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95)
눈을 뜬 건 해가 중천에 뜬 점심이었다.
이 세계 오고 이렇게까지 늦게 일어난 적은 별로 없는데, 나는 환경이 바뀌면 숙면에 드는 특성이라도 생긴 건가. 얼마 전 야영을 할 때도 오히려 집에서보다 더 잘 자기도 했고.
슬슬 이사라도 가서 생활에 변주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거주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서 조금 더 큰 집이 필요하다 싶기도 했으니까.
일단은 생각만 해 두고, 여관 밑으로 내려갔다.
상당히 화려하게 꾸며진 식당. 심지어 식사도 뷔페식이다.
이건 호텔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일박 5실버 가치는 한다고 해야 하나.
“안녕하십니까, 손님. 식당 이용료는 1실버입니다.”
……식비 미포함이었구나. 생각보다 꽤 비싸다. 1실버면 대충 10만 원 돈 하니까.
물론, 지금 내 기준에선 푼돈이나 마찬가지다. 군말 없이 돈을 건네고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에 있는 이용객 대부분은 기사들로, 역시 토너먼트에 참가하기 위해 온 듯했다.
쟤네들 뷔페로 배 터지게 먹이려면 1실버 정도는 받아야 하는 게 맞기는 하겠네. 보니까 몇 명은 그걸로도 부족할 거 같은데.
별로 내가 알 바는 아니라 신경 끄고 육류 위주로 담아 자리에 앉았다. 정신없이 절반쯤 해치우자, 그제야 주변의 말소리가 슬쩍 들리기 시작한다.
“자네 그거 아나?”
“뭐 말인가?”
“이번 토너먼트는 데이크 경도 참여한다더군.”
데이크?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다가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아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말을 받던 기사가 놀란 얼굴을 했다.
“5년 안에 국가기사가 될 것이 확실하다던 그 데이크 경 말인가?”
“그래. 5년 안에 국가기사가 될 것이 확실하다는 그 데이크 경 맞네.”
“그 양반이 대체 왜? 요즘 실적 쌓느라 바쁘다 들었는데.”
“글쎄. 이유야 나도 모르지. 그냥 변덕일 수도. 그보다 더 재밌는 건 따로 있어.”
“또 뭔가?”
“데이크 경이 이번에 을 전이 아니라 갑 전에 참가신청서를 냈다더군.”
……뭐?
“……자네가 뭘 잘못 들었겠지. 그쯤 되는 양반이 굳이 갑 전에 참가할 이유가 뭐 있나?”
“그것도 나야 모르지. 아무튼, 확실할 거야. 내가 어제 접수받던 기사와 조금 아는 사인데, 그 녀석한테 직접 들은 얘기거든.”
“허, 그럼 정말 거기 출전한다는 거군. 이번에 갑 전에서라도 우승해 보려고 벼르던 하위 3급들이 피눈물을 흘리겠는걸.”
“그걸 노린 걸 수도 있지.”
둘은 을 전에 참가하는지 태평하게 웃었다.
하긴, 둘 모두 5급이니 갑 전에 참가했어도 별생각 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어차피 그 실력으로 우승을 노린 건 아닐 거 아닌가.
그에 반해 나는 좀 심란해졌다.
3급 중하위 수준은 이길 자신 있지만, 데이크라면 좀 애매하다. 지금 시점에서도 아마 3급 중상위는 될 테니까. 같은 등급임에도 그 차이는 꽤 크다.
성인 남성과 청소년 정도의 격차라 해야 하나.
꼭 이기는 게 목표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우승하는 편이 소문 퍼지기엔 더 좋으니까.
내심 한숨 쉬는데, 둘의 화제가 내 이야기로 넘어갔다. 정확히는 내 위장 신분 쪽.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고, 미친 새끼 하나가 색다른 자살 방법을 고르는구나 하는 게 다였다.
아마 진짜 제자일 거라고 믿지 않아서일 거다. 그도 그럴 게, 아이언한테 제자가 없다는 얘기는 유명하니까.
녀석이 안 받아주거나 배우려는 학생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배우려는 사람도 많았고, 아이언도 그걸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인간 대부분이 한 달도 안 돼서 죽거나 도망쳤다는 거다.
그렇게 겨우 살아 나온 사람 중 하나는 저 또라이 새끼가 그냥 우릴 죽이려 했다며 고소하려다 아이언한테 처맞고 반병신이 됐다.
그 이후로 녀석의 제자를 자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다.
아무튼, 그만 일어나야지.
괜찮은 소식도 들었고, 식사도 끝났으니까.
하지만 그다음으로 들리는 이야기에 나는 엉거주춤 다시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성기사도 하나 참가했다더군.”
“성기사? 특이한걸. 보통 이런 대회에는 잘 안 나오는 작자들인데 말이야. 혹시 그자도 갑 전인가?”
“아니. 을 전이라 하던데. 꽤 유명한 자네.”
“유명해? 그게 누구인가?”
“침묵의 라키안. 자네도 몇 번 들어 본 적 있지?”
……누구? 아니, 그보다 뭔 묵?
어이가 없어서 이어질 말에 귀 기울이는데, 식당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쟤가 왜 여기 있어.
* * *
“그대가 그 황제 살해자, 미친개 아이언의 제자라고 들었네. 음. 솔직히 반신반의했는데, 분위기를 보니 정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내가 성기사 아카데미에 있었을 때 딱 자네와 같은 분위기를 내뿜는 동기가 있었지. 아쉽게도 나중에 이단 심문관 쪽으로 전향을 했지만 말이야. 그 친구와 함께라면 어딜 가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가끔 지나치게 밝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라 그 녀석과 붙어 있으면 서로 중화가 될 거라 여겼거든. 왜 갑자기 이단 심문관의 길을 택한 건지 아직도 알 수가 없어. 분명 성격이 조금 어두운 편이긴 했어도 훌륭한 성기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하더니.”
“나는 왜인지 알 거 같은데.”
“그게 정말인가? 자네는 그 친구 얼굴도 못 봤을 텐데……. 아, 그리고 혹시 오해는 하지 말게. 나는 뭐 딱히 이단 심문관이 성기사보다 나쁘다거나 하는 식으로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니 말이야. 그들이 하는 일은 조금 어둡긴 하지만 결국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지. 어떻게 보면 남들 대신 본인의 손을 더럽히는 숭고한 일이라고도 생각하네. 나는 그냥 그 친구와 어울리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쉬워서 한 말일 뿐일세. 아, 또 그렇다고 성기사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린다는 뜻도 아니야. 나만 해도 얼마 전까지 계속 묵언 수행을 했는데, 이게 인간이 할 만한 짓이 아니더군. 신전에서 나에게는 필수인 과정이라 계속 주장해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절대 다시는 하지 못할 고통이었어. 자네는 알 수 없겠지. 말을 못 한다는 게 얼마나…….”
“…….”
그렇게 라키안이 혼자 떠들어댄 지 30분이 흐르고. 나는 그동안 단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고 계속되는 언어의 폭력을 묵묵히 견뎌 낼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누군가 내게 아가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냐 물으면, 나는 긍정했을 거다.
왜냐하면 바이론이 있었으니까. 단 말 한마디로 그런 짓을 저지르던 놈 아닌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그걸 아무 능력 없는 수천 마디의 말로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해 봤다.
벨까?
나도 모르게 검집에 손이 갔다가,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남은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좋다고 떠들던 기사들은 진작 질린 표정으로 도망갔고, 종업원들만이 차마 자릴 비우지 못해 혼 나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저런 프로의식이야말로 여기가 최고급 여관임을 증명해 주는 가장 커다란 증거가 아닐까. 개별로 딸린 화장실이나 화려한 식당 장식 같은 게 아니라.
“라키안이라고 했나?”
“……그래서 내가 레이튼에 있었을 때 얘긴데…… 아, 혹시 성기사가 토너먼트에 참여한 이유가 궁금한 건가? 그거라면 그리 대단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만.”
“그만? 아, 설명할 필요 없다는 뜻인가? 하긴, 보지도 않은 내 동기의 변심한 마음을 눈치챘으니 내가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이유도 바로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군. 그 정도의 안목을 가지다니…….”
“닥쳐라.”
나는 결국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지금부터 한 번만이라도 다시 입을 열면 토너먼트의 규칙과 상관없이 죽여 버리겠다.”
“…….”
라키안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얌전히 입을 다무는 걸 보니, 이런 상황을 자주 겪어 본 것 같다.
“지금부터 질문은 내가 한다. 대답은 세 마디를 넘기지 말 것. 알겠나?”
“…….”
“대답해도 돼.”
“그러지.”
라키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보다 등급 낮은 상대한테 저러는 거 보면 진짜 나쁜 인간은 아닌데……. 제발 아가리만 좀 닫아 줄 순 없는 건가.
“그럼 묻지. 토너먼트에 참가한 이유는?”
“신전에서 나가라고 했기 때문일세. 보통 성기사들에게 이런 대회를 권하는 경우는 없는데, 역시 나를 어여삐 여겨…….”
손을 슬쩍 검집 근처에 가져다 대자 라키안이 다시 말을 멈췄다. 이제야 살겠군.
아무튼, 참가 이유는 신전에서 내쫓겼기 때문인가?
거기서도 감당을 못한 게 틀림없다. 아마 매일매일 신앙심을 시험받는 기분 아니었을까.
본인이 키탄께 가든가 라키안을 키탄에게 보내든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수도 있지.
“그럼 두 번째 질문이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뭐지?”
“음…… 딱히 그대를 찾아온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말을 그렇게 많이 하냐?
“사실, 우연한 만남이라고 볼 수 있겠군. 이번이 네 번째로 들르는 식당이거든.”
“네 번째?”
“토너먼트 때문인지 예약 손님들이 많은가 보더군. 하나같이 음식 나올 때쯤 되면 예약이 있는 걸 깜빡했다며 자리 좀 비워 줄 수 없겠냐 하던데. 정말, 아무리 바쁘다 해도 그런 기본적인…….”
“그만. 제발.”
나도 모르게 애원하는 소리가 튀어 나갔다. 라키안은 이번에도 순순히 입을 닫았다.
그나마 말이라도 잘 들어 다행이지, 계속 멈추지 않았으면 오늘 누구 하나는 주님…… 키탄을 보러 갔을 거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내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정신적인 고통 때문이다.
그걸 본 라키안이 걱정스런 기색으로 물어왔다.
“괜찮은가?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젊은 나이부터 체력이 그래서야……. 아무리 육체단련을 하면 패스가 좁아진다지만, 최소한의 신체 정도는 길러야 하네. 결국은 우리가 하는 건 몸을 쓰는 일 아닌가. 성기사 아카데미에서도 기초 체력 단련 과목이…….”
너만 없으면 괜찮아 새끼야.
“나는 그만 가 보겠다. 할 일이 떠올랐어.”
“저런, 아쉽게 됐군. 할 일이 있으면 가 봐야지. 아, 그런데 혹시 그거 아나? 이 도시에 유명한 식당이 하나 있는데 그 볼일이란 걸 마치고 나면…….”
대꾸 없이 걸어 나가는데도 뒤에서 말이 계속 끊기지 않는다. 입구를 지키던 종업원도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 생각했는지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한숨 쉬며 방에 올라가려다,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서 코드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NPC-1-174-3]
저건…… 분명 데이크의 코든데. 저기서 뭐 하는 거지?
녀석은 창문 뒤에 서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뭔가 기분 나쁜데.
안 그래도 피곤하던 차라 제발 꺼져 달라는 의미를 가득 담아 쳐다봐 줬다.
데이크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피식 웃으며 자리를 떠나 버렸다.
……대체 왜 왔던 거지.
생각해 보려다 금세 포기했다. 지금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서. 어차피 별거 아니겠지 뭐.
저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는 대신, 나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