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100)
“그럼…… 시작!”
사회자의 신호와 동시에 환호성이 뚝 멈춘다. 경기장 안은 오직 침묵으로만 가득 찼다. 긴장된 눈으로 무대를 사생결단이라도 낼 것처럼 노려보는 자들도 있었다.
바로 단테의 우승에 전재산을 투자한 사람들이다.
‘제발…….’
휴버트가 꿀꺽 군침을 삼키며 단테를 바라봤다. 그는 부모님 영혼까지 끌어모은 전재산 87골드를 저 남자에게 투자한 참이다.
그렇다고 딱히 양친이 돌아가신 건 아니다. 그냥 집문서를 살짝 몰래 팔았을 뿐이지.
허락보다는 용서가 쉽다던가.
결국 따서 갚으면 해결되는 문제 아니겠나.
‘이길 수 있다……!’
살면서 검 한 번 들어 본 적 없는 일반인이지만, 휴버트는 그리 확신했다. 근거는 간단했다. 그는 3급이니 4급이니 하는 어려운 이야기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간단한 논리귀결 정도는 가능한 것이다.
본인에게 만 골드를 투자한 사람이 있다.
당사자는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단테는 이긴다.
이런 완벽한 법칙 아래 판단한 완전한 결정이지만, 아무래도 전재산이 걸려 있다 보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쾅!
무대에서 들리는 굉음에 휴버트가 정신을 되찾았다. 어느새 서로 충돌한 거 같은데, 일반인인 그의 눈에는 번쩍이는 장면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시선을 올려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평민들도 알아볼 수 있게 선수들 동작을 간단히 요약해 보여 주는 왕국 측의 배려다.
단순하게 생긴 인간 모형 두 개가 붙는 모습에, 휴버트는 곧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단테가 불리하다……!’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보였다. 저 하비스라는 다리몽둥이 분질러 버릴 인간이 먼저 단테에게 돌진해 왔다. 겨우 막기는 했지만, 그걸 공세로 전환하지는 못하고 있다.
결국 데이크와 머라이노 경기의 연장선이다.
데이크가 하비스로, 머라이노가 단테로 바뀌었을 뿐이지.
휴버트는 저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와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급수 차이가 나는데 저렇게나 버틴다고?”
“솔직히 장난으로 단테한테 1실버 베팅했는데…… 저런 실력이라면 잃어도 전혀 아깝지 않지. 오히려 더 넣을 걸 그랬나 싶을 정도야.”
“허, 참. 갑 전이 을 전보다 흥미로운 경우는 또 처음 보는군.”
아무래도 단테의 승리를 진심으로 믿은 건 휴버트 뿐인 듯했다. 저렇게나 밀리고 있는데 칭찬이라니.
‘시X. 잘 버티면 뭐 해? 지면 다 끝장인데!’
그는 손가락을 물어뜯으며 홀로그램을 지켜봤다. 여전히 공세는 일방적이다. 단테는 계속해서 막는 데 급급할 뿐, 공격 한 번 해 보지 못했다.
손가락에서 나온 피가 입안을 적셔 비릿한 쇠 맛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때쯤. 사람들은 이상한 점 한 가지를 눈치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버티지 않나?”
“지금 경기 시작하고 몇 분이나 지난 거야?”
“10분 정도 된 거 같은데.”
“……하비스 경이 봐주고 있는 것 아닌가?”
누군가 그런 의심을 내뱉었지만, 그렇진 않은 것 같았다. 잠깐씩 비치는 하비스의 얼굴은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었으니까.
“저건…… 말도 안 돼…….”
그때, 경기장을 경악한 눈으로 지켜보던 한 남자가 공포까지 느껴지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얼마나 격렬한지 금세 시선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를 알아본 관중 중 하나가 놀라서 소리쳤다.
“구, 국가기사 베리안 경이다!”
“이번 3급 을 전 유력 우승 후보라던 그분?”
“본인 경기 끝나고 구경 오셨나 본데.”
“……근데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야?”
그 자리의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이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서 물어보진 못했다.
그냥 기사도 아니고 무려 국가기사 아닌가. 그런 위인에게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정말 다급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대체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겁니까?”
휴버트는 그 정말 다급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국가기사고 지랄이고 본인 명줄부터 붙잡고 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자네들은 저걸 보고도 모르겠는가?”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뭘 알겠습니까? 그냥 속 시원히 말씀해 주시죠.”
베리안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의 두 눈은 아직도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양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저자는 지금 상대를 연습용으로 삼고 있는 거네.”
“예? 하비스 경이 단테 경을 상대로 말입니까?”
다른 관중이 끼어들어 물어왔다. 베리안은 경기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반대지.”
“……반대라면……, 설마 단테 경이 하비스 경을 상대로 말입니까?”
“……그래.”
베리안이 팔을 들어 떨리고 있는 손을 바라봤다. 국가기사가 되기 전이든 후든, 살면서 이렇게 수전증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칼 밥 먹고 사는 인간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떨린다. 떨려온다.
저 믿기 힘든 광경에 어쩔 수가 없는 거다.
그는 충격과 경악의 감정을 담아 경기장을 지켜봤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렸다.
“……저 단테라는 인간은, 본인보다 윗급인 하비스보다 명백하게 강하네.”
* * *
“……너 이 새끼.”
리안은 으르렁거리는 상대를 빤히 쳐다봤다. 이름이…… 하데스였던가? 죽음이라도 몰고 올 것 같은 호칭치고는 그 실력이 너무 허접하다.
‘급수 같았으면 라이놀 발끝도 못 따라오겠는데.’
물론 그 급수 격차가 워낙 절대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서 오는 차이가 무엇인가? 결국 더 강하고 더 빠르다는 것 아니겠나?
그런 점에서 볼 때. 리안은 4급이지만, 저 하데스라는 3급보다 더 강하고, 더 빨랐다.
‘참고할 정도는 되긴 하는데…….’
한 급수 위와도 해볼 만하다고 계속 생각은 해 왔다. 그게 확신까지 가지는 못했을 뿐이지. 그야 진짜 이겨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테오도르와의 싸움은 녀석이 헛짓거리 하는 덕분에 허무하게 끝났다.
미르는 비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와 싸우면 귀찮아질 것 같다는 이유였다.
발록은 그냥 힘센 짐승이었다. 기술이고 뭐고 없이 무식하게 돌진해 올 뿐. 그런 걸 해치웠다고 윗급을 이겼다 여기긴 힘들다.
사실상 3급 기사와 동급으로 치는 6성급 마법사와의 다툼도 제 실력으로 이겼다고 하기는 미묘했다. 리안은 마법이 발동하기도 전에 그 종류와 파훼법까지 전부 알 수 있었으니까.
어지간해서는 마법사와 1 대 1로 붙었을 때 질 수가 없는 조건이다. 상대가 마녀라도 되지 않는 이상에야 말이다.
요컨대 이건 그가 처음으로 겪는 제대로 된 3급과의 결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인 순간에 리안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한가지뿐이었다.
‘……지루하네.’
처음에야 배움이라는 기대라도 가졌는데, 이제는 그냥 적당히 공격을 받아 주고 있을 뿐이다. 저 하데스라는 놈에게서는 아무것도 배울 만한 점이 없었다.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냐.”
하비스는 그런 리안의 심정까지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상대가 본인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도 못 챌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4급이 나를 상대로…….”
“토너먼트가 열리기 전부터 계속 말해 왔다.”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한 목소리다.
“나는 갑 전에서 우승할 거라고.”
“…….”
“그걸 알리기 위해 베팅도 나한테 했지. 괜히 방심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떻게 했나?”
싸늘한 얼굴이 씨익 미소 짓는다. 즐거워서 나오는 게 아닌,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비웃음이다.
“4급 따위가 나댄다고 코웃음 치기만 할 뿐이었지.”
“…….”
“나중에 방심해서 졌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제대로 덤벼라.”
원래는 3급인 하비스가 했어야 할 말. 빠드득. 이빨이 갈린다. 분노? 아니, 이건 진작 그 수준을 넘었다. 그는 엄청난 모욕감에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는 중이었다. 그래선 안 되는 토너먼트임에도 말이다.
‘오냐, 죽여 주마.’
하지만 이것은 극한의 실전을 추구한다는 갑 전. 무기도 본인 걸 쓰고 등급마저 신경 쓰지 않는데, 살상은 금한다는 건 너무 1차원적인 생각 아니겠나.
하비스는 속으로 쓸 수 있는 전력들을 점검해 보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힘이나 속도로는 상대가 안 된다.’
그럼 남은 건 기술뿐이다.
그것 하나는 확실히 우위에 있다고 장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압도적으로 압도할 만큼의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큰 거 한 방을 먹여야 해.’
적당한 게 하나 떠올랐다. 그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필살기(必殺技). 그거라면 저놈을 골로 보낼 수 있으리라.
일단 사용하면 반드시 상대를 죽이기 때문에 여기서 쓸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감정은 비웃음을 들은 시점에서 진작 사라졌다.
하비스는 계속하던 공격을 멈추고 열 걸음 뒤로 멀어졌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제대로 하라고 했나?”
“그래.”
“그럼 거기서 잠시만 기다려라. 제대로 된 걸 보여 주지.”
하비스는 그리 말하곤 눈을 감았다. 필살기는 집중도 해야 하고, 준비 시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하랬지 병신 짓 하라곤 안 했는데.’
리안은 싸우다 말고 대뜸 명상에 빠진 상대를 멍청히 바라봤다. 전투 중 저러는 건 그냥 찔러 죽여 달라는 뜻 아닌가?
‘살짝 돌멩이만 던져도 기절하겠다.’
실제로 그대로 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꾹 참았다. 내심 하데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 운 없이 나를 만나서.’
대륙 최초로 4급에게 진 3급이란 칭호가 그리 자랑스럽진 않을 거다.
사실 아까부터 방어만 한 것도, 제대로 해 보라며 격려한 것도. 전부 상대를 배려해서 한 행동이다. 적어도 일방적으로 처 발렸다는 소문이 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심지어 투지가 꺾일까 썩소도 지어 줬다.
이렇게까지 한 와중에 뭔지 모를 기술 한 가지 정도 더 봐주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렇게 1분 정도가 지났을까. 드디어 하데스가 눈을 떴다.
“흐…… 흐하하하하! 멍청한 놈. 설마 진짜로 기다릴 줄이야.”
“……준비는 끝났나?”
“그래. 네놈은 이제 끝이다.”
하데스의 검에 엄청난 양의 마력이 집중된다. 저런 걸 경기장에서 써 버리면 관중석에까지 큰 피해가 갈 거다. 실제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건지 경기장을 호위하던 기사들이 무대로 올라오려 하고 있다.
하지만 하데스는 뭔가에 눈이 돌아가 버린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단지 씨익 웃으며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럼 그만 죽어라.”
검이 내려쳐지려 한다.
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하데스에게 향했다.
그냥 한 번 받아 주려 했는데, 저건 좀 정도가 지나치다.
“우리 가문의 비기…….”
들숨이 5번.
“이터널…….”
날숨이 3번.
“블레이…… 어디 갔지?”
“뒤다.”
뻐억! 목 뒤를 쳐 기절시켰다. 달려오던 기사들이 경악한 얼굴로 멈춰 선다. 리안은 쓰러진 하데스를 보며 쯧, 혀를 찼다.
‘기술 이름 진짜 존X 구리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