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06)
으, 디러.
오우거의 잔해가 온몸에 튀어 있다. 피에 내장에, 게다가 저건…… 뭔지 생각하지 말자.
살짝 몸을 털어 대충 잔해들을 떨쳐 냈다.
기본적인 마법이나 정령술이라도 좀 배워 둬야 하나 싶었다. 굳이 전투용까지 갈 것 없이 자잘하게 쓸 곳이 많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지금 같은 때 몸을 씻을 수도 있고, 굳이 식수를 소지하고 다닐 필요도 없고. 그런 용도로 고급 기술 익히는 건 또 어떤가 싶기는 한데.
아무튼, 어느 정도 몸이 정돈된 다음 차분히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든 몬스터든 관계없이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덕분에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다.
이건 잘된 일이다. 괜히 사람들과 난전을 벌이고 있으면 나만 싸우기 불편하니까.
나는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몬스터의 숫자는 대략 오백.
대부분은 고블린 오크 같은 잡것들이다.
그럼……스바가 내려올 때까지 한 절반 정도는 줄여 놔 볼까.
그렇게 마음먹고 바로 탓, 발을 박찼다.
휘익!
“크웨에엑!”
“끼에엑.”
녀석들은 내가 검을 대놓고 휘둘러도 반항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냥 최대한 거리를 벌려 도망가려 할 뿐. 본능적으로 사는 놈들이다 보니 단번에 힘의 격차를 깨달은 거다.
현명한 판단이긴 하다. 나는 진짜로 얘네가 수만 마리 있어도 혼자 상대할 자신 있으니까. 애초에 공격이 내 몸을 뚫지도 못할 건데 아무리 숫자가 많아 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지만 내게는 그리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대응하려는 의지도 없이 사방으로 날뛰어 버리는데, 일일이 찾아가 베자니 이만큼 귀찮은 일도 없었다.
그냥 뇌정석 힘으로 다 날려 버리고 싶네. 리안과 특정될 가능성이 너무 높아서 참겠지만.
무영보야 대충 같은 무술 배웠다 우긴다 쳐도, 똑같은 속성의 힘을 다룬다고 우기는 건 조금 무리 아닌가.
뇌정이라는 속성 자체가 흔한 것도 아닌 데다, 애초에 속성의 힘을 마력에 녹일 수 있는 인간 자체가 없으니까.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몬스터들은 기계적으로 죽여 나갔다. 정확히 절반쯤 줄어들자, 스바에서 기사들이 우수수 뛰어내렸다. 그 후 현장이 정리되기까지는 정말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무려 200명이나 되는 기사들 아닌가. 오우거가 수백 마리여도 금세 정리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이다. 사실 저들을 모두 투입하는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란 소리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몇몇 기사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겨우 이런 일에 우리가 전부 내릴 필요라도 있나?”
“그러게 말이야. 그냥 두셋만 내려서 해결하고 나머진 그대로 본부로 배 타고 가도 됐을 텐데.”
“혹시 그냥 거기까지 가는 마력이 아까워서 그런 건…….”
대화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근처에 있던 데이크가 득달같이 끼어들었다.
“자네들! 지금 대체 뭐 하는 건가?”
“데, 데이크 경.”
“대가도 받지 않고 여기까지 데려다주신 분이다! 그런데 감사 인사는 못 할 망정, 모함이라니!”
건들건들한 자세로 투덜거리던 녀석들이 대번에 자세를 바로 했다. 3급 중에서도 유망주인 데이크에게 밉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일 거다.
“망설이는 사이 마을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다칠까 싶은 마음에 그랬을 거라곤 대체 왜 생각을 못 하는가? 저 높은 허공에서 직접 뛰어내리는 모습까지 봐 놓고도!”
“죄, 죄송합니다! 저희 생각이 짧았습니다.”
“내게 사과해서 뭐 하겠나.”
그러더니 데이크가 몸을 휙 돌렸다. 너희 따위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다. 기사들은 당황한 얼굴로 그런 녀석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테 경. 저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데이크 경 말대로 돈 한 푼 받지 않고 수고해 주신 걸 아는데도…… 저희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
나는 눈앞의 뒤통수 두 개를 떨떠름하게 바라봤다.
사실 쟤네들 말이 맞았던 것이다.
솔직히 스바 충전도 끝났는데 저 돼지들을 태우고 본부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연비가 너무 나쁘지 않은가.
본인들 무게도 무게지만, 놈들 대부분이 우리 상회에서 나온 흑철석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도대체 저것들 근수가 몇이나 나올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사실 저런 인간 수백 명을 태우고 떴다는 사실만으로도 스바가 얼마나 대단한 유물인지 증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게다가 대가를 안 받았다고 하기도 좀 그랬다. 500골드보다는 쟤네가 스바에 채운 마력이 훨씬 가치 있는 재화니까.
그런저런 이유들로 결국 나는 그냥 괜찮다고 한마디 하고 말았다.
기사들은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질려 버린 내가 그만 좀 꺼지라고 하자 그제야 자리를 떠났다.
사과도 어지간히 해야지 진짜.
작게 한숨 쉬고 있는데, 데이크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저들은 제가 나중에 다시 한 번 교육시켜 두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정말로.
하지만 데이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 시기가 기사들이 가장 교만해지기 좋을 때입니다. 초장에 잡아 두지 않으면 금방 특권의식에 찌들어 버리지요. 본인들이 누구 덕에 칼질만 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는 생각도 못 하고요.”
“흠…….”
그것 참 옳은 이야기라 뭐라 더 할 말이 없네.
내가 굳이 걔네들 편 들어줄 이유도 없고.
검을 수납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나는 이제 그만 가 보지.”
“예? 가신다고요?”
“그래. 애초에 계약은 너희를 여기서 데려다주는 것으로 끝이니까.”
데이크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요. 그래도 이렇게 바로 가실 거라곤 생각 못 했습니다.”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
“음……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녀석이 내게 경례를 했다.
“여기까지 태워주신 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시려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잘 풀리길 바랍니다.”
“너희도 웨이브, 잘 막길 바라지.”
고개를 끄덕여 인사해 주고 마을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주민들이 겁먹은 얼굴로 기사들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중 나와 눈을 마주친 중년 남성 하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혹시 아르곤의 기사님들이십니까?”
대표해서 나온 거 보니 아마 촌장쯤 되는 인물인가 보다.
“저들은 기사가 맞고, 나는 아니다.”
“아…… 기사님이 아니셨군요. 그런데도 아무 관계 없는 저흴 구하기 위해 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신 겁니까?”
그러면서 감동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솔직히 아저씨가 그런 식으로 응시하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게다가 괜히 오버하면서 떨어진 건 역시 연비 이유가 더 크기도 하고.
나는 그 눈길을 외면하면서 말했다.
“그보다 물어볼 게 있다.”
“아, 예.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뭐든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저 몬스터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나?”
“처음 온 방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촌장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그 당시 현장에 없었는지 다른 마을 사람 몇몇을 불러왔다. 그리고 각각의 얘기를 종합해 교차검증까지 마쳐 버렸다. 꼼꼼한데.
“확인한 결과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동쪽에서 몰려온 거 같습니다.”
“그쪽엔 뭐가 있지?”
“딱히 대단한 건 없습니다만…… 따지자면 황량한 황야 하나가 다지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생각할 때 나오는 버릇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하군요. 그쪽엔 몬스터도 별로 없는데, 갑자기 이렇게 많은 녀석들이 몰려오다니.”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곳인가 보지?”
“예. 말씀드렸다시피 아무것도 없는 곳인 데다, 딱히 다른 마을이나 도시로 통하는 도로도 아니거든요.”
이 정도 들었으면 충분하다. 조건이 내가 생각한 것들과 똑같으니까.
남은 대화는 데이크와 하라며 얼굴을 알려 주고, 나는 바로 스바에 올라탔다.
신문물에 놀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배에 집중된다.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같이 타고 왔던 기사들의 시선도. 한 번 경험한 거로는 아직 적응이 안 되나 보다.
그들을 일별하고 배를 띄우자, 놀란 함성들이 갑판 위에까지 울려 퍼졌다.
“저, 저건 하늘의 신 닉스께서 내리신 신물인 건가?”
“천공의 기사, 천공의 기사다!”
……이거 뭣도 모르는 변방 마을에 타고 나타나면 신 행세도 할 수 있겠는데.
그보다 내 칭호는 대체 몇 개까지 늘어나는 걸까. 지금 당장 생각하는 것만 무려 4개다.
레이튼의 성자, 망국의 초신성, 아이언의 제자, 거기에 이제는 천공의 기사까지.
전부 싫지만, 어차피 불러야 한다면 한 개로 통일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이러다간 나도 못 외울 거야.
“후…….”
일단 다음부턴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좀 떨어진 데서 내리는 게 낫겠다. 이번에는 긴급 상황이라 어쩔 수 없기는 했지만.
더 있다가는 나를 하늘에서 강림한 닉스라고 몰아갈 것 같은 분위기인지라, 빠르게 뱃머리를 돌려 남자가 말했던 황야로 향했다.
함성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지고, 나는 그제야 남 눈치 볼 것 없이 마음 편히 난간에 몸을 기댔다.
* * *
남자가 말한 황야는 생각보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스바를 타고도 3분은 걸렸으니, 사람이 직접 오려면 못해도 10시간은 넘게 소요될 거다.
하긴, 이 정도로 떨어져 있었으니 유독 인적이 드문 거겠지.
―마스터. 그만 뱃머리를 돌릴까요?
“갑자기 왜?”
―탐색 결과, 주변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레이튼으로 향하는 방향인 것도 아니고요.
“그럼 탐지 범위 바깥까지 가 봐. 내 생각이 맞다면 분명 뭐라도 있을 테니까.”
내 말에 스바는 미심쩍어 하는 기색이었다. 배에 얼굴 같은 게 달려서 알아볼 수 있었다는 건 아니고, 그냥 뱃머리가 두 번 반짝이길래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나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입을 열었다.
“스바야, 너는 몬스터 웨이브가 왜 일어나는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활동할 때는 몬스터에 대해서 별로 연구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럴 거라 생각했다. 공백의 시대에는 몬스터를 그냥 조금 위험한 야생 동물처럼 취급했을 뿐이니까.
나는 주변에 떠오르는 코드가 없나 확인하면서 말을 이었다.
“보통은 필요한 것이 부족해서 시작돼. 식량이라든지, 거주지라든지. 놈들이 뭐 농사를 짓고 음식을 비축해 두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근처 마을을 습격하는 거야.”
걔네 입장에선 수렵 활동 비슷한 걸 거다.
“문제는 그게 아닌 경우지.”
―그게 아닌 경우…… 말입니까?
“그래. 몬스터들도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식량도 풍부하고 거주지도 있을 땐 굳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거든. 걔네도 기사 무서운 건 아니까. 생존이 걸린 게 아니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진 않아.”
오면서 코드를 본 결과, 먹이가 될 산짐승이나 거주지로 삼을 만한 동굴은 충분했다. 요컨대, 그런 이유로 습격한 것은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갑자기 위험을 무릅썼다면, 다른 생존 문제가 걸렸다는 뜻이겠지. 식량도, 거주지도 아니라면 그게 뭘까?”
―……압도적인 적에게서 도망치는 것이겠군요.
역시 똑똑하다.
나는 씨익 웃으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말벌집 같은 형태의 구조물이 휑한 황야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겉에 난 구멍들로 수십의 괴물들이 들락거리는 중이었는데, 분명 얼마 전 본 녀석들이랑 똑같이 생겼다.
근육질 몸에 커다란 박쥐의 날개.
[MON-3-14-1]
저 구조물은 바로, 발록들의 둥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