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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97화 (97/225)

너의 코드가 보여 (97)

“…….”

도떼기시장 같던 도박장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가득 찼다. 수천 명은 돼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 나와 테이블에 올라간 자루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어…….”

그 무거운 정적을 가장 먼저 깬 건 여직원이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제가 잘못 들은 거 같아서요. 베팅 금액, 천 골드가 맞나요?”

어떻게 들으면 만이 천이 되지.

“잘못 들은 게 맞군. 천 골드가 아니다.”

“아, 역시…….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백 골드 접수 도와드리…….”

“백 골드도 아니다.”

말을 끊으면서 끼어들었다. 만이 백까지 갈 줄은 몰랐다.

“똑똑히 들어라. 다시 얘기할 생각 없으니까. 단테에게 1만 골드. 전액 일시불이다.”

“…….”

내 말에 여직원의 얼굴이 멍하게 바뀌더니, 자루를 들어 보려는지 손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한참을 낑낑대는데, 자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금화 1개 무게가 50그램 정돈데, 저건 그런 게 1만 개 모였으니 50만 그램. 즉, 500킬로그램이란 소리다.

보통 사람이 들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심지어 평범한 자루로는 담을 수도 없어서 마법 처리까지 된 거다 저거.

막말로 그냥 들고 흔들어대기만 해도 무기로 쓸 수 있겠지. 분쇄추 같이.

“……흑.”

결국 드는 걸 포기했나 보다. 여직원은 반쯤 울상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죄, 죄송합니다. 이건 제가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 같아서…….”

“그럼 상급자를 불러라.”

“네, 네……. 부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직원이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고, 그와 동시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아 있던 건물이 금세 불타올랐다.

“……지금 저기 만 골드가 들어 있다는 건가?”

“단테, 단테가 누구야? 나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이번에 갑 전에 참가한 아이언 제자라는 인간 있잖아. 그 사람 이름이 아마 단테일 텐데.”

“미친 새끼였군.”

아무리 그래도 다 들리는데 욕설은 좀 심하지 않나. 목소리가 나온 곳을 살짝 노려봐 주자, 말을 꺼냈던 남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이 모습 효과 좋은걸. 그냥 앞으로 단테로 살아 버릴까. 리안은 아무래도 좀 순해 보이는 면이 있어서 지금도 가끔 무시당하는 판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아까 내게 열심히 설명을 해 준 중년인이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갑자기 존댓말이다. 면상보다 효과가 좋은 건 역시 금융치료인가.

“혹시 단테 경의 친구분이라던가…….”

“친구는 아니다.”

“그럼 대체…….”

“본인이지.”

중년인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더니 눈동자만 굴러다닌다. 아마 아까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나 본데.

“말해 두지만, 나는 자살 희망자도 아니고 미친 새끼도 아니다.”

“죄, 죄송…….”

“이번은 용서해 주지. 설명해 준 것도 도움이 됐으니까.”

주머니에서 10골드를 꺼내 중년인에게 던졌다. 그는 멍한 얼굴로 그걸 잘도 받아 냈다.

“이, 이건?”

“수고비다. 간수는 알아서 할 수 있겠지?”

탐욕스런 눈으로 그의 손에 쥐인 골드를 바라보고 있는 인간들을 눈짓하며 말했다.

아르곤은 치안이 좋은 편이지만, 눈앞에 놓인 일확천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얼간이는 세상 어디든 있는 법이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자신 없다 하면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중년인은 그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예, 예! 보잘것없는 설명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알면 됐다.”

“예! 그, 부디 승리…….”

“본인도 안 믿는 아첨은 필요 없다. 더 볼일 없으면 그만 가 봐.”

그는 거듭해서 고개 숙이며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라가려는 자들이 몇 있어 골드를 튕겨 기절시켜 버렸다. 그렇게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지자, 똑같이 움직이려던 놈들이 바로 걸음을 멈춘다.

나는 그들을 정확히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1분 동안은 아무도 밖에 나갈 수 없다.”

“…….”

폭언과도 같은 말이었음에도 아무도 반박하는 인간이 없다. 심지어 돈이 땅에 굴러다니는데 모두 긴장해서 주우러 가지도 못한다.

내가 그따위 푼돈엔 관심 없다는 듯 고개 돌리자, 그제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골드로 달려들었다.

“꺼져! 이 골드는 내 거야! 내가 먼저 집었잖아!”

“지랄을 하네. 내가 네 손모가지 잡았으니 넌 내거냐? 당장 안 놔!”

건물엔 부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아수라장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꽤 큰 소란이 됐다.

……내가 저지른 일이지만,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뭔가 영화에 나오는 악역 재벌 3세가 된 느낌이라 해야 하나.

역시 성격이 나랑 맞는 거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이런 식으로 화젯거리가 있어야 소문이 더 빨리, 더 멀리 퍼지지 않겠나.

여기 온 목적이 돈뿐만은 아니니까.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뒤쪽엔 아까 달려갔던 여직원이 숨을 헥헥대며 서 있고, 그 앞에는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이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NPC-1-287-4]

아르곤의 승부사 오스워드.

지금 시점이면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저건 자네가 저지른 건가?”

“나는 일어날 범죄를 예방했을 뿐이다.”

“저게?”

오스워드가 이제 치고받기까지 하고 있는 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건물을 지키던 경비들이 진압하러 다가가는 모습도 같이 보인다.

나는 그 현장을 무심하게 일별하며 말했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니지 않나.”

“거, 기준 한 번 관대하기도 하군.”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 짓더니, 내가 테이블 위에 놓아 뒀던 자루를 가리켰다.

“저건 자네가 들고 따라오게. 우리 직원들 허리를 죄다 나가게 하고 싶은 게 아니면.”

* * *

“그래서, 자네가 그 단테 본인 맞지?”

3층짜리 건물에 유일하게 딸린 독방. 오스워드가 그 한쪽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그냥 문 옆의 벽에 기대 섰다.

“앉지 그러나?”

“이게 더 편하다. 용건이나 말해.”

“흠……. 솔직히 자살 희망자인 줄 알았는데, 점점 자네가 아이언의 제자가 맞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군. 싸가지가 어지간히도 없어야지.”

오스워드가 피식 웃으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는 내가 책상 위에 던져 둔 자루 안을 살핀다.

“위조 없이 전부 진짜군. 이 정도 금액을 아무렇지 않게 낼 수 있는 기사는 몇 생각나지 않는데…….”

“베팅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나 말해. 여기는 원래 돈 한 번 거는 데 잡설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

내 재촉에 오스워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사안이 사안이니까. 한 번에 이렇게 많은 금액이 걸리는 것도 처음이고, 그걸 본인에게 베팅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네.”

그러더니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게다가 사실 토너먼트에서 본인한테 베팅하는 게 말이 되나? 상대와 짜고 승부 조작을 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래서, 내가 나한테 거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네. 그게 불가능하다는 규칙은 없거든. 적어도 지금은.”

오스워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문제가 될 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그 짓을 아직 금지하지 못한 이유가 뭔지 아나?”

알고 있다. 이건 게임에 나오는 내용이니까.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무심히 답했다.

“글쎄.”

오스워드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갑자기 씨익 웃는다.

“그야 전례도 없는데 승부 조작이 일어날 수도 있다며 미리 금지해 버리면 빌어 처먹을 기사 놈들이 당연히 들고 일어날 테니까. 이유야 뭐, 기사의 명예를 뭘로 보냐 이런 거겠지.”

그가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얼굴은 웃는 채지만, 그 눈은 피곤에 절어 있다.

“그러니 알아도 금지할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한 번의 사례가 생길 때까지 방치할 생각이었네. 전례가 있으면 금지시켜도 반발하지 못할 것 아닌가. 어느 정도 손해는 내가 감수해야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결국 나한테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내 물음에 오스워드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이번 갑 전에 출전하는 3급 전부와 짰나?”

“…….”

“4급의 실력으로 갑 전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런데 본인한테 만 골드란 거금을 낸다? 솔직히 승부 조작밖에 생각나지 않네.”

“4급을 상대로 3급이 봐주면 어차피 관객들이 전부 눈치챌 텐데.”

“눈치챌 수 없는 방법도 있지.”

오스워드가 다시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대답했다.

“전부 기권해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있는 법이니까.”

“…….”

“게다가 그렇게 이긴 4급 우승자가 아이언의 제자라는 타이틀까지 들고 있으면 더할 나위 없지 않겠나? 모두 새로운 스타의 탄생에 정신을 못 차릴 테니까.”

요컨대 이런 얘기다. 지금 오스워드는 내가 아이언의 제자를 사칭하고 갑 전의 3급들과 작당하여 한탕 벌어먹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완전히 헛짚었지만, 거기까지 다다르는 통찰력은 놀랍다. 그것도 보고 들은 지 10분도 안 지난 시점에 말이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오스워드는 담담히 말했다.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할 생각이었지, 수십만 골드를 허공에 날려 버릴 생각은 아니었어. 그러니 내가 제안 하나 하지.”

“제안?”

“이대로 베팅하지 않고 떠나면 아무 조건 없이 천 골드를 주겠네.”

오스워드가 갑갑한 한숨을 쉬었다. 이게 타협의 마지노선이라는 것처럼.

“그냥 그 정도로 만족해. 그럼에도 계속하겠다 하면, 나는 신용을 좀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 베팅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니까. 수십만은 너무 큰 손해거든.”

“…….”

저 정도면 거의 완벽한 대처다. 물론 그의 예상이 맞았다면 말이다.

4급은 3급을 이길 수 없다는 그 절대명제.

저렇게 똑똑한 인간조차도 그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거다. 이 세계에서 등급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천 골드는 받지 않을 거다.”

“……결국 둘 다 손해만 보는 방식으로 가자 이건가?”

“그런 게 아니야.”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쭉 폈다.

“나는 승부 조작을 꾸민 적이 없다.”

“……뭐?”

“내가 이길 거라 생각해서 나한테 걸었을 뿐이란 소리다. 애초에 갑 전에 나오는 3급이 전부 몇 명인지도 몰라.”

그 말에 오스워드가 내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곤 허, 헛기침을 뱉는다.

“진심인 거 같군. 그냥 미친놈이었나?”

“그런 건 댁이 고려할 바가 아니고. 아무튼, 이제 나한테 베팅하는 건 아무 문제도 없는 거겠지?”

그는 조금 고민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완전히 믿을 순 없어. 혹시라도 상대가 기권을 하면 어떡할 텐가?”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 4급한테 지는 게 쪽팔려 도망칠지 내가 어떻게 아나?”

“……자신감이 과하군. 아무튼,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역제안하지.”

나는 그를 빤히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토너먼트에서 최소 2명의 3급을 기권 없이 꺾는다. 물론 승부 조작 같은 건 없이 말이야. 이런 조건이면 충분하겠지?”

“…….”

오스워드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조건이라면 뭐. 대신 계약서에 명시해야 하네.”

“상관없어. 하지만, 나도 보상 한 개 정돈 더 추가하겠다.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받은 데다, 원래라면 쓸 필요도 없는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니 말이야.”

“인정하지. 좋아, 원하는 게 뭔가?”

이거 생각보다 잘 통하는데.

나는 속으로 씨익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용의 피.”

순간 오스워드가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 뭐라고 했지?”

“용의 피라 했다.”

“그걸 어떻게…….”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경악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만약 내가 우승한다면,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용의 피를 내게 넘겨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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