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12)
발록들이 선택한 건 차륜전이다.
구멍에서 버티면서 일부만 나와 습격해 오는데, 확실히 여태까지 다른 둥지에서 봐왔던 무지성 돌격과는 그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분명 2급 발록들이 지시해 둔 걸 거다.
녀석들이 진짜 무서운 점은 자체적인 힘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지휘관 노릇을 한다는 데 있다.
그런 발록들의 전략 앞에 안 그래도 방심하고 있던 기사들이 우왕좌왕 못 하는 건 어찌 보면 예고된 수순이라 할 수 있었다.
“으아악!”
발록의 손아귀에 잡힌 기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있는 힘껏 발버둥 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를 잡은 발록은 무려 3급. 4급의 기사가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아아악!
결국 기사는 속절없이 발록이 우글거리는 구멍 속으로 추락해 버렸다. 그 안에서 채앵. 칼 소리가 몇 번 들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끊겼다. 남은 건 발록들의 그르륵 거리는 웃음뿐. 굳이 안쪽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 기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뻔했다.
“젠장! 오스칼!”
“당장 진형 짜! 저 새끼들이 계속 하나씩 잡아채 가잖아!”
“날아다니는 3급 상대로 만들어진 진형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당황한 기사들이 그제야 대응에 나서려 했지만, 그게 그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다.
게다가 그들이 받아 온 훈련에도 문제가 있었다.
대부분 지상전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발록을 상대론 마땅한 대응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
나는 그 개판 5분 전인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래도 전투의 프로들인 만큼 냉정히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텐데……, 대체 얼마나 긴장을 풀고 있었으면 저 꼴이 나지?
“사, 살려 줘!”
그 와중에 근처에서 기사 하나가 더 잡혀가고 있었다. 저걸로 열 명째다. 나는 힘껏 점프해 그 발록의 팔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그르아아아!
절단된 팔이 땅을 뒹굴고, 그에 잡혀 있던 5급 기사도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만약 상대가 3급 발록이었다면 이리 쉽지는 않았을 거다. 4급 수준인 녀석이라 망정이지.
나는 감사하다며 인사해 오는 기사에게 대충 화답해 주고, 목소리에 마력을 담아 외쳤다.
“지금부터 조를 재편성한다! 같은 등급끼리 모이지 말고, 3급 4급 5급 모두 섞어서 형성해!”
현재 가장 큰 문제점은 같은 등급의 기사들끼리만 뭉쳐 있다는 점이다.
본디 비슷한 실력자들끼리 조를 짜는 건 전략적으로 이점이 많기는 하다. 전력을 계산하기도 쉽고, 어디 구멍이 생길 일도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런 난전의 경우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적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들이라면 말이다.
결국 5급이 모인 곳에는 4급 발록을, 4급이 모인 곳에는 3급 발록을 보내면 끝인 이야기다.
이건 그냥 맞춰서 잡아가 달라는 뽑기 기계가 된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하지만 기사들은 이 합리적인 제안에도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간단한 생각도 못 하는 저능아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확실히, 그런 식으로 진형을 짜면 저놈들도 이리 쉽게 접근해 오진 못 할 거야.”
“……근데 저 사람이 명령권자는 아니잖아.”
“2급 기사님들은 아직인가?”
그러면서 중앙 쪽을 슬쩍 본다. 그곳에선 2급 기사 둘과 2급 발록 둘이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당장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기사들은 바로 서로를 마주 보며 토론을 시작했다.
“베리안 경은? 그분이 3명령권자 아니던가? 국가기사잖아.”
“그분은 지금 저기서 3급 발록 두 마리와 혼자 싸우는 중이다.”
“그럼 4명령권자는 누구지?”
“그쪽은…… 모르겠군. 보통 거기까지 가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나는 그 꼴을 보며 다시 한 번 기가 차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 그딴 게 중요하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실제로 저들에겐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긴 할 것이다.
현대의 군대도 빡빡하고 엄격한 규율 속에 움직이는데, 이곳은 중세인 데다 개개인의 무력이 전차 급인 세계 아닌가.
3급 이상은 국가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철저한 곳이다. 그렇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상대적으로 많이 떨어지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걸 저들만의 문제로 돌릴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왕국에서 저렇게 수동적인 인간이 되도록 노리고 만든 체계니까.
이런데 내가 몇 번이고 더 지껄여 봐야 그냥 반감만 살뿐이다. 지휘 체계니 뭐니 뭣도 모르는 놈이 말만 많다 하겠지.
결국 한 백 명 정도는 죽어야 정신 차리겠네. 속으로 한숨을 쉬며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옆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 하나! 당장 저 말대로 하지 않고!”
데이크였다. 녀석이 화난 기색으로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조 재편성 권한은 각 3급에게 위임한다. 지금부터 5분 내로 조 형성해!”
그 말에 다른 기사들이 데이크를 돌아봤다.
“데이크가 4명령권자였나?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없는데.”
“실력이 뛰어난 편은 맞지만, 경력이 좀…….”
나는 솔직히 왕국이 만든 체계에 조금 감탄했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저렇게 돌대가리처럼 만들어 놓다니.
데이크는 담담한 얼굴로 다시 외쳤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베리안 경에게 위임받았다. 못 믿겠으면 가서 직접 물어봐.”
그러면서 데이크가 베리안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베리안은 여전히 발록 두 마리를 상대로 정신없이 싸우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저기까지 가서 그런 사소한 걸 질문할 수 있는 강심장인 인간이 있었다면 진작 명령 없이도 움직였을 거다.
결국 3급 기사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뭐, 일단 말은 맞는 말이니까.”
“4급 셋, 5급 여섯은 당장 조를 형성해서 내 앞으로 모여라!”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명령에 맹목적인 만큼 적극성은 떨어지지만, 일단 지시가 내려지자 행동하는 건 빨랐다.
어찌 보면 생소할 조를 새로 짜는 데 3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바로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악! 살려 줘!”
“4급 발록입니다! 로빈 경!”
“저놈은 내가 맡겠다. 나머지는 계속해서 주위를 경계하도록.”
결국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발록들은 기사들을 잡아채 가는 것을 포기했다.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해 역공을 당하는 비율이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저러면 한 쉰 정도는 더 살겠는데.
나는 태연한 얼굴로 전장을 보고 있는 데이크에게 말했다.
“의외로 거짓말이 꽤 능숙하군.”
“……티 났습니까?”
“아니. 왕국의 명령 체계에 대해서 조금 알 뿐이다.”
아르곤의 지휘 순위는 제일 먼저 기사의 등급, 그다음은 국가기사 자격의 여부, 마지막으로 경력에 따라 결정된다.
이게 워낙 애매하다 보니 저들도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적어도 3급 치고 꽤 젊은 편인 데이크가 4명령권자일 리는 없었다.
데이크는 어색하게 웃었다.
“저희 체계에 대해 잘 아시나 보군요. 혹시 전투 끝나고 이 사실이 밝혀지면 군법에 회부될까요?”
“아니.”
“휴. 다행이군요. 솔직히 말하면서도 조금 쫄렸습니다만…….”
“명령권을 거짓으로 꾸며 내는 건 현장에서 즉결 처분 대상이다. 군법에 회부될 일이 아니지.”
내 말에 데이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는 그걸 보며 피식 웃었다.
“원래라면 그렇긴 하지만…… 누가 봐도 타당한 명령이었던 데다, 쌓은 공도 있으니 어쩌면 봐주지 않겠나?”
“……어쩌면이요?”
“나야 확실히 알 수가 없지. 내가 그걸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건 아니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데이크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아버지니 어머니니 중얼거리는데, 아마 유언 같은 걸 남기나 보다.
나는 검을 들어 올리며 담담히 말했다.
“일단 저놈들부터 정리하지. 쌓은 공이 클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아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지금은 그게 최선이겠네요.”
그리고는 데이크가 바로 발을 박차고 나섰다. 아마 이미 대부분 조를 결성했다 보니 별동대 같은 식으로 나서려나 보다.
거의 국가기사에 버금가는 실력인 만큼 그게 가장 효율이 좋긴 할 거다.
아무래도 즉결 처분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나 본데…….
내가 말한 것은 사실이긴 하나, 실은 거의 유명무실한 규율이다. 그런 경우가 전혀 없다 보니 아는 자가 드물기 때문이다.
나는 3급 발록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데이크를 바라보았다.
“흐앗!”
굉장히 필사적인 게, 정말 목숨이라도 달린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
아무래도 겁을 너무 줬나? 좀 과했던 것 같기도 하고.
뭐, 열심히 싸우면 피차 좋은 거지.
나도 저 모습을 본받아 발록들을 해치우기로 했다.
데이크는 얻을 것도 없이 저러고 있는데, 나는 포인트까지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저보다 못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을 마치자마자 바로 발을 박찼다. 목표는 베리안이 붙들고 있는 두 마리의 발록이다.
그는 두 놈을 상대하면서도 오히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과연 국가기사다운 실력이라 해야 하나.
저 정도면 그냥 가만히 놔둬도 5분 안에 혼자 이길 거 같긴 한데…… 아무래도 내가 도와주는 편이 더 좋겠지. 어차피 포인트도 받아야 하고.
나는 무영보를 이용해 발록의 뒤로 돌아갔다.
―그르르륵?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발록이 의문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못했다. 베리안이 앞에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녀석의 목을 베는 건 정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스걱!
[평범한 업적! / 「조금은 노력한 결과!」]
[이 정도면 간신히 자격은 되겠습니다.]
[당신에게 포인트 100점이 부여됩니다.]
“…….”
어째 저번에 메시지가 이상하게 나온 뒤로 계속 사설이 들어가는 느낌인데. 기분 탓인가?
일단 무시하고 연이어 다른 발록을 베어 버렸다. 역시 같은 메시지가 떠오르고, 포인트가 부여됐다.
베리안이 숨을 몰아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고맙다. 신세를 졌군.”
“나 좋자고 한 일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발록을 벤다고 본인에게 좋을 것이 있나?”
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히 쓸데없는 말 덧붙였네.
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얼른 다른 자들을 도와야 하지 않나? 생각보다 여유가 넘치는군.”
“……확실히 그 말대로야. 인사는 나중에 다시 하지.”
베리안이 곧장 발을 박차 다른 곳으로 향했다.
……다음부턴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해야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중요한 2급 간의 싸움은 생각보다 오래 끌릴 것 같다. 기사들이 우위에 있는 건 맞으나,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싸우는 탓에 발록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결국은 우리 쪽이 이길 것이다. 시간은 조금 끌리겠지만 말이다.
그 외의 전장도 저 모습과 비슷했다. 일단 차륜전이 막히자 발록들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가면 무난하게 이기겠네.
그리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던 순간.
나는 입구 쪽에서 보이는 코드에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MON-2-14-3]
2급의 발록이 한 마리 더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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