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93화 (93/225)

너의 코드가 보여 (93)

벨리아 대륙에는 금지(禁地)라 불리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사람이 들어가선 안 되는 장소란 뜻인데, 이 종류는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단순히 사람들이 들어가길 꺼려 암묵적으로 합의된 곳이다. 몬스터가 너무 많다든가, 안에서 기괴한 현상이 일어난다든가.

그 대표적인 장소 중 하나가 바로 대물림의 숲이다. 안에 들어가 봤자 얻을 것도 없고 피가 역류하는 고통만 느끼지 않는가.

이런 종류의 금지는 딱히 가로막는 사람도 없다.

미친놈이 뒤지고 싶다는데 굳이 누가 말리겠나? 차라리 먹을 입 하나 줄여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게 낫지.

그리고 두 번째는 정말 ‘물리적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보통 속한 지역의 왕국 기사들이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통제하는데, 그 이유야 가지각색이다. 국가의 기밀시설이라든가 거기 귀중한 전략자원이 있다든가.

대부분은 저런 식으로 상식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지만, 가끔 거길 지키는 자들조차 까닭을 모르는 장소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커닐 동굴이 그러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공동에 불과하건만, 거기 배정된 기사만 수십에 달한다. 사실 그들이 가지는 가치를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게, 당장 부대로 보내기만 해도 마을 수십 개는 지킬 수 있는 전력 아닌가?

실제로 그곳을 금지에서 풀어 달라는 청원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그렇게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기사들은 아직 동굴을 지키고 있다.

“보고드립니다! 튜튼 기사단 제1소대! 총원 20! 열외 19! 열외 내용은…….”

“됐다. 어차피 어디 근처에서 노가리나 까고 있겠지 뭐.”

근엄한 얼굴에서 나오는 근엄 없는 말에 튜튼 기사단의 신입, 더스틴이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래. 애초에 너는 왜 왔냐? 설마 그 새끼들이 따돌리는 건 아니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선배님들이 주점에 가서 도박이나 하자 하는 걸 제가 임무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퍽!

“그렇다고 고자질하지는 말고.”

“……예.”

시무룩하게 고개 숙이는 신입의 모습에 튜튼 기사단 1소대 대장,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이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몇 년이고 박혀 있다 보면 이런 사소한 일들도 재밌는 법이다.

그는 들고 있던 서책을 접으며 바위에 등을 기댔다.

“보고 끝났으면 가 봐도 된다. 다음에는 올 필요 없고. 가서 도박을 하든, 술에 절어 창관에 가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저희 임무는 어쩌고 말입니까?”

“임무는 무슨. 여기 임무 할 거리나 있어 보이냐?”

로렌스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주위를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어두컴컴한 동굴이 하나, 사람 한 명 겨우 등을 기댈 수 있을 법한 바위가 하나. 그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 현실을 자각한 더스틴이 침울하게 물었다.

“……저희는 그럼 대체 무엇을 지키는 겁니까?”

“그걸 알면 네 선배들이 저렇게 나가서 처놀고 있겠냐? 걔네들도 처음엔 너랑 똑같았어. 적당히 사명감도 가지고, 적당히 책임 의식도 가지고. 그런데 너도 여기서 한 달만 있어 봐라. 그런 게 남아나나.”

로렌스가 접었던 서책을 다시 펼쳐 읽으며 말했다. 자신을 가격할 때 썼던 것이다. 더스틴은 괜히 그걸 빤히 노려봤다. 아무리 그래도 대장을 노려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대장님은 왜 이곳을 지키고 계신 겁니까? 결국 누군가는 지켜야 하니까, 누군가는 임무를 다해야 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도…….”

퍽!

“오버하지 말고 새끼야.”

“……예.”

로렌스는 서책을 펼쳐서 더스틴 앞에 대고 흔들었다.

“여기 제목 안 보이냐? ‘아르곤 왕국 제 24회 행정 시험 문답지’. 나는 공부해서 행정직으로 뜰 거야. 오지 생활도 도저히 더는 못 해 먹겠어.”

“…….”

갑자기 들이밀어진 현실에 더스틴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기사단 대장쯤 되면 세상 누구나 우러러보는 위치다. 그가 목표로 했던 직위기도 하고. 헌데 정작 그 당사자는 이제 와 행정직에 종사하겠다며 공부를 하고 있으니, 신입으로 들어온 자신은 어쩌란 말인가.

로렌스는 더스틴의 침울해진 얼굴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너도 이제 알겠으면 옆에서 같이 공부나 하던가. 23회까진 다 봤으니까 빌려줄…….”

이어지던 말이 멈춘다.

‘무슨 일이지?’

더스틴은 책에서 눈을 떼고 대장을 바라봤다. 로렌스는 매우 심각해진 얼굴로 동굴을 응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장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야, 너. 네 선배들 어디에 있는지 알지?”

여태까지와 달리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다. 그 순간적인 변화에 더스틴이 당황해서 자세를 바로 했다.

“예! 전부 마을에 있을 겁니다. 데려옵니까?”

“아니. 가서 대피하라고 전해.”

“……예?”

“가서 마을 사람들 데리고…… 아니다. 지들끼리만이라도 도망치라 전하라고. 당장.”

더스틴은 저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명령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이다.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머리가 따라가지 못한다.

로렌스는 그런 신입의 멍청한 얼굴을 보며 쯧, 혀를 찼다. 가능하다면 알아먹을 수 있게 설명해 주고 싶다. 하지만 문제는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거다. 그는 바위 근처에 대충 얹어 놓았던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귀먹었어? 당장 꺼져!”

“이, 이유라도 설명해 주시면…….”

“지금 당장 안 꺼지면 명령 불복종으로 베어 버린다.”

더스틴이 대장의 눈을 보았다. 저건 진심이다. 그는 당황해서 몸을 돌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명령에 따를 생각이었다.

“야.”

발걸음을 떼려던 더스틴의 앞에 무언가 날아온다. 방금까지 로렌스가 읽고 있던 ‘아르곤 왕국 제 24회 행정 시험 문답지’였다.

“아까 행정직 가라고 한 거, 농담 아니니까 그거 꼭 공부해라. 책상물림이라 욕먹어도 사무직이 최고야.”

로렌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기사는 진짜 개좆같은 직업이거든.”

“…….”

그때쯤엔 더스틴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그는 묵묵히 로렌스의 등을 향해 경례하고 자리를 박찼다.

“시X 거…….”

혼자 남은 로렌스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저런 괴물딱지가 있는 거였으면 언질이라도 좀 해 주라고.”

슬슬 입구까지 요동치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느끼며, 로렌스는 검을 굳게 들어 올렸다.

* * *

―인간들 평균 실력이 오른 건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동굴 앞. 박쥐의 날개에 산양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만약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있다면 저 존재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바포메트.

수백 년 전 홀로 수백의 기사를 학살했다는 신화 속의 괴물이었다.

―내 애완동물이 다섯이나 죽은 것도 그렇고, 저 기사도 그렇고…….

바포메트가 중얼거리듯 말하며 땅으로 내려갔다. 발 옆에 목 없는 시체 하나가 굴러다닌다. 그는 손을 뻗어 허공에 내밀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머리가 날아와 그 안에 쥐인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만…… 감안은 해 둬야겠군.

그는 히죽거리며 주먹에 힘을 가했다.

콰직! 쥐고 있던 머리통이 뇌수와 피를 흩뿌리며 터져 버린다. 잔인하다면 잔인한 광경이었지만, 바포메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손을 털어 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망치고 있는 기사가 스물에 일반인이 마흔…… 기운이 겹치는군. 앞뒤로 매단 건가? 똑똑한데.

바포메트가 다시 히죽이며 날아올랐다.

―그 대신 마을에 남은 인간이 삼백. 조금 아쉽지만…… 해방 기념 선물은 그거 하나로 만족해야겠군.

화악! 날개가 펼쳐지고, 그 몸이 동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5분이 흐른 후.

커닐 동굴 옆에 붙어 있던 하렐이란 마을은, 지도에서 그 흔적이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 * *

―현재 본 함이 낼 수 있는 최대속도는 4352.659 이르엘입니다.

“사람 말로 해 줄래?”

―요청 승인. 검색 중……. 검색 완료. 현재 본 함이 낼 수 있는 최대속도는 4352.659 이르엘입니다.

“그래.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거 같다. 미안해.”

살짝 한숨을 쉬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아래로 새하얀 구름들이 엄청난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어째 설정으로 써 놨던 것보다 훨씬 빠른 것 같아서 물어봤는데, 지구의 기준으로 환산을 못 하겠다. 애초에 이르엘이니 뭐니 하는 단위를 만든 적도 없고.

공백의 시대에 사용하던 건가?

그때 설정은 나도 짜 놓은 게 거의 없으니까.

“야, 스바야.”

―본 함의 이름은 스키드블라드니르입니다. 스바가 아닙니다.

“너무 길잖아. 스바로 줄이자.”

―거부합니다. 스키드블라드니르라는 이름은 저를 만드신 제작자님이 붙여 주신 것으로…….

“그래, 그래. 잘 알겠는데, 지금 네 주인은 누구지?”

―리안 님이십니다.

“스바가 싫으면 시바로 할까?”

―스바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빠르게 서열 정리를 마치고, 뱃머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아까 했던 질문인데, 네 동력이 내 혼원력…… 그러니까, 공백의 시대 기준으로 근원이라 부르는 힘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마력으로는 아예 충전을 못 하는 거야?”

―그렇진 않습니다. 그 마력이라 부르는 것도 결국 근원에서 떨어져 나온 힘일 뿐이니까요. 다만 그렇게 하면 본 함의 성능이 많이 떨어지게 됩니다.

“어느 정도나?”

―최대속력이 4352.659 이르엘에서 2354.635 이르엘로, 마격포의 출력이 475 마르엘에서 255 마르엘로, 방어 마법의 성능이 534 리르엘에서 314…….

“됐어, 그만 말해.”

대충 절반 정도 떨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저런 설정은 넣은 적 없지만,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니까.

아무튼, 게임에서 내던 그 성능이 하향 먹었을 때의 기준이라는 건가?

그건 좀 놀라운데.

그도 그럴 게, 절반 정도 성능으로 최강의 유물 중 하나로 뽑혔다는 거 아닌가.

“스바야 너 지금 내 혼원력 측정 가능하지?”

―이미 동굴에서 측정 완료했습니다.

“그럼 지금 내가 가진 힘 전부 쏟아서 너 충전하면 얼마나 운행 가능해?”

―사용 목적에 따라 다르지만, 단순 운행이면 30분 정도가 한계일 겁니다.

“나쁘지 않네.”

게임의 2배에 가까운 성능이라면, 거의 시속 1,000km는 된다는 거다. 그 정도면 거의 음속에 가깝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직선거리가 대충 300km쯤 되니, 30분이면 거의 서울-부산 한 바퀴 왕복할 수 있다는 소리다. 조금 모자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혹시 너 하이브리드는 안 되니?”

―질문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마력이랑 혼원력 동시에 같이 쓸 수는 없냐고.”

―가능은 하지만, 추천드리진 않습니다.

“왜?”

―두 힘이 충돌하며 선체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자동수복기능으로 회복은 가능하나, 거기에 또 에너지가 들어가기 때문에 한 가지 힘만 사용할 때와 비슷할 겁니다.

“아프단 소리구나. 알겠어, 안 그럴게.”

뱃머리에 서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배를 둘러싼 방어 마법 덕분에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비행기 일등석에 타도 이런 편안함은 느낄 수 없겠지 분명.

오랜만에 굉장히 나른해지는 기분이다. 그냥 평생 여기 위에서 살고 싶다고 할까.

나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지나가는 구름을 구경하다가, 툭 말했다.

“스바야.”

―예.

“레이튼 도착하면 다른 사람들 내려준 다음 바로 배 띄워.”

―알겠습니다. 목적지는 어디로 할까요?

“아르곤.”

나는 뱃머리에 몸을 기댄 채 노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르곤으로 가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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