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02)
갑 전 결승전이 치러지는 곳은 원래 사용하던 경기장이 아니었다. 급격히 상승한 관심도와 관객 수에 맞춰 장소가 변경된 것이다.
그곳은 바로 을 전 경기장이었는데, 아르곤 토너먼트 역사상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데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좌석에 앉아 있던 대머리 남자가 대뜸 물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화답했다.
“결승전 말이야?”
“그래. 아무리 3급들이 대부분 기권을 내 버렸단 한들, 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느냐 이거야.”
그 의문은 오늘 방문한 관중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흉터남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뻔하지 않나?”
“……뻔하다고? 이유를 아나?”
“뭐, 짐작은 가능하지.”
“그게 대체 뭔가?”
그 말에 흉터남이 주위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대머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남은 3급이 데이크 경뿐이잖아. 혹시나 그분까지 기권을 낼까 봐 속전속결로 치려는 거지.”
“음……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
토너먼트 우승상품은 사실 그리 대단치 않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기사들이 참여하는 이유는 단지 명예 하나 때문인데, 지금 갑 전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승리하면 겨우 4급한테 이기고 좋아하는 개병신이 되는 거고, 패배하면 4급한테 진 상병신이 되는 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기권 내고 도망친 3급들은 오히려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어느 정도 불명예를 감수해야 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아래 단계에게 졌다는 치욕스런 칭호는 피할 것 아닌가.
“……결국 데이크 경만 불쌍하게 됐군.”
“뭘 졌다는 듯이 말해?”
“그게 아니라, 혹시 이긴다 쳐도 별로 얻는 게 없지 않나. 이겨 봤자 4급인데.”
“그건 또 아니지.”
“어째서?”
대머리가 영문을 모르겠단 듯 묻자, 흉터남이 쯧쯧, 혀를 찼다.
“상황이 달라졌잖아. 지금 단테가 그냥 4급으로 보여?”
“뭐, 그냥 4급은 아니지. 3급을 이긴 최초의 4급이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그전에 그 인간이 왜 유명해졌는지를 생각해 봐.”
“……만 골드?”
“제일 처음에 말이야.”
그 말에 대머리가 본인의 머리를 문질렀다. 윗 단계를 이긴 최초의 인간이란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전에 있던 일들은 희미해진 거다.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나오지 않자, 흉터남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개 아이언의 제자잖아, 멍청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그런데 그거 대부분 사람들이 거짓말 취급하는 거 아니었나?”
“그건 옛날 말이지. 지금은 사람들 전부 제자가 맞다고 믿고 있을걸. 솔직히, 이제 와 그가 아이언의 제자가 아니라고 밝혀지면 그게 더 신기할 거 같은데.”
흉터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초신성이 어디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겠는가. 차라리 좀 또라이 같은 인간의 숨겨 둔 제자라 여기는 게 낫지.
“아무튼, 지금 시점에서 단테를 그냥 4급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없다는 게 중요한 거야. 데이크 경도 이기면 3급 자존심은 지켰다는 평가라도 받을걸.”
“그걸로는 너무 짜지 않나?”
“난이도에 비하면 적당하지. 어차피 데이크 경이 이길 텐데.”
단정 짓는 말에 대머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테가 이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미 3급도 이겼지 않나.”
“3급이라고 다 같은 3급으로 보이냐? 하비스 경은 경지에 오른 지 1년도 안 됐고, 데이크 경은 5년 안에 국가기사가 될 거라고 평가받는 분인데. 분명히 데이크 경이 이길 거야.”
“하지만 단테한테 베팅한 사람도 많은데…….”
“아, 그놈들?”
흉터남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부분은 그냥 머리가 텅 비었거나 인생에 뒤가 없는 인간들일걸? 내가 장담하지.”
그 말을 끝으로 흉터남과 대머리는 바로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보통 도박과 상관없는 건실한 얘기였다.
덕분에 그들의 대화를 남몰래 엿듣고 있던 뒤 없는 인간은 속으로만 분통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 머리가 비어?’
휴버트가 허전한 아래쪽을 더듬으며 생각했다. 집문서를 팔았다는 걸 들켜 속옷까지 뺏겨 쫓겨난 참이다. 간신히 옷만 구해 들어온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저런 얘기까지 듣다니.
‘뒤가 없는 건 맞는데, 머리가 비진 않았어.’
휴버트는 정말로 단테가 이길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근거는 없지만, 원래 이런 건 믿음의 영역 아닌가.
그가 언짢은 감정을 담아 앞의 반짝이는 대머리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여러분!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회자가 무대에 걸어 올라왔다.
“급작스럽게 정해진 결승전임에도 이렇게나 많은 분들이 모여 주신 걸 보니 정말 감격스러울 지경입니다. 솔직히 제가 그동안 맡았던 3번의 갑 전 관중을 다 합쳐도 지금 이 경기장 인원의 절반도 안 될 거 같네요. 하하.”
실제로 건물 안은 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어디 있었나 싶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이번 경기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뜻이겠죠. 이런! 벌써부터 잡설은 그만하고 시합이나 시작하라는 속마음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 얼른 시작해라!”
“언제까지 시간이나 끌 거야!”
관중들이 우우거리며 야유했다. 심각한 표정들은 아니었고, 웃음기 머금은 장난기 섞인 말이었다.
사회자가 양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시간 그만 끌고 곧장 시작해 볼까요?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완숙한 경지의 3급! 데이크 경입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기실에서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화사하게 빛나는 금발 머리. 데이크였다.
“데이크 경! 믿고 있습니다!”
“제발 저 아이언 제자 놈 좀 눌러 주시오!”
데이크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사들이었다. 단테 때문에 체면이 상했다 생각하는 3급들이 주축이었다.
그들은 경기장의 열기에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최소한의 교양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 다음으로 그 상대를 불러 보겠습니다! 바로 화제의 초신성! 단테 경입니다!”
그 말과 함께 남자 한 명이 데이크 때와 같이 대기실에서 걸어 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머리. 단테는 먼저 나와 있던 데이크의 옆에 자리 잡고 섰다.
“단테! 무조건! 무조건 이겨라! 저 샌님새끼 그냥 죽여 버려!”
“너 이 새끼 지기만 해 봐! 뒤져서 만날 네 꿈속에 나타날 거니까!”
단테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에 뒤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교양이고 지랄이고는 먼 옛날에 버리고 온 모습들이다.
누가 봐도 차이 나는 응원단들의 수준에 사회자는 살짝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데이크 경, 단테 경. 그만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겠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양쪽으로 자리 잡고 서는 걸 확인한 사회자가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자! 그럼 지금부터 아르곤 토너먼트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 * *
‘빈틈이 안 보이네.’
어디를 공격해도 막을 것 같다,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데이크의 자세는 막기가 아니라 오직 피하는 것만을 염두에 둔 모습이었다.
그의 힘이 예사 것이 아니라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다는 소리다.
‘하데스랑 싸울 땐 힘 별로 안 썼는데…….’
그 얼마 안 되는 격돌만으로 분석을 이미 끝마친 거다. 거기에 더불어 상대법까지.
‘진짜 골치 아프긴 하네.’
리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비스듬히 늘어뜨렸다. 일부러 빈틈을 내보인 거다. 말하자면 미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데이크는 그걸 물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굳건히 서 있을 뿐.
‘숙련된 기사라 이거지.’
실전 경험이 비교도 안 되는 사람을 상대로 잔재주를 부리려 한 것부터가 잘못이긴 하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리안은 피식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저게 무슨 동작이지?’
허나 상대에게 빈틈이 없다 생각하는 건 데이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저리 간결하게 움직이는 인간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다른 사람이 수십 번 움직여 수행할 걸 단 한 번의 동작만으로 해결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딱히 무공을 쓰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저 일상적인 몸짓이 너무도 군더더기가 없다.
‘역시 하비스 경을 쓰러뜨릴 때 보였던 그 기술인가?’
잠깐 눈을 깜빡였다 했더니 어느새 상대 뒤로 돌아가 있던 단테의 모습이 떠올랐다. 흡사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은 광경이었지만, 그런 게 아님을 데이크는 알고 있었다.
단테는 그저 낭비되는 동작이 전혀 없이 매끄럽게 움직인 게 전부다. 그 극에 치달은 효율성으로 인해 뇌가 인식을 거부했을 뿐.
‘정말 마법 같은 움직임이군.’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전설 속의 블링크 마법이 부활한 것 아닌가 생각도 했을 거다.
데이크는 긴장을 유지한 채 검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걸어오던 단테가 갑자기 바닥을 박찼다. 탓, 그 몸이 마치 송곳이라도 된 것처럼 찔러 온다.
‘무슨 속도가……!’
팔이 순간적으로 반응해 막으려 하는 걸 의식적으로 되돌렸다. 저걸 정면으로 받았다가는 단 한 방에 장외 패로 끝날 거다.
간신히 발을 움직이자, 쉬익! 옆으로 검이 스쳐 지나갔다.
데이크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치 인간이 아니라 괴수라도 상대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빈틈!’
공격자가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은 바로 그 공격이 실패했을 때다. 데이크가 노린 상황이기도 하다. 그는 그대로 단테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금속과 살이 맞부딪혔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굉음이 울려 퍼진다.
‘막아?’
당연히 그 괴상한 움직임으로 피할 거라 생각했는데, 상대는 그저 옆구리에 마력을 두른 채 공격을 버텨 냈다.
단테가 씨익 웃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 아나?”
흠칫한 데이크가 얼른 몸을 틀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상대의 발길질이 더 빨랐다. 뻐억! 데이크의 복부에 다리가 처박혔다.
“커억!”
그는 몇 걸음 밀려나 간신히 자세를 바로 했다. 겨우 발길질 한 방 당했을 뿐인데, 내장이 진탕되기라도 한 것 같은 충격이 느껴진다.
그에 반해 검을 맞은 단테는 별로 아프지도 않은지 태연한 표정이었다.
‘……이건, 진짜 몬스터를 상대한다는 기분으로 움직여야겠군.’
굳이 가정하자면 작은 오우거. 그것도 마력을 다루는 채 힘이나 맷집은 그대로인 괴물이라 생각하면 딱 알맞을 거 같다.
데이크가 복부를 한 번 쓰다듬고 검을 들어 올렸다.
이제 겨우 한 방 맞았을 뿐이다. 움직이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엄살 부려대면 기사 짓거린 못 해 먹는다.
“너는 안 올 건가?”
단테가 자세 잡는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거의 비웃음 같은 미소였다.
“계속 거기서 겁쟁이처럼 폼만 잡고 있을 거냔 말이다.”
도발이다. 저런 1차원적인 전술에 놀아날 만큼 데이크는 어리숙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생각을 달리했다. 그건 상대가 한 말과는 전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방법이 잘못됐다.’
공격을 피하고 반격을 반복할 생각이었는데, 저런 식으로 나오면 결국 그가 먼저 쓰러질 거다. 아무리 대련이라지만 진검 들고 하는 승부에 저렇게 무식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갑 전은 실전을 추구하는 만큼, 어쩔 수 없는 ‘불의의 사고’가 종종 일어나는 편이다. 저건 죽음을 가정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행동도 아니란 말이다.
데이크는 속으로 본인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뭔지 떠올려 봤다.
‘속도와 기술.’
힘은 저쪽이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저 둘은 그가 더 우월하다. 그리고 마침 데이크는 저 둘을 같이 쓸 수 있는 수단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승부수는 이것뿐이다.
데이크는 굳게 마음먹고 내부의 마력을 관조했다. 그리고 그가 검을 들어 올렸을 때.
‘뭐지?’
리안은 데이크의 위에 떠오르는 코드를 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