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94화 (94/225)

너의 코드가 보여 (94)

아르곤에는 5년에 한 번 치러지는 거대한 행사가 있다. 이름하야 천하제일 무술대회……는 아니고, 그냥 아르곤 토너먼트라고들 한다.

기사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는데, 보통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하나는 을 전. 제 급수에 맞춰 경기를 들어갈 수 있는 방식을 말한다. 요컨대 4급은 4급끼리, 5급은 5급끼리만 싸운단 소리다.

사실 다른 급수와는 아예 상대조차 안 되는 게 당연하기에 그 규칙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스포츠 하자는 거지, 실제로 싸우자는 게 아니잖은가.

하지만 동시에 아르곤 토너먼트에는 한 가지 특이한 경기가 존재했다.

그게 바로 두 번째인 갑 전이다. 결국 기사의 본분은 실전에서 활약하는 게 아니냐며 생겨난 이 시합은, 수십 년째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고 있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당연한 얘기 아닌가.

취지야 좋다지만, 결국 등급 센 놈이 이긴단 소리다. 보통 1, 2급 기사들은 체면 상한다며 참가하지 않기에, 갑 전은 을 전에서 이길 자신 없는 3급 떨거지들이 양학하고 우승컵을 가져가는 노잼 행사가 되어 버린 거다.

왕국이 역사를 보존한다며 참가상까지 줘 가면서 독려하고 있지만, 슬슬 을 전만 진행해도 되지 않냐는 쓴소리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나한테는 참 다행스럽게도, 바로 그 점이 내가 갑 전에 참가하려는 가장 큰 이유였다. 관심에서 멀어진 시합에서 터진 이변만큼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 또 없지 않은가.

“갑 전에 참가하고 싶다고?”

“그렇다.”

목소리를 최대한 내리깔고 말했다. 충고받은 것도 있으니까. 접수를 받던 기사는 나를 살짝 띠껍단 눈으로 쳐다봤다.

“젊은 놈이 말이 좀 짧군.”

“참가 조건에 존댓말이 포함되는 건 아닐 텐데.”

“그건 그렇다만…….”

그는 마땅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가 제출한 참가신청서를 꼼꼼히 살폈다.

“출신이 안 적혀 있는데, 무슨 이유지?”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았다. 딱히 출신이라 부를 만한 곳이 없지.”

“흠…… 그런가. 검은 머리인 거 보면 동부 태생일 가능성이 높겠는데. 그냥 출신은 그쪽으로 적어 넣어도 상관없겠지?”

“마음대로.”

기사는 내 신청서를 스스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딱히 이상한 문장을 넣지도 않기에 그냥 내버려 두었다.

“출생지도 모르면서 가문을 알 리는 없을 테고…… 이름은 단테, 등급은 4급. 사용하는 무기는 검 맞나?”

“맞다.”

“꺼내서 보여 주게.”

나는 말없이 검을 꺼내 들려다, 잠시 멈칫했다.

등록 전 무기를 보여 줘야 한다는 설정은 없는데?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기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을 전 얘기를 듣고 왔나 본데, 갑 전은 위에서 사용할 무기를 등록해 두는 게 보통이야. 을 전과 달리 본인 무기로 직접 싸우게 되니 혹시나 경기 중 손상이 가면 왕국에서 어느 정도 보상해 주려는 취지지.”

거 배려가 좋으시구만. 아마 저것도 갑 전에 사람을 유치하기 위한 정책 중 하나일 거다.

군말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매끈하게 닦인 칠흑빛 광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또 흑철검이구만. 어째 다들 개성들이 없는지.”

“당신 것도 같은 걸로 보이는데.”

“……뭐, 나도 쓰기는 하지. 품질이 나쁘지 않더군.”

기사가 큼큼, 헛기침하더니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마지막으로…… 스승이 누군지도 안 적혀 있군. 밝히고 싶지 않은 건가? 그러면 공란으로 둬도 상관은 없다만.”

“별로. 밝혀져도 상관없다. 가문란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 헷갈렸나 보군.”

“헷갈릴 것도 따로 있지…… 아무튼 됐네. 누구인지 말해 보게. 대신 적어 줄 테니.”

기사가 펜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생각보다 친절한데. 하긴, 접수역을 맡을 정도니 당연한가. 성격 안 좋은 인간한테 사람 응대하게 시키진 않았겠지.

나는 신청서를 내려다보며 덤덤히 말했다.

“아이언이다.”

자연스레 써 내려가던 펜이 뚝 멈춘다.

“……누구라고?”

“아이언.”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 아이언은 아니겠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아이언이 누군지 모르겠군.”

내 말에 기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농담하는 건가? 대륙에 그런 이름이 또 몇이나 된다고. 당연히 그 미친……이 아니라, 황제 살해자 아이언을 말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미친개 아이언을 말하는 거군.”

“……그런 칭호로도 불리긴 하지.”

오히려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밖에 없다. 어차피 아이언 그 본인도 별로 신경 안 쓰기도 하고.

어쨌거나, 나는 떨떠름한 얼굴의 기사를 보며,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를 말하는 거라면, 맞다. 그가 나의 스승이지.”

뚝. 말이 끝남과 동시에 펜이 굴러떨어지고.

“…….”

기사는 멍청한 얼굴로 내 얼굴만 바라봤다.

* * *

―마스터. 어째서 얼굴을 바꾼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왜? 아저씨 모습이 아니라 아쉬워?”

―부정합니다. 단지 일의 연유를 알면 제가 조언을 드리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네가 뭐 조언할 거 없다.”

퉁명스레 말하자, 작아져서 품속에 들어가 있던 스바가 조용해졌다.

삐진 건가? 진짜 아저씨 모습이 취향이라 그런 건 아닐 테고.

조금 심했나 싶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도 데이먼이랑 얘기할 때 같이 있었잖아. 그때 안 들은 거야?”

―저는 그때 수복에 집중하던 상태였습니다. 헌데 데이먼이 누구입니까?

“유적지에서 같이 있던 마법사.”

―유적지……. 던전을 말하시는 겁니까?

“응.”

스바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지금 인류는 그렇게 부르는군요. 확실히, 그들 입장에선 틀릴 것도 없겠습니다.

“너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노친네 같다.”

―본 함의 제작 연도는 수백 년 전이지만, 순수 가동시간은 겨우 80년 남짓으로…….

“인간은 보통 그 정도면 묫자리 알아봐.”

말하면서 방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보통 공용으로밖에 없는 여관이 대부분인데, 역시 돈이 최고라 해야 하나. 고급으로 잡기를 잘했다. 숙소 잡을 돈도 아껴야 할 정도로 궁핍한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관리도 꽤 잘 돼 있다. 21세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그렇게 생각하며 세면대 위에 걸린 거울에 얼굴을 비쳤다.

검은 머리에 까칠해 보이는 20대 중반의 미남. 확실히, 얼마 전 유적지에 들어갔을 때와는 많이 달라지긴 했다. 그때는 그냥 깐깐해 보이는 아저씨였으니까.

이것도 전부 데이먼의 충고 때문이다.

‘진짜 그 아이언의 제자란 말이냐?’

‘그런 건 아니오. 다만, 그렇게 소문이 나길 바라고는 있소.’

‘……간덩이가 부어 버렸나? 혹시라도 그 미친개한테 걸리면 어떡하려고.’

‘댁은 그냥 소문만 잘 내 주면 되오.’

‘으음…….’

데이먼은 생각보다 성실한 녀석이었다. 아니면 나한테 마음 빚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냥 알겠다고 한마디 하면 될 걸 그렇게 고민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다.

‘너는 소문이 얼마나 퍼지길 원하는 거지?’

‘멀리 퍼질수록 좋소.’

‘그런데 대체 왜 아저씨의 모습인 거냐?’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아이언이 자취를 감춘 것도 10년이 다 돼 가오. 그리고…….’

‘일단 그 어울리지도 않는 말투부터 원래대로 되돌려라. 귀가 썩어 들어가는 거 같군.’

‘……그리고, 아이언의 수련은 아이의 몸으로 버틸 수 없다 정평이 나 있지. 그런 개연성을 고려해 보면…….’

‘개소리를 하는군.’

‘…….’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 목적은 소문을 널리 퍼뜨리는 게 아니었나?’

‘맞는데.’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봐라. 성실하게 노력했더니 중년이 되어 버려서 내려와 꼰대질이나 하는 아저씨. 남들이 전부 불가능하다고 한 수련을 혼자 수년 만에 통과한 젊은 천재 청년. 누가 더 이목을 끌 거 같나?’

‘별로 꼰대질할 생각은…….’

‘대답이나 해라.’

‘……후자가 낫겠네.’

‘그렇지? 알겠으면 앞으로 개연성 같은 개소리는 하지 좀 마라.’

데이먼의 잔소리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좋아. 그럼 외형은 20대 중반에 외모는 까칠해 보이는 미남으로…….’

‘잠깐. 꼭 잘생길 필요가 있나?’

‘그럼 꼭 못생길 필요라도 있나?’

‘……없지.’

‘그럼 그냥 시키는 대로 해.’

‘……그래.’

‘쓰잘데기 없는 걸로 말 끊지 마라. 어쨌든, 말투도 그 미친개의 제자니 최대한 까칠하게…….’

“…….”

아무튼, 지금의 이 모습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스바에게 설명해 주자, 녀석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마스터가 당하는 경우도 다 있군요.

“아니, 어째 듣다 보니 맞는 말 같더라고.”

―그래도 저는 어느 정도 개연성은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만…….

“……너 설마 진짜 아저씨 취향은 아니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저는 단순한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렇다고 칠게.”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변명하지 않아도 돼. 아저씨 취향이라는 게 나쁜 것도 아니잖아.”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저는…….

치직.

스바와 연결돼 있던 마력 패스를 회수하자 머릿속으로 울려 퍼지던 음성이 끊긴다.

이제 좀 조용하네.

그만 방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이왕 들어온 거 그냥 나가기도 좀 그래서 찬물을 받고 얼굴을 담갔다. 그렇게 한 5분쯤 있는데, 전혀 숨이 막히지 않는다. 오히려 잠수를 하긴 한 건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멀쩡하다. 몸 안에 남은 소량의 산소만으로도 이렇게나 활동이 가능한 거다.

이건 이제 인간의 신체라고 하기도 좀 뭐하겠는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지만, 그러다 몇 시간이고 이렇게 있을 거 같아 순순히 얼굴을 빼냈다.

거울을 바라보자 앞머리에서 물줄기가 뚝뚝 떨어진다. 어째 얼굴이 피곤에 찌든 것처럼도 보인다. 몸의 컨디션은 완벽한데 말이다.

인상 탓인가.

까칠하기도 어지간히 까칠해 보이는 게, 젊은 나이에 ‘이 세상 풍파는 제가 다 맞아 봤어요.’라고 쓰여 있는 거 같기도 하다.

“…….”

물 한 번 더 끼얹고, 수건으로 대충 닦은 후 방으로 돌아왔다. 널찍한 2인용 침대에 눕자, 포근함이 몸을 감싼다.

솔직히 요즘 정신적으로 조금 피곤한 건 맞는데,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약한 우울증 정도라 해야 하나.

2년 동안 하루라도 쉬었던 날을 기억해 보려 했는데, 정말 단 한순간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잠깐 어디 가서 쉬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왜, 팽팽하기만 한 줄은 결국 끊어진다는 말도 있고. 이번 일을 잘 해결해야 한다는 전제긴 하지만.

바포메트.

사실 이 녀석 때문에 조금 혼란스럽다. 분명 설정상 깨어나기까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남긴 했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은 아니다. 그런데 발록을 다룰 수 있는 건 지금 시점에서 그놈밖에 없지 않나.

물론 거기까지면 그냥 흔하게 있던 설정 오류로 넘기면 된다. 문제는 이게 게임에서도 일어난 일 같다는 거다.

내가 볼 때 데이먼은 생각 이상으로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실제로 내가 훔쳐보고 있을 때도 서로 원만히 합의를 끝내려 했고.

만약 실베스터가 가격을 좀 더 올려 받으려 했다 쳐도 충돌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란 소리다.

여기 내 개입이 크게 들어간 것도 아니니 게임에서도 비슷했겠지. 그런데도 실베스터가 죽었다는 건, 역시 발록의 습격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게임에서도 일어났던 걸 내가 몰랐을 뿐이란 건데, 이런 경운 나도 또 처음이다.

앞으로는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둬야 하나?

심각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게임하는 감각으로 살고 있던 것도 아니다. 변수가 생긴다면 거기 맞춰서 움직이면 될 뿐.

그리 정리하고 눈을 감자, 곧바로 깊은 수마가 나를 덮쳐 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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