해도 너무 비싸다. 그만큼 유용하긴 하지만……. 일단 좀 줄여 볼까.

‘SK-1-574.’

[SK-1-574의 획득에는 1천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습득하시겠습니까?]

패링의 하위 스킬인 검 맞부딪히기다.

C등급인 기술답게 포인트 소모가 굉장히 적은 편이었다. 패링과 같은 패시브 스킬임에도 말이다.

어쨌든, 검 맞부딪히기를 익히고 바로 이어서 생각했다.

‘SK-1-145.’

[SK-1-145의 획득에는 3천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하위 기술인 SK-1-574가 존재합니다.]

[SK-1-574를 SK-1-145로 진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경우 1천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진화하시겠습니까?]

패링의 바로 아래 등급 스킬인 반격.

이걸로도 충분히 쓸 만한 기술이나, 저 정도 적을 상대로 하기엔 조금 아쉽다. 반격한다고 해도 내 공격이 제대로 먹혀들지도 않을 테고.

‘SK-1-74.’

[SK-1-74의 획득에는 7천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현재 하위 기술인 SK-1-145가 존재합니다.]

[SK-1-145를 SK-1-74로 진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경우 2천 5백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진화하시겠습니까?]

나는 속으로 씨익 웃었다.

‘진화한다.’

총 들어간 포인트가 4,500점. 그냥 배울 때에 비해 2,500점을 아낀 셈이다.

제대로 익혀진 게 맞는지 잠깐 확인한 뒤,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데이크는 진작 나가떨어진 건지 보이지 않고, 이름 모를 기사가 발록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미 몇 번이고 들어 왔던 굉음을 내며 기사의 몸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마침 베리안이 있는 곳 근처기에 그쪽을 한 번 살펴봤다. 아직 팔이 회복되려면 한참 멀어 보인다.

어차피 완전히 나은 뒤 교대하는 건 염두에 둔 일도 아니지만…… 이 페이스대로라면 앞으로 2분도 못 버틸 것 같다는 게 문제다.

베리안도 같은 생각인지 표정이 어둡다.

그때, 앞에서 비웃음 같은 게 들렸다.

―그르르르…….

어느새 다가온 발록이 근처에서 입꼬리를 올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눈 돌린 건데 빠르긴 진짜 빠르네.

혹시나 싶어서 흑철검의 능력을 사용해 봤지만, 먹히는 기색도 없다. 2급 상대로는 무리라는 거지.

예상하고 있던 일이어서 크게 아쉬움은 없었다.

내가 잠깐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발록이 돌진해 왔다. 나는 차분히 녀석이 움직이는 동작을 관찰했다. 그리고 발록의 팔이 내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순간. 검을 놈에게 맞부딪혀 갔다.

* * *

‘완치되려면…… 10분 정도인가?’

베리안이 이리저리 뒤틀리고 있는 어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나마 신전에서 가져온 최상급 포션이기에 이 정도지, 웬만한 신관은 치료할 엄두도 못 낼 상처다.

그 사실이 전혀 위안이 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대로면 금세 전멸하겠군.’

그건 진작 각오한 바이기에 사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전멸까지 걸리는 시간이지. 그들끼리 3분도 버티지 못한다면 피해가 예상보다 몇 배는 더 커질 거다.

바로 그때, 남은 기사가 하나 더 근처에 떨어졌다. 베리안이 얼굴을 굳혔다.

‘아이언의 제자…… 단테 경만 남은 건가.’

4급이면서 3급 중에서도 강한 편인 데이크 경을 이긴 자.

믿을 수 없이 놀라운 업적이긴 하나, 그렇다고 발록의 공격을 버틸 순 없을 거다. 그들 모두와 같이 한 방에 나가떨어지겠지.

그럼 바로 본인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지금 상태에서 아까와 같은 타격을 다시 받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팔은 쓰지 못하게 될 테고, 최악의 경우 단 두 번 만에 전투 불능이 될 수도 있겠지.

그는 이를 악물고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회생단(回生丹).

흐릿해진 의식을 돌려놓고, 신체의 고통을 잊게 해 주는 효능이 있는 알약이다.

상당히 이로운 효과긴 하지만…… 그에 비해 후유증이 굉장히 심각한 편이다. 5분의 지속 시간이 끝나자마자 신체 한 곳이 영구적인 결손을 입으니까.

제정신 박힌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사용할 이유가 없겠지.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예외다. 당장 수명이 5분이 안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베리안은 한동안 그걸 바라보다가, 다시 발록에게 시선을 돌렸다. 놈은 단테의 바로 앞에 서서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단테 경이 날아가면 바로 약을 삼켜야겠군.’

지금 당장 먹어도 시간은 충분할지 모르나, 일단 최대한 신중하고 싶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지금 상태로 5분을 버틸 수도 있으니까.

‘그럴 리 없겠지만.’

베리안이 피식 조소하며 회생단을 손에 꽉 쥐었다.

그가 알약의 감촉을 느끼면서 상황을 주시하는 찰나.

발록의 팔과 단테의 검이 충돌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리안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큼지막하게 커졌다.

챙!

여태까지 단 한 명도 버텨 내지 못한 발록의 공격을, 단테가 검으로 튕겨 내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