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101화 (101/225)

너의 코드가 보여 (101)

“…….”

경기장 안은 다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이런 경우가 몇 번이고 있긴 했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이건 신흥강자의 탄생이니, 새로운 별이 떠올랐느니 할 만한 문제가 아니다.

아래 등급은 윗 등급을 이길 수 없다.

수백 년간 절대적이라 여겨 왔던 가치가 깨부숴진 거다.

그 의미를 아는 자는 경악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봤고, 그 의미를 모르는 자는 숨죽인 채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스, 승자는…… 다, 단테 경입니다!”

그나마 비슷한 일을 한 번 겪어 본 사회자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상황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고, 워낙 오래 해 온 일이다 보니 반사적으로 내뱉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회자의 말에도 박수를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 저 광경을 믿지 못하는 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적막뿐인 경기장에서, 단테는 오만한 눈으로 관중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는, 무심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

그렇게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춘 후에도, 한참 동안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말하는 방법을 잊어먹기라도 한 것처럼.

* * *

“단테한테 10골드!”

“지금 하는 거야? 빨리 베팅하라고! 배당률 또 내려갔잖아!”

“확인 작업 필요 없으니 그냥 좀 걸라고!”

도박장의 모습은 흡사 광기에 가까웠다.

원래도 좀 지나치게 활기차다 싶은 곳이긴 했지만, 지금에 비한다면 그때는 거의 도서관처럼 보일 거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홀로그램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베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일단 어떻게든 돈부터 넣으면 해결될 거라 믿는 꼴이다.

휴버트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웃었다.

‘멍청한 놈들. 진작부터 투자했어야지.’

그가 베팅할 당시의 배당률은 28.5.

헌데 지금은 15.4…… 14.3……계속해서 내려가고 있다.

저게 휴버트가 굳이 남은 돈도 없으면서 도박장을 다시 찾은 이유다. 저 내려가는 수치와 반비례해서 그의 기분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것이다. 거기에 그것도 베팅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을 보면 더할 나위 없다.

이제 앞으로 일주일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든든할 정도!

‘단테가 이기면 내가 받는 금액이…… 대략 2,500골드.’

그야말로 인생역전. 웬만한 하급 귀족들도 가지지 못하는 액수 아닌가. 휴버트는 벌써부터 뿌듯한 감정이 몰려들었다. 이런 혜안이라니. 사실 여기에 재능이 있던 게 아닐까.

‘이제 3급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이 4명 남았댔나?’

조금 많긴 하다. 허나 휴버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비스와의 경기를 보며 잠깐, 아주 잠깐 불안해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확실히 단테를 믿는다.

무려 국가기사도 덜덜 떨며 지켜본 사람 아닌가. 그가 히죽 웃으며 베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소, 속보! 긴급 속보!”

2층 상황실에서 일하는 직원이 허둥지둥하며 내려왔다. 정보수집과 분석을 맡는 엘리트들이 저리 호들갑을 떠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자연스레 정신 나간 듯 베팅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다. 별거 아니면 두고 보자는 눈빛들이다.

직원은 갑자기 집중되는 형형한 안광들에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얼른 말 안 하고 뭐 해! 단테랑 관련된 거야?”

“아이언이 벌써 그 새끼 족치러 오기라도 한 거냐?”

직원이 계속해서 뜸을 들이자, 사람들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 기세들이 워낙에 거세어 직원은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 입술만 달싹이다가, 그냥 홀로그램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갱신된 정보를 써넣었다.

[갑 전 3급 출전자 레오폴드: 기권]

[갑 전 3급 출전자 리디아: 기권]

[갑 전 3급 출전자 필리스: 기권]

“…….”

광기에 찌들었던 도박장 내부가 적막으로 물든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한참 동안 홀로그램만 바라봤다.

“……지금 갑 전에 남은 3급 출전자가 몇 명이었지?”

“아마, 4명일 텐데…….”

“……근데 3명이 기권이라는 건…….”

꿀꺽.

누군가 침 넘기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잠깐이지만 조용해졌던 도박장은, 그런 건 그냥 폭풍전야였다는 듯이 더 큰 광기로 물들었다.

“시X! 지금 당장 걸라는 말 못 들었어!”

“저 새끼보다 늦게 걸기만 해 봐 진짜.”

“여보! 얼른 집문서 좀 들고 와 봐!”

홀로그램에 떠 있는 단테의 배당금이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6.5…… 3.2…… 1.5.

그 광경에 휴버트는 기분이 우주까지 뚫고 나가는 걸 느끼며 흡족히 웃었다.

* * *

“레오폴드 경은 할아버지 사촌 동생의 조카의 자식이 급사하여 장례를 치르러 갔다는군. 이게 대체 몇 촌 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가족애가 뛰어난 사람인가 보지? 그리고 리디아 경은 갑자기 출장을 발령 받았다던가? 그녀가 속한 기사단은 현재 전원 휴가 상태라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았던 모양이야. 그리고 필리스 경은…… 배탈? 3급이 배탈도 걸리나? 요즘 병은 무섭군 그래.”

“그렇군.”

“정말 특이한 우연도 다 있지. 안 그런가? 이렇게 갑자기 3명이나 개인적인 사정이 생기다니.”

라키안이 신문을 턱 접는다. 멍한 와중에도 슬쩍 보니 1면부터 3면까지 내 얼굴이 큼지막하게 들어가 있다. 저 정도면 그냥 대서특필이다.

“어쨌든, 자네는 그럼 이제 그 데이크 경과만 붙으면 우승하겠군. 나는 결국 베리안 경과 만나서 패배했지만…… 단테 그대라도 승리하면 그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나.”

“고맙군.”

“별말을. 아, 오스워드 영감님이 제발 뒤져 버리라고 좀 전해 달라더군. 거 참, 자네 얘기대로 쑥스러움이 많으신 분이던데. 전혀 그럴 것 같이 안 생겨서는 말이야.”

“그렇지.”

“헌데 아까부터 뭘 하는 건가?”

“그 말도 맞군.”

호흡을 고르며 답하자 라키안이 뭔 개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무슨 얘기하는지 하나도 안 들었다. 평상시라면 대충 듣는 척이라도 해 줬겠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에 정신이 온통 쏠려 있다는 게 문제다.

무영보.

배운지 두 달 가까이 돼 가는데 실전에서 제대로 써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발록한테도 사용하긴 했지만, 그땐 완전히 숙련됐었다고 보기 힘드니까.

그에 반해 하데스 상대로는 정확히 뒤로 향하지 않았나.

무영보 설정에 그 경지까지 도달하는 데 10년은 걸린다 썼던 걸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발전하긴 했다.

이유야 뭐 적성에 맞았던 것도 있는데, 역시 라키안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 옆에서 내 정신력 수양에 엄청난 도움을 줬으니까.

아무튼, 지금 머릿속으론 계속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고 있다. 같은 3급이어도 데이크는 녀석이랑 수준이 다르다. 그러니 적어도 무영보 정도는 완전히 숙련시켜 줘야 좀 해볼 만하지 않겠나.

단순히 적 뒤로 돌아가는 걸로는 부족하다. 이미 하데스와의 경기에서 보이기도 했으니까, 뭔가 대안 정도는 가지고 오겠지.

정확히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레벨로는 올라야 한다는 소리다.

옆에서 계속 주절거리는 라키안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무영보를 연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

무아지경에서 벗어나 주변을 둘러봤을 때는 이미 라키안이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아무리 녀석이라도 몇 시간 내내 혼자 떠들지는 못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어느새 해가 하늘 정중앙에 당당히 걸려 있다.

분명 정신 차리기 전에는 지기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태양한테 뒷걸음질 치는 능력이라도 생긴 게 아니라면 나도 모르는 새 하루가 지났다는 뜻이다.

“…….”

‘초인’ 때문에 신경줄이 굵어지기라도 한 건가? 지구에서는 이렇게까지 집중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여기 와서는 이런 일이 꽤 자주 있다.

아무튼, 성과는 얻었다. 그때 성공했던 감각이 어느 정도 몸에 배이긴 했으니. 며칠만 더 해 보면 완전히 감 잡을 거 같다. 결승전까지는 충분하겠지.

연습 삼아 몇 번 더 반복해 보고 여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입구에서 딱 멈췄다. 로비 쪽에 익숙한 얼굴이 보여서. 데이크였다.

그도 마침 나를 발견한 듯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단테 경, 전에 경기 잘 봤습니다.”

“고맙군.”

“솔직히 저도 단테 경이 이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됐네요.”

데이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걸 빤히 보다가 말했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아, 말씀드릴 게 몇 가지 있어서요.”

얘가 지금 시점에 나한테 얘기할 만한 게 딱히 없을 텐데?

그런 의문을 느꼈는지, 녀석이 살짝 웃었다.

“정확히는 제가 드리는 말이라기보다는 토너먼트 쪽 얘깁니다. 이번에 레오폴드 경, 리디아 경, 그리고 필리스 경이 기권을 냈다는 소식은 들으셨죠?”

“그래.”

“그거 때문에 왕국 측에서 저한테까지 찾아왔더군요. 제발 기권은 하지 말아 달라면서요.”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갔다.

다른 3급들이 전부 4급에게 졌다는 칭호가 무서워 도망친 와중에 마지막 남은 데이크까지 기권을 냈다간 토너먼트가 완전히 망하겠다 생각한 거겠지.

왕국 측도 급하긴 어지간히 급했구나 싶다.

보통 경기 도중 선수와 접촉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게다가 걱정도 쓸데없는 거였다. 데이크는 질까 봐 무서워 도망치는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괜히 오스워드와의 계약 조건에 3급 두 명을 이긴다 넣은 게 아니다. 다른 놈들 다 기권 쳐도 얘는 남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데이크는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계속 말했다.

“솔직히 그 기사들을 비겁한 겁쟁이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왕국 측에서 사람까지 보내 와서 설득하니 오히려 실감이 나더군요. 4급에게 진 3급이란 칭호가 얼마나 커다란 건지.”

……말이 좀 묘한데.

“혹시 기권했나?”

“그렇진 않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쌓아 온 실력을 믿으니까요.”

데이크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무조건 이길 거라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전에 단테 경의 경기를 본 다음 그런 생각은 진작 날아갔죠.”

“그럼 뭐지?”

“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져도 상관이 없어?

데이크는 내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해 살 만한 단어 선택이었네요. 정확히는 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왜지?”

“말했듯이, 제가 쌓아 온 실력은 거짓이 아니니까요.”

결단력 있어 보이는 눈동자가 호를 그린다.

“저도 모르게 어느 샌가부터 급수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게 곧 실력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요.”

사실 대부분 급수가 실력을 증명하는 게 맞긴 할 텐데.

“만약 제가 진다면…… 그건 단테 경이 등급을 뛰어넘는 뭔가를 지니고 있었을 뿐이란 소리겠죠. 그래서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가.”

“네. 그러니 서로 최선을 다해 보죠.”

그리 말하면서 데이크가 악수를 건네 왔다. 이번에는 나도 군말 없이 바로 받아 줬다. 녀석은 손을 몇 번 흔들더니,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정작 중요한 얘기를 못 드렸군요. 선수들 기권 때문에 결승전 시기가 조정됐습니다.”

“그럼 언제지?”

데이크는 환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내일입니다.”

뭐 인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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