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91)
“……저게 뭐시여?”
실베스터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칼페온과 싸울 준비를 한 것도 잠시. 그들의 뒤쪽, 아까 열린 문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괴생명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근육질 몸에 박쥐의 것을 닮은 커다란 날개.
사람 평균 신장의 3배는 넘어 보이는 큰 키에 칙칙하게 빛나는 붉은 안광.
어떻게 봐도 인간은 아니었고, 단순한 몬스터는 더더욱 아니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수백 년 전 멸종했다던 마물 발록과 비슷해 보인다.
“웃기지도 않는 꼼수를 부리는구나. 유물 사냥꾼.”
뒤쪽으로 향한 실베스터의 시선에 마법사는 같잖다는 듯 웃었다.
용병 놈들이 자주 벌이는 짓이다. 네 뒤에 뭐가 있다며 눈을 돌리게 만들고 기습하는 전략.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예전에는 당한 인간이 꽤 많았더랬다. 대부분 기사나 마법사들은 그런 야비한 술수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용병 출신이래도, S등급까지 올라간 자가 자존심도 없나? 정말 그런 게 통할 거라 생각해?”
“……아니, 진짜 뭐가 있어서 하는 말…….”
“포기를 모르는군. 헛소리는 그쯤 하면 됐다. 결투도 아니니, 준비 신호는 필요 없겠지?”
더 들을 것도 없다. 마법사는 영창해 둔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혹시 지금이라도 후회가 된다면 보내 줄 생각도 있다. 물론, 유물 사냥꾼 너 혼자만이겠지만.”
“……제발 뒤에 한 번만 좀 봐주면 안 되긋나?”
“아직도 그 소린가? 정말 어디까지 추잡해지려는 건지…….”
“으아악!”
이어지던 말문이 막힌다. 뒤쪽에서 비명이 들려온 탓이다.
이젠 저놈 부하 새끼들까지 같이 지랄이군. 마법사는 그리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가, 이내 안색을 굳혔다. 어쩐지 그 목소리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앞에 버티고 있는 기사를 힐끗거렸다. 실베스터가 갑자기 기습해 온다 해도 저자가 막아 줄 것이다. 그리 믿고 고개를 돌렸다.
“…….”
그렇게 뒤돌아본 곳에는 이미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 마법사님! 마법사……! 꺼어어억…….”
“뭐해! 당장 방진 짜지 않고!”
“그런다고 해결되는 상대가…… 시X! 대체 뭐야 이 괴물 자식들은!”
날개 달린 다섯 괴물들이 병사들의 목을 뽑고, 사지를 자르고, 그 피를 들이켜며 그르륵 웃어댄다.
4급 기사 열, 5성급 마법사 다섯, 그리고 병사 백여 명이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2분으로 충분했다. 판단이고 명령이고 무언가를 결단할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단 소리다.
“……저게 대체…….”
“발록.”
마법사의 중얼거림에 실베스터가 침을 퉤, 뱉으며 앞으로 나섰다.
“유적지에 적힌 걸 몇 번 본적이 있구먼. 태어나자마자 5급의 힘을 가지고, 단순히 자라는 것만으로 2급까지 오르는 종족이라든가.”
“……세상에 그런 괴물들이 있다고?”
마법사는 저 말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 되는 존재면 한 번쯤 접해 봤을 법도 한데, 그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마법사의 반응에 실베스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유적지에 기록된 정보로만 봤제, 진짜 존재하는 걸 줄은 몰렀다. 그냥 상상 속 몬스터 그런 건 줄 알았는디…….”
“거기 저놈의 약점 같은 건 쓰여 있지 않던가?”
“음…… 한 가지 있긴 했제.”
“뭐지?”
“머리를 자르면 죽는다던디.”
“……안 그런 생물도 있나?”
“있을지도 모르제.”
“쓸모없는 정보군.”
마법사는 고개를 저으며 뒤돌아섰다. 앞의 기사도 망설임 없이 방향을 바꾼다. 방금까지 목숨 걸고 싸우려 했던 상대에게 바로 등을 보인 것이다.
‘그냥 재수 없는 샌님인 줄 알았는디…….’
실베스터가 피식 웃으며 기사 옆에 섰다. 딱히 말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휴전 협정은 저들이 뒤돌아선 시점에서 이미 끝나 있었으니까.
“그나마 좋은 소식은 저것들이 2급처럼 보이진 않는단 거군. 네놈이 봤다는 기록이 틀린 건지, 저놈들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것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반대로 너무 늙어 버린 걸 수도 있제. 유적지 기록에만 나오는 거 보면 최소 수백 살은 처먹었을 소리니께.”
“그게 더 설득력 있긴 하군. 저 근육질 몸매가 노인네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떤가 싶긴 하지만…….”
플라이. 마법사는 살짝 날아 기사와 실베스터의 뒤에 자리 잡았다.
“저놈들은 다섯. 이쪽은 셋이다. 심지어 우리는 저 발록이란 녀석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지. 지금 상황에 최선은 저 배를 타고 달아나는 것뿐이야.”
마법사가 배를 힐끗거렸다. 그 시선에 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앞으로 나섰다.
“저놈들 보인 순간에 이미 소유권은 확정 지었소. 헌데…….”
리안은 손가락으로 배를 가리켰다. 스키드블라드니르의 선체는 미미한 빛을 내며 깜빡거리고 있었다.
“보다시피 저 꼴이군.”
“……저건 왜 저러는 거지?”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서 고장 난 부분이 많다나. 수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더니 저러고 있군. 뭐, 다행히 저주 같은 건 없는 것 같소만.”
마법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은 무슨. 차라리 저놈이 저주에 걸리는 편이 나았다. 지금 자칫하면 다 죽게 생긴 판 아닌가.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까와 달리 이제는 서로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럼 저게 고쳐질 때까지 시간을 끌거나 도망치면서 각개격파 당하는 수밖에 없겠군.”
“다른 방법도 있소.”
리안은 검을 들어 올리며 실베스터의 옆에 섰다.
“곧 밖에 있던 내 동료가 올 거요. 그자도 3급이니, 합류하면 저쪽과 숫자가 맞는 셈이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정면승부도 해볼 만할 거요.”
마법사는 대체 저게 무슨 소린가 했다.
‘요즘 모험가는 셈도 못 하나?’
설령 저 말대로 동료가 합류한다 쳐도 다섯이 아니라 넷 아닌가. 칼페온의 그 둘과 유물 사냥꾼 실베스터,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다는 그 정체 모를 인간까지.
마법사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저런 놈과 마지막을 함께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새삼 억울해진 것이다.
리안은 그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사실 나도 3급이요. 그러니 그리 저능아 보듯 할 것 없소.”
“……저능아로 봐야 할지, 미친놈으로 봐야 할지 헷갈리는군. 자네는 어딜 보나 4급이네.”
혹시나 싶어 다시 마력탐지를 해도 마찬가지다. 잘 쳐 줘야 4급 중반 정도. 이게 틀렸을 리는 없었다.
“동방에서 건너온 무공 중 마력을 감출 수 있는 게 있더군.”
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걸 익혀서 4급으로 보이는 거요. 괜히 거짓말하는 게 아니니 걱정할 것 없소.”
“……믿어도 되는 건가?”
“이딴 거짓말해서 뭐가 이득이라고? 그냥 뒤에 빠져서 구경하는 편이 나한텐 더 좋지 않겠소?”
“……그것도 그렇군.”
마법사가 살짝 풀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무공이 존재한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지만……, 동방이면 또 혹시 모른다. 알려진 것 보다 알려지지 않은 게 더 많은 땅이니까.
“그 말대로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아. 물론 아까와 비교했을 때의 얘기지만.”
“그라믄 얼른 영창이나 준비하쇼.”
실베스터가 단원들을 뒤로 대피시켜 말했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하고 다니는 놈들이라지만, 고작 시간 1,2분 끌자고 제물로 바치고 싶지는 않았다.
“저놈들은 벌써 우리 보면서 입맛 다시고 있으니께.”
“……그렇군.”
실베스터의 말대로 발록들은 온몸에 피로 떡칠한 채 이쪽을 향해 히죽이고 있었다. 징그러운 새끼들. 마법사는 침을 퉤, 내뱉으며 한 걸음 내디뎠다.
“피가 묻고 싶지는 않으니…… 일단 날려 둘까.”
마법사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미리 영창해 둔 주문을 완성시켰다.
“파이어스톰.”
콰앙!
―그어어어어!
허공에서 나타난 화염의 폭풍이 발록들을 뒤덮었다. 그 엄청난 온도에 묻어 있던 피가 순식간에 증발한다.
하지만. 놈들의 몸은 멀쩡했다.
“……솔직히 그슬리는 정도는 기대했는데.”
이래서야 그냥 목욕을 시켜 준 거랑 다를 것도 없나. 마법사가 쯧, 혀를 차고.
―그아아아아!
발록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나는 곧바로 맨 오른쪽에 있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놈은 나를 바로 눈치채고는 히죽거렸다. 쳐 웃기는.
쾅!
흑철검이 발록의 팔에 박혔다. 놈은 그제야 당황한 얼굴을 했다. 공격이 먹힐지 몰랐나 보다. 나는 녀석이 정신을 되찾기 전에 재빨리 검을 회수했다. 멀리 빼지는 않았다. 같은 곳을 한 번 더 쳐 줘야 하니까.
콰직!
칼이 아까의 그곳에 다시 박혀든다. 아니, 통과했다. 발록의 팔이 절단되어 퉁퉁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러갔다.
―그아아아아아!
놈이 굉음을 내질렀다. 얼굴에 아까의 비웃음 같은 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걸 보며 피식 웃어 줬다.
“그러게 누가 똥 폼 잡고 있으래? 병신새끼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발록은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채 잘린 팔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지이익지이익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소음을 내며 녀석의 팔이 새로 자라난다.
……저거 발록 중에 일부밖에 못 하는 건데.
“……거, 새끼. 재생능력 믿고 여유 부린 거면 얘기를 하지.”
―그어어어!
놈이 고함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그걸 피하려 노력하는 대신, 검으로 맞공격해 나갔다. 어차피 힘에는 자신 있고, 아직 무영보는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았으니까.
깡!
발록의 손과 흑철검이 맞부딪힌다. 혹시라도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대로 잘 버텨 주었다. 그 어마 무시한 무게만큼이나 단단한 녀석이다.
―……그르르르.
발록은 단 한 번의 공격을 끝으로 뒤로 물러났다. 표정엔 이제 당혹감만 가득하다. 저와 힘으로 맞먹는 인간은 처음 봤겠지.
한 번씩 주고받았으니 이번에는 내가 갈 차례다.
나는 검을 어깨에 두르고 혼원력을 다리에 집중시켰다.
쿵!
바닥이 으깨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오고, 내 몸은 어느새 발록의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놈의 눈빛에 한 줄기 두려움이 스친다.
“난 한 대만 안 친다.”
쾅! 쾅!
발록이 정신 차릴 새도 없게 계속해서 검을 내리쳤다. 녀석의 팔에는 계속해서 상처가 늘어 갔지만, 그와 비슷한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나는 그걸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게임에선 그냥 HP 조금 빨리 회복하는 게 전부인 계륵 같은 특성인데, 현실 보정이 이래서 무서운 건가?
그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휘익! 순간 왼쪽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뭐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몸부터 뒤로 뺐다. 그와 동시에 내 앞을 발록의 주먹이 스치고 지나간다.
“……맞고만 있기는 싫다 이거냐?”
말은 태연히 했지만, 상당히 오싹했다. 나는 저거 한 대 맞아도 전투력 급감할 텐데, 저놈은 그대로일 거 아닌가.
이래서 파티에 신관이 필수인 건데.
불평해 봤자 없는 녀석이 갑자기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한탄하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재생 능력도 무한한 건 아니니 계속 공격하다 보면 결국은 뚫리겠지만……, 문제는 그전에 우리 쪽이 먼저 무너지겠다는 거다. 세 명이서 넷을 버티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지.
나름 선방은 하고 있는데, 미르가 도착할 때까지 버틸지 모르겠다. 얼른 이쪽을 속전속결로 끝내는 편이 좋다는 말이다.
조금 도박수지만……, 한번 해볼까. 상당히 능숙해지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다시 간다.”
말함과 동시에 다시 자리를 박찼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게. 탓. 발록이 이쪽을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손을 치켜 든다.
―그르르륵.
내가 근처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녀석이 그 손을 내려치고 있는 중이었다. 맞받아치면 저쪽으로 공세가 전환된다.
나는 그 다가오는 손날을 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들숨이 7번.
운석이라도 되는 듯 추락하던 공격이 옆으로 빗겨 간다. 발록은 순간 나를 놓친 듯 당황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때 나는 이미 녀석의 대각선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완전히 숙련되면 뒤쪽까지 가는 건데……, 아직 그 수준은 못 된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날숨이 4번.
팔을 들어 올렸다. 발록은 그제야 내 위치를 특정한 듯 뒤돌아서려는 모습이었다. 이미 늦었다. 나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놈의 목을 베어 냈다.
서걱.
그렇게 발록의 머리가 떨어지고.
[갱장한 업적! / #첫 마물 사냥&]
[당신은 처처처음으로 거위등급 마물을 사냥해 냈습니다!]
[다다다다당신에게 포포포포인트 2,000점이 부여됩니다.]
그런 메시지가 시야를 가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