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04)
용의 피는 목에 걸리는 일 없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맛은 뭐, 녹즙에다가 탄산을 섞은 요상한 느낌이다.
“얼른 뱉게!”
오스워드가 창백한 얼굴로 다가와 소리쳤다. 내 등을 치려 하길래 슬쩍 몸을 뺐다.
“나는 괜찮다.”
“괜찮긴! 이제 10초만 지나도 몸이 붕괴될 거다!”
“10초 지났다.”
“조금 차이가 날 뿐이야! 지금이라도 토해 내!”
그러면서 오스워드가 내게 다시 다가왔다. 뭘 하려는 건가 두고 보는데, 내 복부로 발차기를 날리려 한다.
미친 건가. 아니, 마음은 알겠는데.
손을 들어 막고, 어깨를 으쓱였다.
“정신 차려라.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그럴 때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미 1분은 지났다.”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몸도 몇 번 털어 줬다. 멀쩡한 거 보라고.
“헌데 내가 지금 죽을 것 같아 보이나?”
오스워드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유리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군. 상했나?”
“그건 지금 확인해 보면 되겠지.”
“어떻게 말인가?”
“그거야 당연하지 않나.”
말하면서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오스워드는 나를 미친놈처럼 바라보았다.
내가 뭘 하려는 건지 단번에 깨달은 눈치다.
“……설마 내가 상상하는 방법은 아니겠지?”
“뭘 상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의 피가 주는 능력은 재생력. 이게 제대로 먹혔는지 알려면 어차피 방법은 하나뿐 아닌가?”
나는 검을 손등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일단 살짝 베어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초인’은 근육의 손상이나 혈관의 파열 같은 간접적인 타격은 쉽게 회복시켜 주지만, 직접 받은 상처에는 효과가 미약했다.
그런데 외상이 금방 치유된다면 용의 피가 제대로 먹혔다는 뜻 아니겠나.
그렇게 검이 피부에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오스워드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멈춰! 손목을 잘라서는 안 돼!”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황당해져서 검을 잡은 손이 뚝 멈췄다.
그는 그걸 보더니 안심한 듯 한숨 쉬었다.
“아무리 용의 피가 재생 능력을 극한으로 늘려 준다 해도, 절단된 신체를 붙여 주는 건 아니야. 일단 진정하게.”
“진정은 그쪽이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게 정말인가?”
그럼 누굴 또라이로 보나.
“오히려 내가 이해할 수 없군. 대체 누가 용의 피를 먹자마자 그런 극단적인 실험을 하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그랬다.”
오스워드는 뭔가 떠올리는 듯 눈을 감았다.
“400년 전, 용기사라 불렸던 에릭 경은 드래곤의 피를 용의 피와 착각해 마시고는 바로 자신의 팔을 잘라 버렸네. 제 딴에는 용맹함을 뽐내려 한 거겠지. 드래곤과 용의 차이점도 모르던 시절이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그때는 절단된 신체를 붙일 수 있는 신관이 없었다는군. 결국 에릭 경은 평생을 외팔이로 살아야 했네…….”
“…….”
그런 병신 같은 설정은 넣은 적이 없는데.
그걸로 끝이 아닌지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350년 전에는 박학다식이라는 칭호를 가진 에스파 경이 용의 피를 마셨지. 이번에는 착각한 것이 아니었어. 다만, 그는 어느 책에서 용의 피를 마시면 절단된 신체도 붙일 수 있다는 글을 본 것 같더군.”
“……그래서, 베었나?”
오스워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지식이 그만큼 고명하다는 걸 보여 주려 한 걸 거야. 그대로 손목을 베었고, 다시 붙지 않았지. 그때의 신관은 절단된 신체를 회복시킬 수 있어 장애는 겨우 피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박학다식이라는 칭호 대신 머저리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했네.”
“…….”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다. 용의 피는 이 세계의 다윈상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건가.
“아무튼, 잘 알려지지 않은 보물인 만큼 너무 과대평가 되어 있는 점이 있어. 뭐 목이 잘려도 다시 붙는다든가…….”
“그건 정말 아니군.”
“그렇지. 그러니 너무 용의 피만 믿고 나대지는 말게. 그건 어디까지나 회복에 도움을 주는 정도에 불과하니까. 신체가 절단되면 그냥 고위신관을 찾아가.”
“참고하겠다.”
“아, 그리고 혹시 살짝 베는 정도로 실험해 볼 거면 밑에 뭐 좀 받치고 하게. 피 묻으면 청소하기 골치 아파.”
꼬장꼬장하게 생겨서는 꼼꼼하기도 하지.
그 말대로 근처에 있던 접시를 가져왔다.
번쩍번쩍한 게 꽤 비싸 보인다. 이런 걸 써도 되나 싶었지만, 정작 오스워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사치를 즐기진 않으나 일부러라도 비싼 물건을 사 모은다는 설정이 있었지.
도박장 운영하는 사람이 검소하게 살면 오히려 손님의 신용을 받지 못하는 법이라던가?
뭔가 납득은 간다. 딱히 건전하다고 볼 수는 없어도, 어찌 보면 꿈을 파는 직업이니까.
도박장 주인이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으면 베팅할 마음도 싹 사라지지 않겠나.
어쨌든, 소유주가 허락한 거나 마찬가지기에 접시에 댄 채 손등을 살짝 베었다.
서걱.
일자로 난 상처에서 피가 살짝 흘러나온다. 검이 워낙 예리했기 때문인지 그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정도면 굳이 접시 댈 것도 없었겠는데 생각할 때쯤. 어느새 손등에는 생채기조차 남지 않은 채였다.
“……책에서 보아 온 것 이상으로 빠르군.”
그 광경을 같이 보고 있던 오스워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문헌이 잘못된 건가? 아니, 희석 없이 먹은 덕에 효과가 올라간 걸 수도…….”
“후자가 맞을 거다.”
정확히는 거기에 초인의 육체가 더해진 거지만.
“그 희석이란 것은 결국 용의 피의 효능을 낮추는 과정이니까. 원물로 먹으면 오히려 효과가 올라갈 수밖에 없겠지.”
“……원물로 먹은 자는 결국 몸이 붕괴됐다는 기록밖에 없어 비교가 불가능하군.”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오스워드를 보며, 나는 한 가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아까 경고를 들은 참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신체가 절단 돼도 다시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슬쩍 손가락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지만, 안 돼. 내가 한 이야기를 잊은 건 아니겠지?”
“……그냥 잠깐 생각만 했을 뿐이다.”
“실험해 보고 싶으면 적어도 고위신관 하나는 대동하고 해라. 그리고 내 방에서 하지도 말고.”
상식적인 의견이다.
레이튼 주교라면 가능할 것 같지만……, 일단 보류해 둘까. 당장 급한 것도 아니니.
아무튼, 여기서 더 볼일은 없었다.
나는 오스워드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도박장을 떠났다.
* * *
다시 모습을 바꾸어 여관으로 돌아오는데, 안에 익숙한 코드가 있는 것이 보였다.
쟤는 또 왜 왔지.
일단 나를 찾아온 것은 확실했기에 근처 골목에서 단테의 얼굴로 변경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 단테 경!”
데이크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나와 경기하고 진 게 얼마 전인데, 속도 좋아.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인사드리려고 왔지요. 토너먼트 끝나고 한 번도 못 만났지 않습니까. 아, 일단 우승 축하드립니다.”
토너먼트 끝난 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 시점에서 너랑 인연도 끝난 줄 알았는데.
물론 입으로 꺼내기에는 껄끄러운 말이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맙군. 헌데,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내 말에 데이크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기밀이라도 나누듯이.
“아뇨. 공적인 용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기선 조금 그렇고…… 방에 가서 대화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공적인 얘기?
나는 데이크의 요청에 알겠다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말을 꺼내 왔다.
“이번에 토너먼트 결승전이 왜 이리 빨리 끝났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선수들이 기권을 했다 해도, 그냥 조금 뒤로 늦추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대충 짐작 가는 게 있기는 했다. 애초에 내가 아르곤에 온 가장 큰 이유는 토너먼트가 아니라 다른 문제였으니까.
결승전이 늦춰지는 건 게임에서 나오는 설정이 아니지만……, 지금 시점이면 뻔하지 않은가.
“몬스터 웨이브 때문이겠지.”
내 말에 데이크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 괜한 소문 안 나도록 왕국에서 차단 중인 걸로 알고 있는데…….”
“독자적인 정보망이 있다. 그보다, 나한테 공적인 용무가 있다는 건 뭐지?”
“……독자적인 정보망이라. 하긴, 아이언 경의 제자시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데이크는 놀란 얼굴을 수습하고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 칼페온에서 들어온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아이언 님의 제자, 단테 경이 유적지에서 하늘을 나는 배를 얻으셨다고요. 혹시 사실입니까?”
“맞다.”
애초에 내가 내라고 한 소문이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크가 선망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듣기로는 거의 오리진에 버금가는 유물이 아니냔 소문이 돌던데…….”
“운이 좋았지. 그보다, 나에게 하려는 말과 그게 관계가 있나?”
“아, 제가 서두를 너무 길게 끌었군요. 죄송합니다.”
데이크는 큼큼, 헛기침하더니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왕국에서의 요청입니다. 현 도시에 있는 기사들 대부분이 웨이브를 막기 위해 소집되었는데, 하늘을 나는 배로 그 장소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느냐 물어보라더군요. 물론 보수는 따로 챙겨드릴 예정입니다.”
……이건 스토리 외인데.
원래 여기 있는 기사들은 이번 일에 소집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왕국은 이번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으니까. 굳이 토너먼트 열리고 있는 데까지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거다.
헌데 갑자기 대회에서 기권자가 우수수 나오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빨리 끝내서 얘네도 현장 투입하자고 결정이 났나 보다.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인원은?”
“예? 아, 혹시 받아 주시는 겁니까?”
“아직 아니다. 마저 듣고 생각해 보지.”
“아! 네. 바로 설명드리겠습니다.”
데이크는 기꺼워하는 기색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우선 총인원은 200여 명입니다. 5급이 120명, 4급이 60명, 3급이 19명, 그리고 통솔 격인 2급이 한 분이시죠.”
200명이라…….
여기서 추가한다고 원래 있던 병력을 빼지는 않았을 거다. 원작대로라면 거기도 기사 300명 정도는 있을 터. 합치면 기사만 500이라는 엄청난 숫자다.
“통상 일어나는 웨이브엔 이렇게까지 하진 않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상당히 크게 일어났나 봅니다.”
데이크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무리 그래도 이런 병력이라면 웨이브따윈 금방 끝마치겠지만 말입니다.”
“…….”
글쎄.
일어날 일을 이미 알고 있는 내가 보기엔 원래 생길 송장 300구에 200구를 더 늘린 꼴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태평한 데이크의 얼굴을 보며 내심 한숨 쉬었다.
원래 계획과는 좀 다르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나. 초기에 이렇게 많이 투입시켜 놓으면 원작보다는 피해가 적을 테니까.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태워다 주도록 하지.”
그게 너희한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데이크를 보며 씁쓸하게 생각했다.
내가 태워다 주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번 웨이브의 배후에는 바포메트가 있으니까.
기사 수백 명은 우습게 죽일 수 있는 그 괴물이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