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90화 (90/225)

너의 코드가 보여 (90)

“…….”

앞의 스키드블라드니르를 가만히 쳐다봤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다. 이런 전개는 예상 못했는데.

원래는 저들이 완전히 헤어지고 나면 기습해서 배를 들고 튈 생각이었다. 아직 실베스터가 여기서 죽은 원인을 정확히 모르니 쟤들을 샌드백 삼는 게 목적이었단 소리다.

그런데 충돌할 줄 알았던 두 쪽이 원만히 타협하려 하지 않나, 스키드블라드니르는 갑자기 나한테 소유권을 인정해 달라지 않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서로 합의가 끝났다면 실베스터는 대체 왜 죽은 거지? 작은 배라 별거 없는 줄 알았다가 크게 변하는 거 보고 욕심이라도 동했나? 게다가 설정상 스키드블라드니르가 밖으로 나오는 건 저들이 유적에 진입하고 이틀은 지난 뒤다. 지금은 기껏해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고. 안에서 무슨 일이 터졌기에 꼬박 밤까지 샜다는 말인가.

그런 상념들이 머리를 채워 가던 그때.

“……리안?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은데?”

옆에서 들려오는 라이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왜요?”

“……저 사람들 좀 화가 많이 난 거 같거든.”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실베스터는 제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지만, 칼페온의 기사와 마법사는 표정을 굳힌 채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3급과 6성급. 하나라면 몰라도 둘까지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

나는 슬쩍 스키드블라드니르를 쳐다봤다.

원래부터 가질 생각이긴 했지만, 소유권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설정에 쓴 적이 없었다.

게임에선 그냥 할 것도 없는데 부탁까지 하니 들어는 줄게 정도의 포지션이었단 말이다. 마스터니 뭐니 하는 건 처음 듣는다고.

그와 관련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냅다 좋답시고 소유권을 확정 짓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 구입 청구서입니다. 지불 금액은 니 목숨이요.’ 이럴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공백의 시대 유물 중에는 그런 물건이 꽤 된다. 등가교환의 법칙이라나.

일단 스키드블라드니르 문제는 잠깐 보류해 두기로 하고, 다가오는 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할 얘기 있으면 거기서 하시오.”

무턱대고 공격해 올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들이 일단 걸음을 멈추곤, 그 자리에서 뭔가 상의하기 시작했다. 금방 결론이 났는지 마법사만 앞으로 나선다.

“너는 누구냐?”

“지나가던 모험가지.”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못 믿으면 말고.

그보다 생각보다 온순하다. 분명 나와 라이놀이 4급 수준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슬쩍 눈을 보니 경계심이 가득 차 있다.

뭐지? 설마 우리한테 쫀 거는 아닐 테고.

그 이유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놈이 계속해서 배를 힐끗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키드블라드니르를 의식하고 있군.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실베스터가 사망하는 이유도 모르고 있는 판국에 괜히 쓸데없는 싸움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말투는 지금 외형에 맞춰서.

“별로 안 될 것도 없지 않소. 여기 유적지가 발견됐다는 소문은 이미 주변에 다 퍼져 있는데.”

“평범한 모험자가 여기까지 어떻게 온단 말이냐?”

“평범하다곤 하지 않았는데. 게다가 딱히 몸을 쓰는 유적지도 아니지 않소. 머리가 좀 좋은 모험가라 해 두지.”

“……그냥 몸으로 뚫고 왔으면서.”

옆에서 라이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물론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시오. 볼 것도 다 봤으니 이제 가 보려 하니까.”

내 말에 마법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배를 가지고 말이냐?”

“그거야 당연하지. 저 배가 나를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말을 당신도 들었을 거 아니요.”

“……혹시 저 유물에게 주인으로 인정받은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나?”

“아니. 모르오. 짐작 가는 건 있소만…….”

마법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대도 안 한 대답이었나 보다.

“짐작 가는 거? 그게 대체 뭐지?”

“저 배의 목소리는 여성형 아니오?”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래서요. 당연히 내 외모에 홀딱 반한 거지.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소?”

“……거울이 없는 도시에서 살다 왔나 보군.”

안 통하네. 리안 얼굴이었으면 통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저 배는 내가 가져가겠소. 불만은 없겠지?”

퉁명스레 말하며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마법사의 목소리가 내 발을 가로막는다.

“잠깐.”

“뭐요? 유물의 인정을 받은 자가 있다면 소유권도 동시에 인정해 주는 게 규칙일 텐데.”

“소유권으로 뭐라 하려는 게 아니다. 자네는 칼페온의 인간인가?”

말투가 조금 정중해졌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는 없기에, 나도 조금 예의 갖춘 어조로 대답했다.

“모험가 나부랭이한테 국가가 무슨 소용이겠소. 그냥 이 나라 저 나라 떠도는 거지.”

“그럼 이참에 칼페온에 정착해 볼 생각은 없나?”

예상하지 못한 질문은 아니었다.

저 배가 주인을 고르는 기준을 정확히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주인이 된 나를 영입하는 걸 테니까.

하지만 고려할 만한 질문도 아니었다.

이제 와 칼페온에 갈 거 같았으면 차라리 아르곤 가서 국가기사 되는 게 낫지. 그 제안도 뿌리친 마당에 저런 제안이 눈에 찰 리가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별로 마음에 없군. 이래봬도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몸이라. 미안하지만…….”

“칼페온으로 온다면 저 유물 값까지 쳐서 2,000만 골드는 받을 수 있을 걸세.”

……얼마?

“지금 얼마라고 하셨죠?”

나도 모르게 원래 말투가 나갔다.

마법사는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2,000만 골드라 했네. 물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지만, 못해도 그 정돈 받을 수 있을 거야. 칼페온은 마법사를 위한 지원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나라고, 저 유물은 지금 시대 마법 수준을 수백 년은 끌어 올릴 수 있는 물건이니까.”

“…….”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내가 설정한 바에 따르면, 1골드는 대략 21세기 한국 돈으로 100만 원 정도의 가치랑 비슷할 거다. 서로 물가가 워낙 달라 정확히 환산하긴 힘들지만 말이다.

요컨대, 저 마법사는 지금 나한테 무려 20조에 가까운 돈을 영입비로 제안해 오고 있는 것이다.

……칼페온으로 소속 옮겨 볼까?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이봐! 정신 차려. 저자가 말한 대로,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잖아. 그냥 던져 보는 거란 말이야!”

옆에서 복면을 쓴 남자가 나를 흔들며 말했다. 누구지? 20조 자산가인 날 시기하는 사람인가?

“게다가 갔는데 널 살려 둔단 보장도 없잖아! 주인으로 인정받는 조건만 알아내면 바로 죽이려 들걸? 그럼 돈도 굳고, 유물도 얻고. 일석이조인데 왜 안 그러겠어?”

“앗.”

이어지는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옆에 있던 게 누군지도 기억이 났다. 라이놀이었지. 순간 눈 돌아가서 잊어버렸다.

“죄송해요. 너무 충격적인 금액이라.”

“이해는 해. 그보다 너 말투 돌아왔어.”

“미안하군. 너무 탐이 나는 금액이라.”

“본심도 드러낼 필요 없고.”

나는 살짝 헛기침을 하고 마법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네.

“미안하지만, 제안은 거절하겠소.”

“……왜 그러지? 조건이 부족한가?”

“아니. 조건은 만족했소. 항상 속으로 염두에 두기로 하지.”

“혹시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면 마나의 맹세라도…….”

“그만! 더 이상 날 현혹하지 마시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고개를 돌리면서 말하자 마법사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 인상을 확 찌푸린 게, 상당히 열받은 눈치다.

“고운 말로 할 때 받아들이는 게 좋을 텐데.”

당근 다음은 채찍인가. 정석이다.

“협박해도 소용없소. 혹시 공격해 와도 나는 그냥 저 배 타고 달아나면 그만이야.”

“그럼 지금 당장 해 보지 그러나?”

“그야 아직 습격해 온 건 아니니까. 아까 정중히 해 온 제안 때문에 참고 있소. 당신도 굳이 나와 척져서 좋을 거 없을 텐데? 언젠가 연구에 쓰라며 빌려 줄 수도 있는 거고…… 물론 돈은 좀 받겠지만 말이요.”

“좋은 관계 좋지. 그러니 나도 제안을 했던 거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을 안 듣는다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지 않겠나? 게다가…….”

마법사가 피식 웃었다.

“지금 그 배를 타고 도망치지 않는 게 나 때문은 아닐 텐데?”

“…….”

“모험가라면 알 테지? 소유주한테 저주를 내리는 유물들 말이야. 네놈도 지금 그걸 걱정해서 아직 소유를 안 받아들이고 있는 거 아닌가?”

솔직히 정곡이다. 딱 저 이유때문에 안 받고 있는 게 맞으니까.

마법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지. 아니, 오히려 가능성 높은 얘기지. 능력이 좋은 유물일수록 소유주에게 저주를 내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아르곤의 ‘오리진’처럼 말이야.”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요? 여기서 맞아 죽나, 저거한테 맞아 죽나 어차피 같다면 도박수에라도 걸어 보는 게 더 나을 텐데.”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선택의 폭을 줄여 주지.”

“……선택의 폭?”

마법사가 씨익 웃었다.

“칼페온에 유물의 저주를 방어해 주는 유물이 있다. 그러니까 너의 선택은 여기서 저주에 걸려 죽거나, 얌전히 따라와서 안전하게 주인이 되는 것만 남는 거지. 바보가 아니라면 뭘 골라야 할지는 뻔히 알지 않겠나?”

“…….”

저건 거짓말이다. 유물의 저주를 방어해 주는 유물 같은 건 게임에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내 설정엔 없는 물건이 튀어나온 걸지도 모르지만…… 저 표정 보면 그런 것도 절대 아닐 거다. 너무 음흉해 보인다 할까. 아까와 다르게.

결국 내가 할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거절하겠소.”

마법사의 얼굴이 싸늘히 식었다.

“기어코 벌주를 마시려 하는군……. 그렇게까지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멍청하지 않으니 거절한 거지. 유물의 저주를 방어해 주는 유물 같은 건 금시초문이요.”

“……알고 있었나?”

“얼굴에 다 티 나더만.”

“……뭐, 이제 와선 상관없지.”

마법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럼 이제 선택지는 다시 두 개가 남았군. 여기서 맞아 죽거나, 저주에 걸려 죽거나. 자신 있으면 한 번 도박수에 걸어 봐라. 어떻게 되는지도 정보가 되니까 말이야.”

태연한 비아냥거림. 하지만 별로 대꾸해 줄 말은 없었다.

……결국 그냥 받아들여야 하나? 적어도 밖에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준비한 다음 시도하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이 스키드블라드니르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옆에 한 남자가 우뚝 선다.

“……유물 사냥꾼?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아따, 나가 유물 팔아서 빌어먹는 새끼긴 한디, 오히려 그라기 때문에 더 지켜야 하는 게 있는 법이걸랑.”

실베스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유물의 선택을 받은 자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혹시 그를 갈취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놈을 공격한다. 이짝에서 규칙처럼 내려오는 말이제.”

능글맞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게 가라앉는다.

“그러니께 이짝이랑 붙을라믄 나도 상대해야 할긴데, 이번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 어뗘?”

“…….”

마법사는 싸늘한 눈으로 실베스터를 응시했다.

“단순히 날아다니는 장난감이었다면 나도 그냥 넘어갔을 거다. 겨우 이런 데서 괜히 목숨까지 걸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저게 그리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

“……뭐, 확실히 장난감은 아니제. 어쩌면 오리진에 맞먹을 수도 있겄는디.”

“오히려 그 이상이다. 알겠으면 비켜. 네놈이 목숨 바친다 해도 결국 이기는 건 우리일 테니까. 소문이 나는 게 두려워서 그런다면 조건 없이 입 다물어 주지.”

관대하기까지 한 제안이다. 하지만 실베스터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이런 건 평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양심의 문제인기라. 내 같은 놈도 지켜야 하는 선 정도는 있는 법이여.”

“……그런가. 그렇게 죽음을 택하고 싶다면, 그리 해 주지.”

그 말을 끝으로 기사가 앞으로 나선다. 마법사는 뒤로 빠지며 영창을 준비한다. 양옆의 라이놀과 실베스터가 몸을 긴장시키고 무기를 뽑아 드는 기색이 느껴진다. 하지만.

“…….”

그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의 눈은 그 어느 쪽으로도 향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공동의 열린 문 뒤로 뚫린 구멍을 응시할 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누군가 내 얼굴을 봤다면 깜짝 놀랐을 거다. 엄청 굳어 있을 테니까.

그때 마침 라이놀이 내 쪽을 봤는지, 황급히 물어왔다.

“리안, 괜찮아? 혹시 긴장돼서 그런 거면…….”

“라이놀.”

나는 시선을 구멍에 고정한 채 말했다.

“어, 어. 왜?”

“여기까지 오는 길 기억하죠?”

“그렇긴 한데…….”

“그럼 밖에 나가서 미르 경이랑 서율 경 좀 불러 와요.”

“……뭐?”

라이놀은 이해가 안 된단 어투로 물었다.

“확실히 미르 경이라면 저 둘이라도 이길 수 있겠지만,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당할…….”

“저놈들 때문에 데려오라 한 거 아니에요.”

흑철검을 꺼내 들고 정면을 향해 겨눴다. 정확히는 칼페온의 기사와 마법사 뒤편으로.

“저들이 상대가 아니면 대체 누굴…….”

“마물이요.”

“……마물?”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입을 열기엔 지금 머리가 너무 복잡했으니까.

[MON-3-14-4]

다 자라면 최소 3급에 준한다는 발록이, 무려 5마리나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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