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03)
[SK-2-46]
‘컴프레션.’
다리의 근육을 한계까지 압축시켜 속도를 한 차원 끌어 올리는 고위 기술. 자칫 잘못 사용하면 몸이 붕괴되는 수가 있는데, 데이크는 위태위태하지만 그걸 제대로 제어하고 있었다.
‘……5년이면 국가기사가 될 거라고?’
웃기는 소리.
저 수준이라면 3년 안이라도 가능할 거다.
리안은 데이크의 다리에 모이는 마력을 응시하며 긴장을 끌어 올렸다. 미리 알 수 있었던 건 다행인 일이지만, 저건 안다고 해도 막거나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보고 반응하면 늦는다.
‘역시 무영보밖에 답이 없어.’
그것도 보통 때처럼 쓰는 걸로는 안 된다. 상대가 어디서 어떻게 공격하는지 볼 수도 없을 텐데 그걸 무슨 방법으로 피하겠나. 무영보에 무슨 자동 회피 기능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빠르면 그냥 표적 위치를 조금 옮겨 주는 꼴이 될 뿐이다. 반대로 너무 느리면 그냥 멈춰 있는 과녁이 될 것이다.
둘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 정확한 타이밍에 움직여야 한다.
바로 데이크가 발을 박차기 바로 직전.
보통 사람이라면 처음 보는 기술을 상대로 그런 묘기를 부릴 수 없겠지만, 리안은 그저 피식 웃었다.
‘쉽지.’
데이크의 다리에 숫자가 모여드는 것을 차분히 응시했다. 10101……. 그것들은 허벅지와 종아리, 그리고 발목에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서로 섞이듯 회전하더니, 찰나 멈춘다.
‘지금!’
들숨이 6번.
리안의 몸은 그 순간 원래 있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왼쪽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데이크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빨라서 경기장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거다. 그를 눈으로 좇으려 하는 대신, 리안은 그저 숨을 깊게 내뱉었다.
날숨이 8번.
후우……. 컴프레션의 지속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위치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나름대로 잘 다루고는 있지만, 역시 아직은 미숙한 것일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데이크의 몸이 모습을 드러낸다. 리안은 다시 한 번 무영보를 펼쳐 그 뒤에 자리 잡았다.
“아쉽게 됐군.”
데이크의 옆얼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원래 실력만이라면 네가 이겼을 거다.”
뻐억!
목덜미를 가격당한 데이크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 * *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자넨 뭔가 보이나?”
“저걸 뭐 어떻게 봐. 7성급 마법 도구인 홀로그램도 못 따라가는데.”
“기사님들이라면 잘 알지 않겠나?”
그 말에 대다수의 기사들이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4, 5급에 해당하는 자들은 일반인과 다를 것도 없었다. 그들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건 똑같았으니까.
하는 수 없이 관중들의 시선이 3급으로 이름난 기사들에게 돌아갔다.
“흠, 흠. 대, 대단한 경기군. 안 그런가?”
“그래. 방금 데이크 경이 오른쪽으로 도약할 때가 특히 압권이었지.”
“……오른쪽? 정면 아니었나?”
“어,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그들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 움직이는 형체만 겨우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직접 상대한다면야 육감을 모두 사용해 느낌상이라도 파악이 가능하겠지만, 멀리서 보는 정도로는 이게 한계였다.
결국 사람들의 시선은 돌고 돌아 한군데로 모였다.
“…….”
3급 국가기사 베리안은 쏟아지는 눈빛을 묵묵히 견디다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뭐 색다른 게 있는 건 아니네. 그냥 둘 다 믿기 힘든 속도와 움직임으로 싸우고 있을 뿐이지. 아니, 그게 색다른 거긴 한데…….”
“그래서 대체 누가 이기고 있는 겁니까?”
“글세…….”
베리안은 떨리는 눈으로 무대를 바라봤다. 3급 국가기사인 그에게도 저 광경은 그리 명확히 보이지가 않았다.
형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확연히 알 수 있었지만, 결국 그것뿐이다.
무슨 동작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까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데이크는 그냥 빨라서 인식이 힘든 거였지만, 단테 쪽은…… 저게 뭔지 짐작도 안 간다.
분명 그리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정신을 차려 보면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위치가 달라져 있다.
그는 실전 경험이 굉장히 풍부한 편이었지만, 저것과 비슷한 기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길 수 있나?’
베리안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다.
답은 금방 나왔다. 이길 수 있다.
허나 멀쩡히 이길 수 있느냐 물으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팔 한쪽 정도는 줄 각오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쓰게 웃었다.
같은 3급도 아니고 한 단계 아래인 4급한테 이런 평가를 내린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대의 상황은 계속 진행되어 끝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베리안이 눈을 빛냈다.
“이제 결과가 나오겠군.”
그 말에 관중들의 시선이 경기장으로 집중됐다.
그리고, 그들은 곧이어 데이크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쿠웅!
“…….”
한동안 사람들에게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부분 경기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보지 못했으니 얼떨떨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관중석은 금세 요란한 환호 소리로 가득 찼다.
“……지금 데이크 경이 진 건가? 정말?”
“다, 단테의 승리다!”
단테에게 돈이라도 걸었는지 입이 찢어져라 웃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저 이 상황이 믿기 힘든지 경악한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단연 압권은 휴버트였다.
그는 거의 울면서 웃는 중이었다.
‘이길 줄 알았어……! 이길 줄 알았다고!’
휴버트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결국 본인의 선택이 옳은 거다. 그는 사회자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승리를 선언하는 것을 들으며, 단테를 숭배에 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갑 전 우승 상품은 우습게도 흑철석 무기와 갑옷 세트였다. 내가 파는 물건을 토너먼트 승리 보상이라고 받으니 기분이 좀 묘했다.
왕국에서도 인정한 제품이라는 것에 좋아해야 할까,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해야 할까.
나중에 단테 싸인 넣어서 토너먼트 우승 에디션이라 하면 웃돈 받아 팔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라 일단 스바의 갑판에 넣어 뒀다. 녀석의 축소마법은 안에 있는 물건에도 적용되니까.
움직이는 창고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이젠 진짜 중요한 일을 하러 갈 시간이다.
방을 나가기 전에 생김새부터 바꿨다. 요즘 단테 모습으로 나갔다간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한 걸음 떼기도 버겁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니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이 비친다.
완벽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기사 갑옷을 입고 있어도 모두들 그냥 평범한 아저씨로 인식할 거 같은 느낌이다.
앞으로도 종종 써먹어야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도박장으로 향했다.
건물 안은 예전보다 훨씬 한산했는데, 토너먼트가 끝나고 시간이 꽤 흘러서일 거다.
하긴, 배당 받을 사람들은 진작 다녀갔겠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근처 후미진 골목에서 모습을 다시 단테로 바꿨다. 배당금을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 주지는 않을 테니까.
제대로 바뀐 게 맞나 확인 작업까지 마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내 쪽으로 시선이 모여든다.
“……저거 단테 아니야?”
“드디어 배당금 받으러 왔나 본데.”
“분명 30만 골드였지? ……여기 파산하는 거 아니야?”
“왕국에서 직접 운영하는 건데 설마 그러려고.”
다행히 중얼거리는 사람들만 있고 직접 다가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3층으로 올라갔다. 그냥 돈만 받을 거면 1층에서도 충분한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똑똑.
“들어오게.”
허락을 받고 방 안에 들어서자 오스워드가 나를 보고 바로 표정을 구겼다.
“결국 왔군.”
“그럼, 안 올 줄 알았나?”
“경기 끝나고도 한참을 안 오길래 왕국 측에서 몰래 암살자라도 보낸 줄 알았지.”
아이언 제자일지도 모르는데 설마 그러려고. 벽에 기대면서 피식 웃자, 오스워드가 쯧, 혀를 찼다.
“돈은 여기서 바로 받아갈 건가?”
“한 번에 지불할 능력은 되나?”
“다행히 이번에 손해만 본 거는 아니거든. 데이크 쪽 배당률도 꽤 높아져서 거기 베팅한 사람들도 많았지. ……뭐, 당장 받아가겠다면 소유 건물을 몇 채 팔긴 해야겠지만.”
적어도 파산할 정돈 아닌가 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본론을 꺼냈다.
“지불 방식이나 시기는 마음대로 해라. 반년 안에만 받을 수 있으면 어찌 되든 상관없어.”
“관대하기도 하군.”
“그보다, 중요한 물건은 따로 있을 텐데.”
용의 피를 말하는 거다.
이번에도 표정을 구길 줄 알았는데, 오스워드는 생각보다 태연한 얼굴이었다.
뭐지? 그 가치를 알면 저럴 리가 없을 텐데.
사실, 용의 피는 내 기분 좀 상하게 했다고 요구하기엔 너무 큰 보물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30만 골드 따위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내기 당시야 내가 절대 이길 리 없다 생각해서 걸었을지 몰라도, 실제로 줘야 하는 상황까지 왔는데 저리 태평한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설마 이제 와서 줄 수 없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이건 내기 결과와 상관없이 줄 생각이었다.”
오스워드가 품에서 푸른색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내 들며 말했다.
“자네가 하비스 경을 이겼을 때 이미 마음을 굳혔지. 의미도 없이 금고에서 썩어 가고 있을 바에는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게 낫겠다고.”
“그게 나라는 건가?”
“거의 우리 업소를 거덜 낸 사람을 칭찬하고 싶지는 않지만, 뭐 어쩌겠나. 역사상 처음 윗급을 이긴 인간이 아니면 누구에게 그런 자격이 있다고.”
피식 웃은 오스워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상하다. 저리 관대하다는 설정 같은 건 없었는데.
“물론, 혹시라도 고맙다 생각한다면 십만 골드 정도는 깎아 줘도…….”
역시. 어차피 줘야 할 거면서 지나치게 생색낸다 했다.
나는 책상에 놓인 용의 피를 집으며 말했다.
“현물로 대신할 수 있게는 해 주지.”
“그 정도면 충분하네.”
오스워드가 다시 피식 웃으며 내가 들고 있는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헌데, 그건 어디에 쓸 거지? 역시 섭취할 생각인가?”
“그렇다.”
“희석법은 알고?”
희석법?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오스워드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용의 피를 그냥 섭취하면 평범한 신체로는 버텨 내지 못해.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니까. 그래서 다른 재료들과 섞어서 희석해야 하는데…… 이런 것도 몰랐나?”
그러고 보니 그런 설정도 있었지.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다 보니 잊어버리고 있었다.
“거참, 이런 것도 모르면서 용의 피를 요구하다니…… 어이가 없군. 혹시 만 골드 정도 깎아 주면 희석법을 알려 줄 수도…… 자네 뭐 하나?”
오스워드가 말하다 말고 내게 물었다. 아마 이제야 내가 유리병의 뚜껑을 딴 것을 발견한 모양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하긴.”
그리고 용의 피를 들어 올렸다.
“마시지.”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응시하는 얼굴을 일별하고서, 푸른색의 액체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