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99)
“…….”
아까의 데이크와 머라이노의 경기처럼 환호성이 나오지는 않았다. 관객들은 갑자기 붕어라도 된 것처럼 눈만 껌뻑이는 중이었다.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만 내려가 봐도 되겠지?”
“……예?”
사회자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어 왔다.
“경기는 끝났다. 그만 내려가도 괜찮은지 묻는 거다.”
“아…… 아! 죄, 죄송합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깃발을 들어 올린다.
“스, 승자는 단테 경! 소요시간은…… 3초입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곧이어 경기장이 떠나갈 것 같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젠장, 믿고 있었다고!”
“누구야, 단테 경이 질 거라 한 게!”
“너잖아 새끼야.”
“어떻게 동급을 단 3초 만에…….”
나는 그런 웅성거림들을 뒤로하고 경기장을 내려갔다. 앞길을 막고 있던 선수들이 홍해처럼 갈라진다.
이건 원래 그러긴 했는데, 아까는 더러워서 피한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두려워서 피하는 기색이다.
아무튼, 오늘 대전은 이 한 번이 끝이다. 그대로 여관에 향하려는데,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데이크였다.
“저는 당신이 이길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3초는 생각도 못 했지만요.”
“나를 아나?”
“물론입니다.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데이크라고 합니다. 데이크 폰 론디니움. 그때 여관에서 한 번 뵀었지요?”
그걸 봤다고 할 수 있나?
데이크가 악수하자는 듯 손을 내민다. 나는 그걸 맞잡지 않고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
“…….”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손이 거두어지지 않는다. 얼굴을 보니 여전히 웃는 채다. 이건 성격이 좋은 건지 인내심이 좋은 건지.
하는 수 없이 악수를 받아 줬다.
“감사합니다. 팔 떨어지는 줄 알았거든요.”
“친목이나 다지자고 경기에 참여한 게 아니다. 볼일 없으면 그만 가 보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걸음을 옮겼다. 단테라면 이럴 것 같아서다. 그러자 데이크가 옆으로 따라붙는다.
“혹시 아직도 라키안 경과 만나십니까?”
“네가 알 바 아니다.”
“질이 나쁜 사람입니다. 가능하면 거리를 두시지요.”
“…….”
질이 나쁜 건 또 어떻게 알았지?
아직 평판 괜찮은 것 같던데. 그것도 곧 실체가 밝혀지겠지만.
순간 라키안이 나와 만나기 전 이미 4개의 식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중에서 이 녀석이랑 만났던 건가?
그제야 데이크가 여관까지 왔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라키안을 찾으러 온 거겠지.
게임에서 나온 성격을 생각해 보면 복수는 아닐 테고, 정의감 비스무리한 걸 거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기 전에 자신이 라키안의 대화 상대를 자처하려 했다던가.
성자라는 칭호는 얘한테 붙어야 하는 건데.
내가 살짝 감탄을 담아 바라보자, 데이크가 얼굴을 굳혔다.
“혹시 협박이라도 당하고 계신 거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넣어 둬.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그런 건 아니다.”
“그럼 어째서…….”
“버틸 만하니 버텼을 뿐이다. 요즘은 좀 익숙해지더군.”
“……그게 버틸 만해졌다는 말입니까?”
데이크가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시선이다.
이해는 갔다. 나도 설마 그 수다에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 봤으니까.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지. 하지만 무시하는 법을 익히고 나니 괜찮아졌다.”
“……그냥 버티는 것도 아니고, 벌써 그 정돈 신경 쓰이지도 않는 수준에 올랐다는 소립니까?”
“그렇다.”
고개를 끄덕여 주고 데이크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니, 혹시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것이라면 별로 신경 쓸 것 없다.”
순진해 보이는 눈동자가 지진 난 것처럼 떨린다. 이쪽을 향하는 시선에는 존경의 감정까지 담겨 있다. 나는 그저 담담히 말했다.
“그런 놈은 이미 내 안중에도 없으니까.”
* * *
토너먼트에 참여하는 선수들의 배당률은 변동제다.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 수치가 변한다는 말이다.
뒤로 갈수록 경쟁자가 줄다 보니 자연히 배당률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갑 전에 참여하는 4급 이하 참가자들에게는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그 이유야 당연하게도, 그들은 갑 전에서 우승할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어찌 운이 좋아 오래 살아남았을지는 몰라도, 결국 결승전에서 3급 하나 만나면 준우승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덕분에 갑 전의 4급 5급 참가자들은 언제나 배당률이 최고 수치인 30 대 1로 고정되었고, 이는 토너먼트가 시작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진리와 같았다.
방금까지는 말이다.
“……어?”
한 남자가 홀로그램을 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함께 온 동행이 그 얼굴을 보고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음…… 아니, 뭐 잘못 봤나 봐.”
“잘못 봐? 뭐를?”
“방금 갑 전에 출전한 4급 선수 중에 배당률이 30 대 1 아닌 사람이 있던 거 같았거든. 잠깐 스쳐 지나갔는데…….”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 동행이 피식 웃었다.
“너 도박 좀 어지간히 하라고 했지. 맨날 이거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젠 헛것까지 보는 거잖아. 혹시 어제 잠도 안 잔 거 아니야?”
“4년에 한 번밖에 안 치러지는 행사인데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즐겨 보냐? 그냥 헛것 좀 보고 말지 뭐.”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동행이 그걸 한심하게 바라보고 혀를 쯧쯧 차는데, 갑자기 도박장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홀로그램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로부터 의문 섞인 중얼거림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거다.
“갑자기 왜들 저러지?”
“글쎄. 유력 우승 후보라도 떨어졌나 보지.”
“아직 1회전밖에 안 했는데?”
“대진 운이 안 좋았을 수도 있으니까.”
둘은 그리 말하며 중앙으로 다가갔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홀로그램 근처까지 오고도 사람들이 놀라고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너무 많아 오히려 정확한 정보를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남자는 한숨을 쉬며 옆에 있는 중년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기요, 뭐 하나만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뭔가?”
“지금 사람들이 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겁니까? 갑자기 데이크 경이 벼락 맞고 신전에라도 실려 갔어요?”
“……3급이 벼락 좀 맞는다고 다칠 자들이던가? 오히려 베어 낼 거 같은데.”
중년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물었다.
“그런 거 아니면 왜들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가서 그러죠. 유력 후보라도 떨어진 게 아니면.”
“저길 보게.”
중년인은 남자의 질문에 설명해 주는 대신, 그저 손가락으로 홀로그램을 가리켰다. 남자의 시선이 그 끝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눈이 크게 떠졌다.
“……29.17……?”
[갑 전 4급 출전자 단테: 29.17 대 1]
홀로그램에서는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을 30이라는 수치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숫자를 계속해서 바꾸고 있었다.
* * *
“그 소식 들었나? 벌써 자네 배당률이 27대까지 내려갔다더군. 진심으로 베팅하는 사람보다는 반 장난식으로 소액 투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지만, 그게 어딘가. 그래도 진짜로 자네가 이길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 숫자도 꽤 있는 모양이야. 뭐라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만 골드나 투자한 것 아니냐 이거지. 그중에는 배당률 더 떨어지기 전에 베팅해야 한다며 집까지 판 인간도 있다던데. 사실은 나도 조금 넣기는 했네. 아, 부담 가지라고 하는 소리는 아닐세. 다만 그냥 알아는 둬라 이런 정도로만 받아들여 주게.”
“그렇군.”
라키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무심히 대꾸했다. 이제는 거의 숙련되어 버린 소귀에 경 읽기 스킬. 나는 어느새 옆에서 핵폭탄이 터져도 무념무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수련에 도움이 됐다.
바이론을 상대하기 위해 익혀 둔 내 ‘부동심’까지 뚫고 정신을 갉아먹는 게 라키안의 수다 아닌가.
이걸 옆에서 서라운드로 들어가며 훈련 하다 보면 정신력까지 같이 길러지는 거다.
덕분에 그 짧은 새에 무영보가 지난 한 달 동안 익힌 것 이상으로 발전했다. 이쪽도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측면이 많다 보니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제는 일상생활에 아무 문제 없는 수준까지 되었다. 컵 하나 집으려고 호흡을 몇 번 해야 하는지 일일이 계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아직 전투할 때는 그리 자연스럽게 되지 않지만…… 라키안을 옆에 두고 수련하다 보면 금방 완벽해지지 않을까?
“라키안. 묻고 싶은 게 있다.”
“……해서, 내가 레이튼에 있을 때 말인데…… 아, 뭔가?”
“너는 대체 어째서 갑 전 대기실에 와 있는 거지? 여기는 분명 선수 외에는 출입 금지일 텐데.”
내 말에 라키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입구를 지키는 직원이 꽤 친절하더군. 아는 사람이 안에 있으니 잠깐 응원만 하고 나오면 안 되냐 물으니 허락해 주던데.”
“몇 분이나 대화한 거냐.”
“몇 분? 대화를 어떻게 몇 분 만에 끝낼 수 있겠나. 당연히 시간…….”
“그렇군. 알겠다.”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경기 시작도 전에 그로기 상태다. 데이크가 시합하러 올라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을 녀석이 이런 고초를 더 받을 까닭은 없으니까.
그때 마침 녀석이 경기에서 이기고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옆을 향해 재빨리 말했다.
“라키안.”
“……그래서 그게 그렇게 된 건데…… 왜 그러나?”
“도박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당연하지. 여기에서 나가자마자 왼쪽으로 꺾고 쭉 직진하다 첫 번째 골목길에서…….”
“거기에 가면 오스워드라는 인간이 있다. 그자가 너랑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 하더군.”
라키안은 기꺼워하는 기색이 되었다.
“그게 정말인가?”
“그래. 너같이 유명한 성기사의 무용담을 들어 보는 게 꿈이라 했다.”
“음……. 하지만 곧 자네 시합인데, 역시 내가 남아서 응원해 줘야…….”
“나는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보다는 그쪽이 너의 얘기를 한시라도 빨리 듣고 싶어 안달 난 것 같더군.”
“그럼 어쩔 수 없구만.”
라키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말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는 재빠른 움직임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밖에 나가 뛰놀고 싶어 하는 개새끼마냥 안절부절못했다.
“시합 잘 치르게. 내가 밖에서도 응원하지.”
“그래. 오스워드는 쑥스러움이 많은 인간이라 너와 대화 나누고 싶다 한 걸 부정할 수도 있다. 그냥 내숭 떠는 거니 신경 쓰지 말도록.”
“감안하도록 하겠네.”
그리고 빠르게 걸어 나간다. 거의 달리기와 비슷한 속도다. 주위 선수들이 선망에 가까운 시선으로 나를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자가 여기까지 왔었군요.”
목소리에 옆을 돌아봤다. 어느새 다가온 데이크가 혐오스런 눈으로 라키안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의감 넘치는 기사가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들다니, 라키안 너는 대체…….
“걱정 마라. 다음부터는 오지 않을 테니까.”
“……단테 경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저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신 분이니. 하지만.”
데이크가 눈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넋 나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마 선수 대기실까지 와서 그런 짓을 할 줄이야……. 정말 정도를 모르는 분이로군요.”
“조금 그렇긴 하지.”
“단테 경은 경기에 지장 없으시겠습니까? 이제 바로 나가야 할 텐데요.”
“나는 익숙해져서 괜찮다.”
“역시…….”
존경의 감정이 담긴 시선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데이크 것뿐만이 아니라, 대기실에 있던 선수 전원으로부터다.
하지만 나는 저 눈빛들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만큼 나도 내가 대견했으니까.
“아, 드디어 단테 경 차례로군요.”
“그렇군. 다녀오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데이크와 다른 기사들이 격려의 말들을 건네 왔다.
데이크야 그렇다 쳐도, 쟤네는 여태 나랑 눈 마주치는 것도 꺼렸었는데.
이것도 라키안의 덕인가?
나는 그 인사들을 하나하나 고개 끄덕여 응답해 줬다. 경기장 위에는 이미 상대가 올라와 나를 띠꺼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사회자가 나와 녀석을 번갈아 보더니, 크게 소리쳤다.
“드디어! 여러분들이 가장 기다렸을 경기! 화제를 몰고 다니는 4급! 단테 경과, 무려 3급! 하비스 경의 시합입니다!”
와아아!
사회자가 환호성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그는 그 모습을 보더니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메인 매치는 제가 시간을 좀 끌어 줘야 하지만…… 저도 도무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군요. 그냥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함성이 더 커진다. 사회자는 만족스레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럼…….”
깃발이 내려간다.
“시작!”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