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85)
“하늘을 나는 배? 세상에 그런 게 대체 어딨어?”
칼페온 변방에 박혀 있는 이릴 산맥. 그 한쪽 기슭에서 요리를 하던 미르가 대뜸 묻자, 라이놀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리안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있을 겁니다.”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해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서율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에 라이놀은 피식 웃고 말았다.
“말만 들으면 그렇긴 할 겁니다. 그 녀석은 가끔 근거도 없이 뜬금없는 말을 하곤 하거든요. 그리고 전부 그 말대로 되죠. 그냥 몇 번 겪어 보면 익숙해질 겁니다.”
“리안 경이 예언자라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예언이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 말에 서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안이 대단한 능력과 재능을 가졌다는 건 진작에 인정했다. 애초에 그 나이에 이룬 일들을 보면 그 어떤 이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다.
하지만 예언 같은 소리는 상식의 범주를 벗어났다. 일개 인간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가끔 본인이 미래를 볼 수 있다 주장하는 놈들이 나오긴 하지만, 9할 9푼은 사기꾼이다. 나머지 1푼은 그냥 직감이 좋은 거고.
서율이 알기로 그 비슷한 거라도 할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뿐이었다.
“혹시 리안 경이 신이라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시죠?”
어이없단 듯 묻는 목소리에 라이놀이 다시 피식 웃어 버렸다. 예전에 비슷한 상상을 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나마 사도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몰랐다면 그도 리안이 신의 헌신이 아닌가 생각했을 거다. 그저 레이튼의 고아 꼬맹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비범한 구석이 많았으니까.
“신들은 지상에 강림하지 않은 지 꽤 되었죠. 저는 신의 사도가 아닌가 의심했었습니다만…….”
“했었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적어도 본인은 부정하더군요. 사실 저도 아직 반신반의하는 중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납득이 힘든 일을 너무 많이 벌인 터라.”
“으음…… 사형의 직감 같은 건가?”
서율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중얼거렸다. 라이놀이 그걸 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직감이요?”
“아, 사형 특기 중 하나예요.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냥 아무 근거도 없이 갑자기 때려 맞추는 느낌이라 할까. 라이놀 경 얘기 들어 보니 비슷한 거 같은데.”
“근거는 있어. 평상시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지.”
미르가 냄비에서 끓고 있는 스튜를 그릇에 푸며 말했다.
“리안은 그냥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놓치지 않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걸 더 선명히 들을 뿐이야. 나처럼.”
“그럼 하늘을 나는 배는 대체 뭘 보고 들은 겁니까?”
“글쎄. 어젯밤 개꿈이라도 꿨나보지.”
“……무슨 개꿈을 꾸면 하늘을 나는 배 같은 게 나오죠?”
“그건 나도 모르겠고.”
미르는 알 바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해가 안 가는 반응은 아니다. 라이놀도 2년 전 같은 소리를 들었으면 딱 저랬을 테니까.
“직감이란 것은 저도 대충 알고 있습니다. 그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지 못하는 걸 들을 뿐이라는 이론은 처음 들어 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리안의 행동은 그거랑은 다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2년간 같이 살아오면서 느낀 거라고 해 두죠.”
“그걸로는 답이 안 되는데요.”
어느새 스튜를 푸고 있던 서율이 끼어들었다. 벌써 냄비는 절반이나 비어 있었다. 라이놀은 본인 몫을 푼 뒤 뚜껑을 닫아 버렸다. 리안의 몫은 남겨 둬야 하니까.
“말로 하기에는 긴 이야기예요. 그냥 직접 겪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에이,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그냥 말씀해 주시죠.”
확실히. 슬슬 해가 그 모습을 감추고 있고, 정찰하러 간다던 리안은 아직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인다. 그가 입을 다문다고 해서 딱히 할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라이놀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몇 가지만 말씀드릴까요?”
“네!”
서율이 방실거리며 앞에 앉았다. 라이놀이 그걸 보고 살짝 웃으며 옛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리안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바이론과 3급 기사 테오도르와 붙게 된 스토리까지.
그걸 전부 들은 서율이 나지막이 감탄을 터뜨렸다.
“……듣다 보니 진짜 예언가라 해도 믿겠는데요? 안 그래요, 사형?”
“아니.”
미르는 여전히 퉁명스레 답했다. 서율은 그 반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요? 들어 보니 딱인데.”
“그냥 조금 관찰력이 좋을 뿐이라니까.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건 몰라도 바이론이 부른 용병이나 3급 기사 테오도르는 정말 아무 전조도 없었습니다.”
라이놀의 말에 미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전조를 느낀 게 리안 하나였을 뿐이지. 너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은 못 본 걸 말이야.”
“그럼 혹시 내기하시겠습니까?”
라이놀이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을 나는 배가 진짜 있을지 없을지요. 이번에도 아무 전조가 없던 건 똑같지 않습니까.”
“전조 문제까지 갈 것도 없지. 세상에 하늘을 나는 배 같은 건 존재할 수가 없으니까. 뭘로 내기할 건데?”
“지는 사람이 일주일 동안 상대한테 형님이라 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내가 더 나이 많은데. 손해잖아.”
“저는 그럼 미르 님이라고 하지요.”
“괜찮지.”
그렇게 유치한 내기를 끝마친 둘은 곧바로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사자가 어떻니 용이 어떻니……. 서율은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리안 경이 너무 늦는 거 같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조금 그렇긴 하군요.”
라이놀이 대꾸하며 주변을 살폈다. 분명 초저녁에 떠났는데, 이미 하늘은 빛 한 점 비치지 않는 완전한 어둠이다. 끓고 있는 냄비에서 나오는 김만이 하얗게 정반대의 색을 뽐내고 있었다.
찾으러 가야 하나? 잠깐 고민하던 라이놀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걱정되지 않으세요? 혹시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잖아요.”
“어차피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찾으러 나서 봤자 서로 길만 엇갈릴 겁니다. 그리고…….”
라이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리안이잖아요. 알아서 잘할 겁니다.”
* * *
이릴 산맥은 산세가 굉장히 험한 편이다. 평생을 산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꺼릴 정도라 하면 이해가 쉬울까.
오히려 그 덕에 몬스터가 살지 않아 안전하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긴 하다.
설정대로라면 동물들도 살기 버거운 땅이라 있는 거라곤 산양이 전부일 정도인데, 사실 그런 건 나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초인’이 있었으니까.
지형 좀 이상하다고 힘들어할 거 같으면 그런 특성은 가져다 버렸어야지. 아니면 접시 물에 코 박고 뒤지든가.
“……진짜 죽겠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내 몸에서는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당연히 ‘무영보’ 때문이다.
이제 겨우 일상적인 움직임이 가능한 정돈데, 갑자기 산타기라니. 그것도 산세가 워낙 험해서 몇십 년 동안 종사한 약초꾼들도 피한다는 곳에서.
“괜히 정찰한다고 나와서는…….”
그냥 다른 사람들한테 맡길 걸 그랬나?
코드도 볼 수 있는 데다 관련된 설정도 알고 있는 내가 오는 게 맞기는 한데……, 지금 와선 조금 후회된다.
“후…….”
어느덧 그럭저럭 평탄한 평지가 나왔다. 근처 산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다.
그 위에 서서 허리를 꼿꼿이 폈다. 으레 하는 스트레칭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딱히 신체가 힘든 건 아니니까. 오히려 몸을 풀려고 움직이는 게 더 힘든 상황 아닌가.
잠시 숨을 돌리고, 사방을 훑었다. 산맥 구석구석에서 코드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100명 정도인가.”
생각보다 많은데. 유적지에 대한 정보가 알려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말이다.
대부분은 용병이나 모험가들이고, 칼페온에서 파견된 것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다.
그중 리더로 보이는 건 6성급 마법사와 3급 수준의 기사.
칼페온에서 기사는 상당히 희귀한 편인데, 어지간히 유적지가 탐나나 보다. 하긴, 상당히 오랜만에 발견된 것이니 그럴 만도 한가.
그 외의 용병이나 모험가들은 대부분 쭉정이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무시 못 할 코드가 한 개 보인다.
[NPC-1-323-4]
대륙에 셋밖에 안 되는 S등급 용병 실베스터. 고대 유적지나 보물들을 찾아 다니는 게 전문인 녀석이다.
여기 ‘스키드블라드니르’ 쟁탈전에 참가했다가 사망했다는 설정이 있기도 하고.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보다…… 미르까지 포함하면 이 작은 산맥에 테오도르급 강자가 셋이나 있는 건가?
그놈 하나한테 멸망할 뻔한 레이튼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
2년 전 레이튼에 여기 전력 끌고 가면 도시를 10번은 뒤집어엎었겠는데. 지금은 1기사단 때문에 불가능하겠지만.
아무튼, 이 정도면 올 사람은 전부 왔다고 봐야겠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사람을 뜻하는 코드를 제외한다. 눈을 뜨자, 순식간에 보이는 코드가 수십 개로 줄어들었다.
[MON-4-A]
[RU-43]
입구를 지키는 가디언과 유적지의 코드.
위치는…… 실베스터 근처인가. 과연 경력자라 해야 할지, 행동이 빠르다. 다만, 칼페온 왕국에서 파견된 병력이 그쪽으로 가고 있다.
저거 한 번 부딪치겠는데.
조금 흥미가 돋는다. 설정에 결국 칼페온이 배를 차지한다고 쓰기는 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생각해 둔 적 없으니까. 어차피 본편 시점도 아닌데 그리 상세할 것도 없지 않은가.
원래는 사람들 위치만 확인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한 번 살짝 보기나 해 볼까.
마음을 먹고 아래를 봤다. 가파른 벼랑길. 저거 내려가다 보면 계산하느라 머리가 터져 버리겠다. 거기다 균형까지 잡아야 하니 올라올 때보다 배는 힘들 게 뻔하다.
슬쩍 높이를 가늠해 봤다.
아파트 5층 정도 높이 되려나. 별로 문제없겠네.
주저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쿵!
바닥에 커다란 흔적이 생김과 동시에 흙먼지가 올라온다.
잠깐 헛기침을 하다가 혼원공으로 모두 흩어 버렸다. 금세 주변이 가라앉고, 남은 건 깊게 박힌 내 발자국뿐이다. 손으로 살짝 바닥을 짚고 다리를 빼냈다.
그리고 종아리에 묻은 흙을 털어 낸 뒤, 실베스터가 있는 곳을 향해 곧장 몸을 박찼다.
우거진 수풀들이 빠르게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유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대충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 입구를 바라봤다.
“웃기지도 않는구먼. 이 유적지가 왜 칼페온 소유라는 겨?”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여기는 이릴 산맥이고, 이릴 산맥은 칼페온은 영토다. 그러니 이릴 산맥에 있는 저 유적지도 칼페온의 소유지.”
그곳에서는 이미 실베스터 용병단과 칼페온의 병력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는 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