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98)
끼이익.
단테가 나가고, 오스워드는 한동안 말없이 닫힌 문을 바라봤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그 자취를 감출 때쯤. 그는 결국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재밌는 놈이군."
중얼거린 오스워드가 1층으로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바로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진다. 모두들 궁금한 것이다. 그 아이언의 제자라는 놈이 정말로 만 골드를 본인에게 베팅했는지.
오스워드는 그 간절히 바라보는 눈빛들을 전부 무시하고 건물 밖으로 향했다. 그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 같이 불평을 터뜨렸다.
"시X, 그래서 진짜 베팅한 거야 만 거야?"
"그러게나 말이다.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꼬나보면 불쌍해서라도 한마디 해 주고 가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자기 자신한테 베팅하는 게 가능하던가?"
"모르지. 기사들은 보통 체면 상하는 일이라고 아예 여기는 발도 안 들이잖아."
"그 단테란 놈은 그럼 왜 온 건데?"
“미친 새끼 생각을 어떻게 알아. 아이언 제자도 자칭한 놈이 뭔들 못하겠어? 거 돈이 그렇게 썩어 넘쳐나면 나한테나 좀 주지.”
단테에 대한 주제로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종국엔 경기에 관한 얘기가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본래라면 주위를 환기시켜 베팅을 독려해야 할 직원들도 슬쩍 눈치를 보며 사람들이 하는 대화에 귀만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사람인지라 흥미가 돋는 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 단테란 인간의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 말이다.
안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밖으로 나온 오스워드는 담담한 얼굴로 건물 외벽에 딸린 창고로 들어갔다.
말이 창고지, 정작 보관되어 있는 물건들은 거의 없었다. 외부에 경비도 없는 장소인데 많은 게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나.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내부 지하에 있는 비밀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대체 이런 걸 왜 지었냐 묻는 사람도 많았지만, 오히려 내부 금고가 시선 끌기 위한 위장용이라는 사실을 아는 건 오직 오스워드 뿐이었다.
“위대한 존재가 영면에 드신 날, 그 피를 이은 아이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으니. 그 비는 곧 원망이 되어 온 대지를 적시리.”
의미 알 수 없는 말을 뱉음과 동시에 한 구석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생겨났다.
뭔가 화려한 이펙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슨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양 그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마법으로 재현하는 게 불가능한 은밀함이었지만, 오스워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층계를 밟고 내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그는 잠깐 수없이 늘어진 플라스크와 비커에 시선을 줬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작은 방의 공간을 혼자 절반은 차지하는 커다란 금고.
비밀번호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여기 들어온 시점부터 보안이니 뭐니 할 시점은 지났으니까. 오스워드는 그 안에서 푸른색 액체가 든 유리병 하나를 꺼내 뚫어져라 쳐다봤다.
용의 피.
마시는 자에게 인간의 것을 초월한 재생 능력을 준다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귀물(貴物).
이제는 세상에 그 존재조차 아는 이가 드문 물건이다.
‘그런데 잘도 알았단 말이지…….’
그뿐만이 아니다. 나가기 전 그에게 한 말을 떠올려 보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잘 보살피고 있으라고?’
주어는 없었다. 오스워드는 피식 웃으며 방을 나가 실험실의 중앙으로 향했다.
유리로 만들어진 커다란 돔.
그 안에는 작은 침대 위에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 하나가 쿨쿨 잠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 보이지만, 저러고 눈을 뜨지 않은 게 벌써 수백 년째다.
그는 이미 5대째 이어 저 대륙 최후의 용(龍)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보존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군.’
저 인간이 아닌 생물체는 식사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그러면서 오랜 세월 움직임도 없었으니 사실 금고에 보관하고 있는 유물들과 다를 것도 없다.
오스워드는 한동안 말없이 침대 위의 여자아이를 지켜보다가, 용의 피를 품에 챙겨 넣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오스워드에게는 매우 안타깝게도, 만약 그가 1분만 더 자리에 남아 있었더라면 굉장히 신비한 광경을 봤을지도 모른다.
꿈틀.
수백 년간 미동도 없던 손가락이 잠깐이지만 움찔거리는 장면을 말이다.
* * *
드디어 토너먼트 당일이 밝았다.
갑 전과 을 전은 각각 다른 경기장에서 펼쳐지는데, 아무래도 갑 전의 인기가 떨어지다 보니 이 안의 관객석은 보통 텅텅 비어 있는 편이다. 라고 다시 여관을 찾아온 라키안이 말했었다.
나는 그 끔찍한 과거를 떠올리며 위를 바라보았다. 라키안의 말과는 달리 아직 경기 시작까진 꽤 시간이 남았는데도 자리가 벌써 절반이나 차 있다. 그들 대부분은 나를 힐끗거리며 뭔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저자가 이번에 본인한테 만 골드나 베팅했다는 그 미친 새낀가?”
“쉿! 아무리 미친 새끼여도 무려 4급 기사야……! 이 정도 목소리는 다 들을 수 있다고!”
“……자네 목소리가 더 큰 거 같은데.”
“아이언이 저놈을 찾아와 족칠 때까지 얼마나 걸릴 거 같나?”
“그분 소식 끊긴 지 10년 가까이 돼 가지 않던가? 죽은 거 아니냐는 소문도 있던데.”
“만약 그 인간이 정말 죽은 거라면…… 나는 내일 바로 죽음의 신 신전에 불을 지를 걸세.”
“……대체 왜? 설마 자네 그분의 팬이었나?”
“아니. 그 미친놈이 죽었다는 말을 믿는 것보단 사실 죽음 같은 건 없었다고 믿는 게 더 현실성 있으니까.”
“……그것도 그렇군.”
별로 좋은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다.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저렇게나 모여들었단 뜻 아닌가.
도박장에서 좀 무리하게 어그로 끌었던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거 같은데.
보고 싶은 만큼 보라고 가장 눈에 잘 띄는 벤치에 가 앉아 줬다. 관중들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시선까지 전부 나를 향한다.
솔직히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겉으로는 똥 폼을 잡은 채 오연히 그들을 마주 봤다.
대부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는데, 그중 몇몇은 오히려 같잖다는 듯 코웃음 치며 눈썹을 찌푸렸다.
당연히 3급들이다. 숫자는…… 대충 여섯인가. 생각보다 훨씬 적다.
아마 데이크가 참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레 포기한 인간이 많은가 보다. 이 정도면 확실히 오스워드가 승부 조작을 의심해 볼 만도 하지.
녀석들 하나하나를 번갈아 보는데, 한 놈이 환히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 왔다.
데이크였다.
“…….”
쟤는 나랑 언제 봤다고 계속 친한 척인지 모르겠네.
무심하게 외면해 주고 눈을 감았다. 전혀 반응이 없자 재미없어졌는지 시선들도 금방 흩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오래들 기다리셨습니다!”
어느덧 경기장 중앙에 사회자가 올라와 있었다.
“이번으로 벌써 36회를 맞이하는 아르곤 토너먼트 갑 전에 잘들 오셨습니다. 제가 여기 사회를 맡은 지 4번째인데…… 이렇게 관객이 많은 건 처음 보는군요. 뭐, 그 이유를 모르는 분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는 살짝 웃으며 내 쪽을 향해 눈짓했다. 관객들이 그 시선을 따라 내려오더니 가볍게 피식거린다.
“아무튼, 여기 제가 떠드는 꼴을 보려고 모인 분들은 아무도 없겠죠? 그럼 지체 말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자, 첫 번째 시합은 1조의 그레고리 경과 데미안 경입니다.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짝짝짝짝.
그렇게 시작된 경기들은 대부분 볼품없었다. 등급 차이가 나는 경우에는 보통 낮은 쪽이 단 한 방에 나가떨어졌고, 동급인 경우에는 을 전에 비해 긴박감이 떨어졌다. 갑 전이 왜 인기가 없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관객석의 사람들도 슬슬 지루함에 하품이나 하는 중이었다. 그냥 나가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군상들도 보인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여러분이 갑 전에서 아마 두 번째로 기대하셨을 경기입니다! 데이크 경과 머라이노 경의 결투! 두 분 다 3급에 오른 지 오래된 분들이시죠.”
떠나려 하던 관중들이 바로 엉덩이를 붙인다. 나도 궁금하던 시합이라 자세를 바로하고 위로 시선을 돌렸다.
“아…… 강력한 우승 후보들이 겨우 첫판부터 붙게 되다니. 정말 저희 측에도, 선수들에게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들은 무슨. 머라이노 표정 안 보이나? 딱 봐도 똥 씹은 게, 차마 첫 시합부터 기권 내기는 너무 자존심 상해서 억지로 올라온 거 같구만.
뭐, 사회자도 몰라서 한 말은 아닐 거다. 여기에서 그 누구도 데이크의 패배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문제는 얼마 만에 이기느냐, 그거겠지.
아무리 격차가 있다지만 동급끼리 한 방에 나가떨어질 리도 없으니 말이다.
경기는 오래 끌지 않고 바로 시작됐다.
머라이노가 거리를 벌리고, 데이크가 따라붙는다. 황급히 검을 들어 막아 보려 하지만, 둘의 실력 차이가 너무 났다.
데이크는 그리 힘들이는 기색 없이 공세를 취하는데, 머라이노는 그걸 겨우 막기 급급했다.
같은 등급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일방적인 대결.
결국 수십 합이 되기도 전에 머라이노가 검을 놓치고 순순히 항복했다.
“와아아!”
“지금 봤나? 같은 등급인데도 이기는 데 3분도 걸리지 않았어!”
“역시 이번 갑 전은 데이크 경의 승리로 확정이구만.”
그런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데이크가 관객석에 화답하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보고 환히 웃는다.
진짜 쟤는 왜 친한 척인지 도무지 모르겠네.
바로 외면해 버리고 속으로 방금 본 결투를 복기해 봤다.
화려하진 않지만, 안정적인 검술. 아마 라이놀이 3급에 오르면 딱 저와 비슷한 느낌 아닐까.
적어도 이거 한 가진 알겠다. 본 실력만으로 붙으면 내가 이길 수 없다. 검의 힘이나 뇌정석. 거기에 아지프의 약속까지 쓰면 모르겠지만, 그랬다간 나중에 리안으로 특정되어 버릴 거다.
결국 무영보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소린데……. 승률은 정확히 못 재겠다. 결국 싸워 보는 수밖에 없나.
그때 사회자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이번 경기는…… 드디어! 여러분이 가장 기대하셨을 화제의 사나이! 자칭 아이언의 제자, 단테 경입니다! 이분은 그뿐만이 아니라 본인에게 만 골드를 건 것으로 또 유명해졌죠. 모르긴 몰라도, 여기 관중분들의 9할은 단테 경의 시합을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검을 챙겨서 위로 올라갔다. 반대쪽에는 이미 누군지 모를 상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은 나를 보더니 비릿하게 웃음 지었다.
“네놈이 그 유명한 단테라는 놈이군. 한번 보고 싶었다. 얼마나 대단한 녀석이길래 그렇게 시선을 끌고 다니나 싶어서.”
“…….”
“뭐, 실력에 나름 자신은 있으니 그러고 다니는 모양이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군. 나는 4급 중 최상위다. 2년 안에 3급으로 올라갈 자신도 있지.”
“…….”
“말이 없군. 겁먹은 건가? 그러게 왜 만 골드나 걸어서…… 차라리 나한테 주지.”
나는 담담한 얼굴로 사회자만 보고 있었다. 쟤도 말이 많고, 얘도 말이 많네. 시작 신호는 언제 주는 거지.
20초쯤 흘렀을까. 드디어 사회자가 깃발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탓, 바로 발을 박찼다.
“……그러니까, 만 골드면 할 수 있는 게 대체…… 응?”
상대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이미 코앞까지 도달한 상태다. 나는 그대로 검을 옆면으로 휘둘렀다.
“잠…… 꺼억!”
쾅! 말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긴다. 녀석의 몸은 어느새 관객석 아래 박혀 있었다.
“미안하군.”
나는 검을 수납하며 무심히 말했다.
“무슨 소리 하는지 한마디도 안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