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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107화 (107/225)

너의 코드가 보여 (107)

코드를 대충만 훑어도 100마리는 돼 보인다. 대부분은 갓 태어난 5급이지만, 청소년기에 다다른 건지 중간중간 4급도 몇 마리 껴 있다.

질풍노도 시기에 바위도 깨부수는 힘을 가진 괴물이라니. 악마라는 칭호는 쟤네한테 붙이는 게 옳지 않을까.

그보다…… 설정대로라면 분명 3급이 하나는 있을 텐데, 어디 간 거지?

생각하기 무섭게 남쪽에서 발록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크기만 봐도 다 자란 성인이다.

그 품에는 인간의 신체를 가득 안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애새끼들한테 맡기긴 불안해서 직접 사냥을 다녀온 모양이다.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놈이 구멍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저건…… 던전에서 봤던 마물이군요.

“데이먼은 기억 못 하더니 저건 또 생각 나나 봐?”

―워낙 특이한 생명체였으니까요. 지성이 거의 없는데 자라는 것만으로 저렇게까지 강해지는 생물도 보기 드뭅니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하다.

강함과 지적 능력이 무조건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보통은 그 공식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같은 마물이어도 종류에 따라선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종족도 있고. 오히려 발록처럼 크륵키륵 대고만 있는 녀석들이 드문 편이다.

“머리로 보내야 할 열량을 몸에다 몰빵했나 보지 뭐.”

―마스터는 안 그런 거 같으면서도 가끔씩 굉장히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지시는 군요.

“너 내가 대체 얼마나 복잡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 그보다, 지금 나한테 개기는 거니 시바야?”

―전혀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렇게 느끼셨다면 바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잘못했다는 듯 뱃머리가 연속해서 반짝거린다. 사실상 항복 선언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죄는 그렇다 치고, 아까 했던 말은 진짜야. 열량은 모르겠지만, 마력은 머리가 아니라 몸통 쪽에 집중돼 있거든.”

예전 유적지에서 실베스터가 머리를 자르면 죽는 게 약점이라 얘기한 것도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란 소리다.

실제로 머리가 제일 약한 편이긴 하니까.

스바는 내 말에 한참을 생각하더니, 갑자기 물었다.

―한데, 지금 시대에는 저런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편입니까?

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오랜만에 깨서 본 첫 마물도 발록 다섯 마리였던 데다가, 이번에는 저리 둥지 튼 모습까지 보고 있으니 말이다.

“흔한 편은 아니야.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말입니까?

“그래.”

스바는 의아해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는 굳이 부연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는 저절로 알게 될 얘기니까.

―……말하고 싶지 않다면 별로 상관없습니다만, 그보다 지금 더 중요한 건 그 흔치 않다는 마물이 저렇게 둥지까지 틀고 있는 이유겠군요.

“아, 그건 이미 알고 있어. 그러니까 별로 신경 안 써도 돼.”

―……이미 알고 계시다고요?

“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것도 안 알려 주면 진짜로 삐질 거 같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수백 년간 봉인돼 있던 미친놈이 키우던 애완동물 같은 거거든. 안에서 할 것도 없으니 쟤네 번식이나 시켰나 봐. 녀석이 풀려나면서 저것들도 같이 나온 거고.”

―……저런 괴물을, 애완동물로요?

“세상엔 특이한 놈들이 많으니까.”

―특이하다고 될 문제가 아닌 거 같습니다만…….

스바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해도 뭘 어쩌겠나, 내가 키우는 것도 아닌데.

“그보다 지금 충전율 몇 프로야?”

―현재 85프로입니다.

많이도 채워 뒀다. 내가 그동안 꾸준히 채워서 10프로 간신히 넘겼었는데, 그 단시간에 저런 수치라니.

아카데미 기억이 진짜 어지간히도 트라우마로 남았구나.

“그럼 마격포 발사에는 몇 프로나 소모돼?”

원작에서는 그런 게 있다 정도로만 표현 돼서 정확히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략 50프로 정도 소모됩니다. 그리고 한 번 쓰고 난 뒤에는 일주일간 재사용이 불가능합니다.

“그건 또 왜.”

―한 번 사용하면 포에 무리가 가는 데다, 수복이 그만큼 힘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수리에도 충전이 10프로 정도 소모됩니다.

한 번 쏠 때마다 총 60프로의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거다.

이거 가성비가 영……. 원작에서 칼페온이 사용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은데.

기사 수백 명이 달라붙어 충전시킨 결과가 약 90프로다. 포 한 번 날리는데 그 3분의 2를 사용한다고 치면, 상당히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뭐, 나는 사실상 꽁으로 받은 연료이니만큼 아깝진 않았지만.

“일단 준비해 줘.”

―예. 목표는 저 둥지가 맞습니까?

“응.”

말이 끝나기 무섭게 뱃머리 쪽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응집됐다. 예전 리카르도가 유리컵에 담았던 마력에 버금갈 정도. 새삼 혼자서 그런 힘을 낸 그 인간이 얼마나 강한 건지 실감이 난다. 심지어 그건 전력도 아니었지 않은가.

아직 나도 갈 길이 멀다는 거겠지.

그 사실에 살짝 혀를 차고 있는데, 발록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됐다. 하긴, 기운이 이렇게나 모였는데 눈치 못 챈다는 게 더 웃기긴 하다.

―지금 발사할까요? 더 끌었다간 표적들이 흩어집니다.

그 말에 조금 뜸을 들였다. 녀석들이 고함을 지르며 날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놈들은 답지 않게 공동체 생활을 중시한다는 설정이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조금 기다렸을 때 밀집을 이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아아아!

그리고 바로 그 예상이 맞았다. 발록들은 금세 밀집 대형을 만들었다. 지성 없는 놈들인 만큼 오와 열을 맞춘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근육질들이 그렇게 모여 있으니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껴지긴 한다.

그래 봤자 지금은 그냥 잘 모인 표적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르륵 대며 다가오는 녀석들을 바라보고, 덤덤히 말했다.

“발사.”

위이이잉.

콰앙!

응집된 에너지가 순식간에 발록들을 휩쓸었다. 비명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찬란한 빛이 그마저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곧이어 그 광명이 모습을 감추고.

―그르르르…….

“……좀 미묘한데.”

발록은 대략 30여 마리가 남아 있었다. 선두의 3급은 상당히 타격을 받은 모습이긴 했지만, 활동을 못 할 정돈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 뒤쪽에 있는 녀석들은 거의 다치지도 않았다. 앞의 놈들이 충격을 상쇄한 탓이다.

5급 70여 마리를 일소한 게 대단찮은 일이란 건 아니다. 그래도 들어간 마력을 생각해 보면 조금 아쉬운 게 사실 아닌가.

‘오리진’이었으면 같은 양으로 저 세 배는 해치웠을 텐데.

―본 함은 직접전투용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뭐라고 한 적 없는데.”

―표정이…….

스바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왜 저러지. 괜히 미안하게.

“너는 그…… 뭐냐, 하늘도 날 수 있고, 크기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고. 확실한 장점이 있지.”

―두 가지뿐입니까?

“음…… 하늘을 날면서 작아질 수 있는 거?”

―……그건 불가능합니다.

“미안. 진짜 몰랐어.”

낙담한 기색이길래 재빨리 사과했다. 설정에 써 놓지는 않았어도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러고 있어 봤자 분위기만 암울해질 거 같았기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역시 네가 빠르긴 세상에서 제일 빠르지 않겠어?”

―……그건 그렇지요?

“응. 그보다 일단 그 빠른 속도로 자리 좀 벗어나 봐. 저것들 발광하면서 날아온다.”

―알겠습니다.

확실히 스바가 다른 건 몰라도 하늘을 나는 속도 하나만큼은 제일이었다. 발록은 날갯짓이 꽤 빠른 편인데,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졌으니 말이다.

포는 뭐…… 안 쓰면 그만이지. 이게 뭐 SF게임도 아니고.

그렇게 1분 정도 나아갔을 때, 불쑥 말했다.

“여기서 내려 줘.”

―예?

“여기서 내려 달라고.”

뱃머리가 연속해서 반짝인다. 짐작해 보자면, 무슨 개소리냐는 뜻일 거다.

―아직 발록들의 추격권 안입니다.

“대신 거리는 차이가 나지. 3급이 다른 애들보다 훨씬 빠르잖아.”

―……혹시 각개 격파할 생각이십니까?

스바의 장점을 하나 더 찾았다. 바로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유적지에서 3급 발록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알고 있으나, 아직 4급이 4마리, 5급이 20여 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개 격파 한다는 거지.”

―3급을 5분 안에 해치우지 못한다면 금세 다른 4급 발록들이 합류할 겁니다. 그리고 또 1분 후면 5급들이 합류하겠지요. 그럼 승산이 없습니다.

친절한 설명 고맙고.

요컨대 3급을 혼자 5분 안에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이 되냐는 뜻이다.

“문제없어. 재생 능력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저 녀석 너한테 포 맞은 거 아직도 회복 못 했잖아. 거의 반병신이구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괴물을 5분 안에 잡는다는 건…….

“일단 내려 줘.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혹시 안 되겠다 싶으면 바로 탑승하셔야 합니다.

“그래. 걱정 마라.”

태연스레 답하자, 스바가 고도를 천천히 낮췄다. 어차피 내가 찾아가는 것도 아니니 서두를 것도 없긴 했다.

그렇게 지면에 내려서고 얼마나 지났을까. 발록 한 마리가 그르륵 소리를 내며 근처에 착지했다. 얼굴은 이미 나를 골백번은 씹어 먹었을 것 같은 표정이다.

그걸 보며 씨익 웃었다.

“어서 와. 꽤 열 받아 보이네. 혹시 포 맞고 뒤진 애들 중에 너랑 붙어먹던 놈이라도 있었니?”

―그르르륵!

“아, 미안. 네가 놈인지 년인지 잘 모르겠어서. 너희 종족은 위고 아래고 근육으로 가득 차서 성별 구분이 쉽지 않더라. 혹시 틀렸어도 별로 미안하진 않고.”

―그라아아아!

발록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개체에 따라 분위기를 읽는 경우도, 아닌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녀석은 지금 이성을 완전히 잃었다는 거다.

안 그래도 멍청한 녀석이 저렇게 돼 버리면 그 이후 할 일은 간단하다. 바로 무지성 돌격이다.

아니나 다를까, 발록은 눈깔을 뒤집고 내게 달려왔다. 날아서 제공권을 잡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선택조차 잊은 모습이다.

그렇다고 우습게만 볼 수는 없었다. 앞뒤 재지 않고 하는 공격인 만큼 그 세기나 속도가 어마어마했으니까.

거센 기세로 다가오는 주먹을 무영보로 슬쩍 피했다. 이제는 숨 쉬듯 당연한 것처럼 몸이 움직이고, 어느새 눈앞에는 발록의 뒤통수가 보인다.

서걱!

그 목을 베는 데는 3초면 충분했다.

―…….

멀리서 스바가 말없이 뱃머리를 몇 번이고 반짝이고 있다. 저건 경악의 표현이다.

그쪽을 일별하고 발록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이성을 잃었다지만, 생각 이상으로 쉬운데. 5분은커녕 1분도 안 걸린 거 같다. 무영보가 그만큼 숙련된 탓인가.

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자니, 파드득 파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도착한 4급 발록들이다. 싸우는 시간보다 사색에 잠긴 시간이 더 길다니.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어서들 와라. 많이 늦었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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