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96)
아르곤 토너먼트가 열리는 베른의 슈비츠 거리. 도시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가게들만 모여 있다는 그 부촌에서, 데이크는 한 여관을 찾고 있었다.
‘그 아이언의 제자라는 인간이 여기 어디 있다고 들었는데…….’
이름이 단테라던가. 대다수 사람들은 그냥 미친놈이라 여기는 모양이지만, 데이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고 싶으면 편히 갈 수 있는 방법이 널렸는데, 왜 굳이 벌주를 자진해서 마시겠나? 그것도 4급이나 됐다는 인간이.
잃을 거 없는 놈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그렇게 여기기에는 그 실력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틀림없는 진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가게 이름까지 듣고 올 걸 그랬나.’
끝없이 늘어진 가게들을 보며 데이크가 크게 한숨 쉬었다. 평상시 같으면 마력이라도 탐지해 보겠는데, 토너먼트 기간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기사 급이 넘쳐난다.
당장 느껴지는 4급의 기운만 수백 명.
이중에서 아이언의 제자가 누구인지를 알아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냥 경기 때나 봐야겠군.’
그가 고개 저으며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근처 가게에서 한 무리의 기사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망쳐 나왔다.
대부분 5급이지만, 일부 4급도 보인다.
‘……뭐지?’
저런 실력을 지닌 자들이 저렇게 혼이 빠진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압도적인 적을 홀로 상대할 때나 저리할까.
의아해진 데이크가 그들이 빠져나온 여관 안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바로 아는 얼굴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침묵의 라키안?’
직접 안면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는 몇 번 들었다. 이 시대에 묵언수행을 자진해서 하는 흔치 않은 성기사라던가. 그런 신실한 자가 있다니 감탄했던 기억도 같이 떠오른다.
‘헌데 왜…….’
데이크는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꾸며진 식당.
그 안에는 널찍한 공간이 무색하게 몇 사람만이 남은 채였다. 종업원 두셋과 라키안, 그리고 누군지 모를 검은 머리의 사내가 하나.
지금은 사람들이 가장 붐빌 점심이다.
당연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이런 경험이 많은 데이크는 곧바로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라키안 경이 기세를 펼쳤군.’
기세. 본신의 마력을 뿜어내 주변에 압박을 가하는 상급 기술이다. 그 효용성에 비해 소모되는 마력이 너무 커서 실전에선 거의 쓰이지 않지만, 이런 곳에서 자기 실력을 뽐내고 싶어 환장하는 인간들이야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설마 그 침묵의 라키안 경이 그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기세는 일부 도시에선 범법으로까지 취급하는 형편 나쁜 기술이다. 그런 걸 성기사나 되는 인간이 평범한 식당에서 써대고 있으니…….
소문은 결국 소문일 뿐이란 건가.
설마 저리 후안무치하고 허세에 찌든 자일 줄은 몰랐다.
‘괜히 더러운 꼴만 봤군.’
데이크는 쯧, 혀를 차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려 했다. 가서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베른에선 불법도 아닌 걸 굳이 따지는 건 너무 오지랖인 거 같아서다. 일반인에게까지 썼으면 대륙법 위반이지만, 종업원이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렇진 않을 것 아닌가.
그렇게 발걸음을 떼려던 순간. 그는 그제야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저 남자는 뭔데 저리 멀쩡한 거지?’
마력을 탐지해 보니 분명 4급 기사 수준. 저런 실력으로 3급의 기세를 넘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만큼 그 힘은 더 강하게 받았겠지.
그런데도 남자의 표정은 무심 그 자체다.
아니, 정확히는 힘든 기색을 보이긴 하지만…… 그건 괴로움이라기보다는 귀찮음에 가까워 보였다.
‘……4급이 3급의 기세를 흘려 넘기면서 귀찮음으로 끝난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 보통은 아까 뛰쳐나간 기사들처럼 새파랗게 질리는 게 당연하다.
심지어 침묵의 라키안이라면 경지에 오른 지도 꽤 지난 완숙한 기사 아닌가. 정신적으로 성숙한지는 둘째 치고 말이다.
데이크는 그 흑발의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흠칫했다.
‘……흑발?’
오기 전 들었던 아이언의 제자 단테의 용모파기. 분명 흔치 않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싸늘하고 냉정해 보이는 미남이라 했다.
저 모습은 그 얘기와 완전히 일치해 보인다.
‘저자가 그자군.’
데이크는 확신했다. 3급의 기세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면서 외모까지 일치하는 사람이 세상에 둘이나 있지는 않을 테니까.
‘……들어가 볼까?’
아이언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아무리 미친개니 뭐니 불린다 해도 제국을 무너뜨린 일등 공신 아닌가. 그런 사람의 제자라면 뭐라도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지금 들어가긴 타이밍이 좀 그래 보인다는 거다. 그가 잠깐 고민에 빠진 사이.
이야기가 끝났는지 단테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좋군. 이제 들어가서 말을 걸면…….’
생각이 끊긴다. 그 아이언의 제자가 완전히 일어나기도 전에 다리를 휘청였기 때문이다.
‘역시 3급의 기세를 완전히 넘기진 못했군.’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을 뿐이다. 데이크의 눈이 동정심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던 라키안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것이 보였다.
‘가증스러운 놈……!’
본인이 저렇게 만들어 놓고 어찌 저리 뻔뻔하단 말인가.
데이크의 안에서 라키안에 대한 평가가 다시 한 단계 내려갔다. 길 가던 똥개 수준으로.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라키안을 노려보다가,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기색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아이언의 제자, 단테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나를 눈치챘다고?’
분명 창가에 가까이 붙어 있긴 하나, 그 기색은 완전히 숨겼다. 단순히 들어오려는 손님 중 하나로 여기는 게 당연하단 소리다.
하지만 저렇게 뚫어져라 보는 건 정확히 그가 3급 기사라는 걸 알아챘다는 뜻이다. 본인보다 약한 자에게 저리 관심을 가질 리는 없으니 말이다.
‘……대단하군.’
고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인내력에 저런 관찰력까지. 과연 수십 년 만에 나타난 아이언의 제자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자이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 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지.’
기세를 받아 내는 것만으로 모든 기력을 쏟지 않았겠는가. 어차피 아직 토너먼트도 열리지 않았으니 기회는 충분할 거다. 데이크는 단테를 향해 존경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여 주고,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 * *
다음날이 밝았다. 토너먼트까지 일주일 남은 시점이다. 나는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원래 어제 하려던 일이 있었는데, 라키안이 계속 여관 주변을 서성여서 밖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목적이라는 건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유도 포함해서.
분명 라키안의 수다를 30분이나 버틴 건 내가 유일해서일 거다. ‘초인’쯤 되지 않으면 정신으로 견뎌 낼 수 없는 압력이긴 하지.
혹시나 다시 올까 싶어서 빠르게 옷을 단정히 정돈했다. 원래는 대충 입고 나가는데, 단테라는 캐릭터가 워낙 날카롭고 까칠한 컨셉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이 후줄근한 셔츠 같은 거 입고 돌아다니면 또 이상하지 않나. 별로 리안 때라고 그렇게 다니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복장 점검을 마치고 밖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경기장 옆에 딸린 3층짜리 건물이다.
그 안은 이미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귀족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고, 부유한 상인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으며, 단순한 평민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통일성 없는 군상들이었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건 결국 금액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똑같았다.
“을 전 4조 소속 베리안 경한테 50골드 걸겠어!”
“이봐! 어째서 펠릭스 경의 배당률이 3 대 1밖에 안 되는 거야?”
“이런 씨X. 갑 전에 나가는 하비스한테 걸려고 했는데, 데이크 이 새끼는 왜 갑 전에 와서 지랄인 건데? 을 전에 가도 우승 노려 볼 만한 인간이!”
그렇다. 여기는 도박장이었다. 토너먼트 우승자를 예상하고 베팅하는 인간 경마장.
특이사항이라면 사설이 아니라 아르곤에서 직접 운영하는 거랄까. 요컨대 국가에서 인정한 합법 노름이란 거다.
그 때문인지 시설도 꽤나 본격적이다. 일하는 직원도 많고, 중앙에는 커다란 마법 홀로그램까지 떠 있다. 거기에는 갑 전과 을 전에 참여하는 참가자들의 명단과 각각의 배당률이 몇인지 까지 상세히 나타나 있었다.
어째 여기만 21세기보다 발전한 느낌이네. 이 인간들 어지간히 도박에 진심이군.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즐길 거리가 극심하게 부족한 세계니까.
그런데 토너먼트라는 빅 이벤트에 도박까지 합하면? 말 다 했지. 스마트폰 달고 사는 현대인들도 이건 못 참을 거다.
나는 구석에 서서 중앙의 홀로그램을 쳐다봤다. 어차피 ‘초인’ 덕에 멀리서도 보이고, 저 인간의 파도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고 있는데, 웬 남자 하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자네 여기가 처음인가?”
조금 거만해 보이는 중년인이었는데, 깡이 좋은 것 같았다. 지금 내 모습이 그리 말 걸기 쉬운 면상은 아닐 텐데.
“그런데.”
내 말에 남자가 웃었다.
“구석에 박혀서 멀뚱히 서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 혹시 괜찮다면 내가 설명 좀 해 줘도 괜찮겠나?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여기 터줏대감 같은 거거든.”
진짜 자랑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이 시기에 열리는 토너먼트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 2부 본편이 시작되는 것도 한참 남은 시점이니까.
중년인은 만족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다고 해도 베팅하는 법이나 배당률 보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입구에서 다 설명해 주지 않나.”
“그래.”
“그럼 역시 우승 유력 후보에 대한 설명밖에 없겠군. 이번에 을 전 3급에는 무려 국가기사인 베리안 경이 참가했지. 이쪽은 사실상 승리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야. 자연히 배당률도 적네. 얼마를 걸든 그냥 간식비밖에 못 건져. 그러니 내가 추천하는 건, 을 전 4급…….”
“을 전 얘기는 됐다.”
나는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갑 전에 대한 정보를 듣고 싶군.”
“……갑 전?”
중년인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그쪽은 이번에 데이크 경이 참가했어. 베리안 경도 무조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기사지. 그런 자가 을 전도 아니고 갑 전에 참여했으니……, 사실상 을 전 3급보다 결과가 더 뻔하지 않겠나?”
“그 데이크란 자 외에는 염두에 둘 만한 자가 없나?”
“음…… 얼마 전 3급에 오른 하비스 경이나 몇십 년째 3급 하위에 머물고 있는 머라이노 경이 있기는 한데…… 데이크 경과 맞먹을 수준은 절대 아니지. 아마 그 인간이 갑 전에 온 줄 알았으면 참가도 안 했을 걸.”
“단테는?”
“……단테? 그 미친개 아이언의 제자라는 인간 말인가?”
“그래.”
내 말에 중년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4급이나 돼서 자살을 희망하는 그 미친 새끼 말이지. 거들떠볼 것도 없어. 진짜 만에 하나 정말 아이언의 제자라고 해도 4급이 갑 전에서 우승할 일은 없으니까.”
“그건 내가 판단한다. 단테의 배당률은 얼마지?”
“……여기 자살 희망자가 하나 더 있었군. 패가망신하고 싶은 건가?”
“대답이나 해.”
“거, 뒤지고 싶다면야 무슨 소원인들 못 들어 주겠냐 만은.”
이렇게 싸가지 없이 구는데도 잘 대답해 주는 거 보면 소원 아니어도 잘 들어줄 거 같은데.
“단테의 배당률은 최고 수치인 30 대 1이야. 사실 크게 의미 있는 숫자는 아니지. 어차피 갑 전에 출전하는 4급 이하는 전부다 30 대 1이니까.”
그 말에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한이 있었나. 하긴, 아무리 그래도 국가에서 운영하는 만큼 300 대 1 같은 미친 수치까지 용납하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30 대 1이면 충분하다. 맞추기만 하면 30배로 벌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걸 수 있는 금액에는 제한이 없겠지?”
쳐다보며 묻자,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왜? 한 100골드라도 걸어 보려고? 그런 건 없어. 그래도 진짜 단테한테 걸려는 거면…….”
“그것만 알면 됐다. 고맙군.”
나는 그에게 살짝 눈인사한 뒤 중앙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홀로그램을 둘러싸고 둥그렇게 테이블이 쳐있었다. 그중 여직원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온다.
“어서 오세요. 베팅하러 오셨나요?”
“그래.”
“네. 접수받겠습니다. 베팅하시려는 경기는 어느 쪽이신가요?”
“갑 전.”
“네 갑 전 말씀이시죠? 현재 데이크 경의 배당률은 1.02 대 1로…….”
“데이크한테 걸려는 게 아니다.”
“……예?”
여직원이 놀란 얼굴로 올려다본다.
아무래도 갑 전에 베팅하는 인간은 전부 데이크한테만 걸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단테에게 걸고 싶다.”
“어…… 다, 단테 경 말씀이시죠? 음…… 그분의 배당률은 지금…….”
“알고 있으니 말할 필요 없다.”
“……예 알겠습니다. 베팅 희망 금액은 얼마신가요?”
미친놈이라도 보는 표정이다.
나는 그에 전혀 아랑곳 않고 담담히 말했다.
“단테에게 베팅 만 골드.”
그리고 준비해 온 자루를 테이블에 올렸다.
쿵.
“전액 일시불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