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86화 (86/225)

너의 코드가 보여 (86)

“웃기지도 않는구먼. 이 유적지가 왜 칼페온 소유라는 겨?”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여기는 이릴 산맥이고, 이릴 산맥은 칼페온은 영토다. 그러니 이릴 산맥에 있는 저 유적지도 칼페온의 소유지.”

당당히 지껄이는 3급 기사의 말에 실베스터가 내심 조소 지었다.

이거 원, 뭣도 모르는 애새끼들을 보냈구만.

“유적지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여. 대륙법으로 그렇게 정해 놨는디 그것도 몰러? 다른 왕국들이야 국경을 마음대로 넘을 수 없으니 내버려 두는 거제, 이게 만약 애매한 곳에서 발견됐으면 온갖 떨거지들이 다 모여들었을걸? 요즘 기사학교에서는 이런 것도 안 가르치남?”

칼페온에는 기사학교 같은 게 없었다. 있는 건 오직 마법 아카데미뿐. 그리고 그건 왕국 소속 기사들에게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S등급쯤 되는 용병이 그런 사실도 모를 리 없을 터. 요컨대 저건, 명백한 비아냥이다.

3급 기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천박한 용병새끼가…….”

“아, 거 천박한지 만박한진 모르겄고, 기사 나리가 요술쟁이들 똥구녕에 박고 싶어 환장하는 건 잘 알고 있네 그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서 환장…….”

“그만두시게.”

상대를 향해 돌진하려는 기사를 마법사가 손으로 제지했다. 6성급과 3급. 실력으로는 동급인 자들이었으나, 단지 그 한마디에 기사는 바로 몸을 멈춰 세웠다. 그래도 분이 풀린 것은 아닌지 그가 이를 갈며 씹어 내뱉듯 말했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길거렁뱅이 새끼야.”

“어유, 아주 똥구멍이 헐겄네, 헐겄어.”

실베스터가 낄낄거리며 웃고는 마법사를 바라봤다.

“그래서, 댁도 같은 생각이유? 저 유적지는 칼페온 소유다?”

“그리 주장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유적지 내부에서 터지는 일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는단 것도 알 테지?”

노골적인 협박이다. 실베스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이 도굴꾼 짓거리만 20년째인데, 나한테 그런 소리 지껄인 새끼들 지금 다 어딨는지 알어?”

그는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조기. 조오기 밑에 같이 묻어 버렸제. 그래도 내가 도굴꾼치곤 양심이 좀 있는 편이라, 가지고 나온 게 있으면 되려 놓고 오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믿걸랑.”

“너 혼자 우리 둘을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으냐?”

“글쎄다. 유적지 안에서 붙으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데려갈 자신 있고, 여기서 붙으면…….”

실베스터가 피식 웃더니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용병 단원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중앙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하품하는 자들도 있고,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자들도 있다.

하나 같이 통일성은 없었지만, 공통점은 그 누구도 긴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야들아! 여기서 붙으면 내가 쪼까 도망가야 쓰겄는디, 혹시 불만 있는 놈 있으면 지금 그냥 칼 물고 뒈져 버려라. 저짝 끌려가서 생체실험 생쥐 꼴 되는 것보단 나을 테니께.”

“거, 복수는 제대로 해 주는 거요?”

“암, 그래야제. 내가 칼페온에 온갖 똥이란 똥은 다 뿌려 주마.”

“그럼 됐지 뭐. 맘대로 하쇼.”

단원들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실베스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는데, 혹시 덤빌 거면 좀만 기다리쇼. 나가 저놈들 유언장은 항상 들고 다니는디, 혹시 바꾸고 싶은 말 있는지 물어보게.”

“……잃을 거 없는 버러지 새끼들이 세상에서 제일 귀찮다더니.”

결국 마법사 역시 아까의 기사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유물은 먼저 얻는 자에게 소유권이 있는 걸로. 진입은 내일 오전에 동시다. 이것까지 지키지 않겠다면 사소한 위험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 있다만.”

“어유, 어디 당연한 말을. 어차피 우리도 정비 시간은 필요하니께, 그 말대로 합지요.”

실베스터의 능글거리는 말투에 마법사가 쯧 혀를 찼다.

“약조를 어기면 어떻게 될지는 알겠지?”

“암요, 암요. 거,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좀 가 주시겠쇼? 우리도 텐트도 치고 밥도 좀 해 처먹어야 내일 유물도 든든하게 얻어먹지.”

“……천박한 놈.”

그리 말하고 떠나가는 마법사의 등을 보며 실베스터가 피식 웃었다.

‘약조라…….’

먼저 얻는 자가 유물을 가져? 그런 말을 믿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이런 일에 이골이 난 그도, 정작 말을 꺼낸 마법사도.

원래 모든 물건이란 건 얻은 자가 아니라 가지고 나오는 사람의 소유인 법이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뒤돌아섰다.

“니들 진짜 멀뚱히 구경만 하고 있었냐? 얼른 텐트 안 쳐!”

그제야 굼벵이처럼 움직이는 용병들을 보며 실베스터가 쯧쯧 혀를 찼다.

위기의식이 저렇게 없는 건 문제지만, 동시에 그는 목숨 내놓고 하는 일에 항상 긴장감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팽팽하기만 한 줄은 결국 끊어지는 법이니까.

결국 실베스터는 대원들에게 잔소리를 퍼붓는 대신, 숲 한쪽 구석을 바라봤다.

‘숨기는 꽤 잘 숨었는디.’

이런 일만 수백 번은 당해 본 본인의 눈을 피하기엔 아직 좀 부족하다. 그는 순식간에 마력을 담고, 숲을 향해 달렸다.

* * *

저게 유물사냥꾼 실베스터인가.

간만에 재밌는 구경했다. 저 강단이며 성격이며, 용병다운 용병은 처음 보는 거 같네. 그동안 만난 건 죄다 용병 탈만 쓴 양아치 새끼들이었는데.

이 세계가 잘못된 건지, 레이튼이 잘못된 건지.

피식 웃으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코드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망설임도 없는 거 보면 정확히 위치를 파악했다는 건데.

하긴, 내가 뭐 은신 기술 배운 것도 아니고. 여기 오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걸릴 수도 있겠다 생각은 해 뒀다.

도망치자면 못 칠 것도 없지만, 딱히 그럴 만한 이유도 없다.

그렇게 태평히 서서 기다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그야, 여긴 놀이터가 아닌디?”

턱. 붉은 머리의 남자가 앞에 착지한다. 투박하지만, 일말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인상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유적지 입구를 가리켰다.

“글쎄요. 저기 놀이터라고 적혀 있는데, 안 보이세요?”

실베스터는 내 손가락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려. 내가 잘못 생각했네. 그래서, 놀이터에는 무슨 일로 온 겨?”

“놀이터에 무슨 일로 오겠어요? 놀러 왔겠지.”

“여긴 아그들이 놀 만한 곳이 아닌디.”

“놀이터는 보통 아그들이 와요, 아저씨.”

“……거, 할 말 없구먼.”

실베스터는 제자리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놀이터 비유는 내가 잘못했으니,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 거여. 그 나이에 4급이 된 재능이 아까워서 말하는 거니께.”

“지금 제 목숨 걱정해 주는 거예요?”

“나가 원래 마음씨가 좀 뜨듯혀.”

그러더니 뭐가 웃긴지 혼자 히죽거린다.

“암튼, 보아하니 동료도 없는 거 같은디, 그 실력으로 혼자 들어가믄 무조건 죽어야. 유물이 탐나는 것도 알겄고, 본인 재능에 빠진 것도 알겠응께, 여기선 일단 돌아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말하는 것과 달리 표정에 걱정의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하긴,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보일 감정은 아니긴 하지. 애초에 그리 말랑말랑한 감성 가지고 용병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내가 죽는 걸 정말로 아깝다 생각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방금 만난 사이에 충고를 날리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혹시 저 안에 있는 유물이 뭔지 아세요?”

“모르제. 아직 들어가 보지도 않았는디.”

실베스터가 퉁명스레 답했다.

“나가 경력이 좀 돼 보인다고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유적지만 보고 안에 뭐가 있을지는 아무도 몰러. 대박이다 싶었더니 쪽박인 경우도 있고, 반대로 여긴 빈털터리다 싶었는데 대박인 경우도 있제.”

“그래도 대충 생각하는 건 있을 거 아니에요. 저긴 대박 같아요, 쪽박 같아요?”

내 말에 실베스터는 조금 고민하는 기색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보통은 외진 곳에 있고 크기가 클수록 좋은 유물이 있을 확률이 높제. 헌데 여기는…….”

그가 유적지 입구 쪽을 힐끗거렸다.

“사람이 거의 방문하지 않는 산맥이라 그렇지, 그렇게까지 오지는 아니여. 입구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는 거지만, 크기도 상당히 작은 편이고. 입구의 가디언이 꽤 상급이기는 헌디, 또 그렇게까지 대단한 수준은 아니구…….”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인다.

“뭐, 이래저래 보면 쪽박에 가깝겠구먼. 아마 몸의 피로를 풀어 주는 마사지 기구 같은 게 나올 거 같은디.”

“흠…….”

실베스터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저 유적지는 그리 대단찮아 보이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수십 년 된 전문가도 저렇게 말할 정도니, 칼페온에서 내린 판단도 비슷했겠지.

만약 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의 정체를 알았으면 8성급 마법사라도 보냈을 거다. 스키드블라드니르는 혼자서 칼페온의 전력을 한 단계 상승시켰다고 평가받는 유물이니까.

하늘을 나는 배가 뭐 대수라고 국가 전력을 상승시키냐 싶겠지만, 한 번 상상해 보라. 그 위에 타서 아래로 폭격 마법을 갈기는 마법사들의 모습을. 게임 내에서 칼페온은 그 배 존재 하나만으로 세 왕국 중 최강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기도 했었다.

사실상 제대로 된 교통수단도 없는 이 세계에서 하늘을 나는 배가 가지는 위상은 그 정도인 것이다.

더구나 ‘스키드블라드니르’가 그냥 날아다니는 배인 것도 아니다. 그 안에 새겨진 방어 술식은 7성급 대마법도 한 번은 버틸 정도로 튼튼하다.

결국 격추시키려면 8성급 대마법을 적중시켜야 한다는 뜻인데, 그게 그리 쉬울 리 없다.

일단 8성급 마법사가 대륙에 10명도 안 될 정도로 그 숫자가 적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스키드블라드니르의 시속은 무려 500km가 넘는다. 거의 비행기에 준하는 속도인 것이다.

그런 걸 영창도 한세월 걸리는 8성급 마법으로 맞춘다? 사실상 불가능하다. 배에 타고 있는 한은 사실상 무적과 마찬가지란 소리다.

“…….”

이때쯤 되자 실베스터가 이 유적지 안에서 죽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여태까지의 유적지에서는 왕국 측과 적당히 교섭하고 넘어갔을 거다. 상대측도 굳이 유적지 안에서 유물 사냥꾼과 싸우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문제는 이번 건은 그렇게 넘어가기엔 너무 사안이 크다는 데 있다.

아마 스키드블라드니르가 있는 곳에 실베스터와 왕국의 병력이 비슷하게 도착하고, 서로 포기하지 못해 결국 전면전까지 번지지 않았을까?

그런 스토리가 아니라면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실베스터가 유적지의 함정에 빠져 죽었을 리도 없으니 말이다.

솔직히 별로 간섭할 생각은 없었지만…… 조언도 들은 김에 나도 일단 몇 마디 해 둘까.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저 안에 있는 유물이 뭔지 아는데, 알려드릴까요?”

내 말에 실베스터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건 또 뭔 귀신 씨나락 까 먹는 소리여?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유적지의 유물을 어떻게 알어?”

“저 안에는 하늘을 나는 배가 있어요.”

불쑥 말하자, 실베스터는 미친놈이라도 보듯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배가 어떻게 하늘을 날어? 천재인 줄 알았더니, 정신이 나가 버린 거였나…….”

“지금은 안 믿어도 상관없어요. 다만, 만약이라도 안에서 하늘을 나는 배를 본다면…… 이 말만 떠올려 봐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분명 그때가, 아저씨 생사의 기로일 거예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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