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의 코드가 보여-84화 (84/225)

너의 코드가 보여 (84)

“후…….”

숨을 깊게 내뱉었다.

무의식적으로 하던 호흡을 의식적으로 하려니 저도 모르게 계속 끊긴다. 들숨 날숨 해야 하는 걸 들숨만 반복하기도 하고, 실수로 들숨 날숨을 같이 해 버려서 잠시 숨이 막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차라리 양호한 편이다. 정확한 간격으로 정해진 시간만큼 숨을 쉬어야 하는 수준까지 가면 머리가 터질 지경이니까.

심지어 행동 하나하나마다 그 방법이 모두 다르다. 오른발을 한 뼘 만큼 움직이면 2초 들이마시고 3초 내쉰다. 왼팔을 손가락 한 마디 움직이면 1초 들이마시고 5초 내쉰다.

이게 연계까지 가면 그냥 사람이 미쳐 버리는 거다. 실제로 무영보를 창시한 인간은 광인(狂人)이라는 설정이 있기도 했고.

나야 ‘초인’ 덕에 뇌세포까지 강화된 건지 그 정도 수준까진 아니지만……, 아직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여기 오고 초창기 힘 조절 연습할 때 딱 이런 느낌이었는데. 이걸 제정신으로 익힐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지 않을까.

“하…….”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훈련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지?

모르긴 몰라도 1시간은 넘었을 거 같다.

회중시계를 꺼내 확인해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또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 감도 안 온다. 완전히 적응하려면 시간 꽤 걸리겠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회중시계를 집으려면 팔을 다섯 뼘만큼 움직이고 손가락을 한 마디만큼 쥐었다 펴야 한다. 들숨은 3초, 날숨은 5초.

“괜찮아요? 아직 미친 거 아니죠?”

팔이 품속에서 멈춘다.

시발 다시 계산해야 하잖아.

몇 초간 굳어 있다가 간신히 대꾸했다.

“네, 뭐. 아직은 버틸 만한데요. 몸은 어차피 평소에도 항상 염두에 두며 움직여서 호흡 부분만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 같아요.”

“그게 버틸 만하다고요……?”

서율이 놀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데 얼굴이 안 보인다. 고개 돌리려면 또 숨은 얼마나 쉬어야 하지.

“……굳이 마주 보면서 대꾸 안 하셔도 돼요. 이해하니까.”

“아뇨, 뭐 평생 이러고 살 것도 아닌데요.”

들숨 4초, 날숨 2초면 되겠다.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자 서율 뿐만 아니라 미르도 보였다.

온 줄 전혀 몰랐는데, 이것도 항상 코드로 사람 위치 파악하는 습관 탓이다.

코드에 너무 의존하는 것도 생각 좀 해 봐야겠다. 이런 상황이 적진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까.

“미르 경은 또 언제 오셨어요?”

“2시간 전. 네가 수련 시작하고 1시간 후지.”

벌써 3시간이나 됐다고? 1시간 겨우 지났을 줄 알았는데.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2시간 넘게 기척을 못 느꼈다는 건 좀 충격이다. 진짜 생각 이상으로 코드에 너무 의존하고 있었구나.

“굳이 오셔서 제가 뻘짓 하는 걸 2시간 동안이나 구경한 걸 보면 미르 경도 무영보에 입문하고 싶은 마음이 든 건가요?”

“난 용천보 외엔 익힐 생각 없다니까. 만약에 있다고 해도 그런 미친 무공은 안 배워.”

미르가 한숨을 쉬며 덧붙인다.

“그냥 오랜만에 흥미가 돋았을 뿐이야.”

“흥미요?”

“문주님한테 들은 적이 있거든. 옛날에 무영보 마지막 전승자를 만났었는데,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고.”

미르가 문주라 부르는 사람이면 동방의 최강자 중 하나인 그 인간밖에 없을 거다. 리카르도와 비슷한 경지에 올라 있는 최정상급 고수.

서율이 놀라 소리쳤다.

“아무리 옛날이라지만, 문주님이 졌다고요?”

“이기지 못했다고. 상대는 무영보 하나만 익힌 상태라 검술이 영 꽝이라 했어. 그런데도 문주님 검을 전부 피한 거지. 반대로 그자도 유효타를 먹이진 못했으니, 따지자면 비긴 거지.”

미르는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문주님은 만약 그자가 검술까지 익힌 상태였다면 본인이 졌을 거라 하시더군. 너는 그 경지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전승자는 결국 어떻게 된 건데요? 어느 순간 갑자기 실종됐잖아요.”

서율이 궁금하단 듯 물었다. 미르가 나를 힐끗 보더니 담담히 입을 열었다.

“자살했어. 미쳐 버린 거지.”

“…….”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아무리 평상시 단련이 돼 있다 해도 그게 견디기 쉬울 거란 소리는 아니니까.”

결국은 걱정해 주는 거다. 설정상 미르는 온갖 걸 귀찮아하면서도 은근 잔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럴게요. 미르 경도 익힐 생각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절대 그럴 일 없다니까.”

질색이란 표정을 짓는 미르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웃는 것도 따로 호흡을 했어야 하나?

* * *

“……이제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전혀 안 보이네요. 적어도 제 눈에는요.”

검을 휘두르다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훈련장 입구에 카일이 놀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보이면 큰일이지. 내가 한 달 동안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겨우 한 달 만인 게 놀라운 건데요.”

“너도 무영보 익히면 할 수 있어. 어때? 이참에 한 번 배워 보는 건.”

“사양할게요. 그거 익힌 상태로 마법까지 쓸 자신이 없어서.”

확실히. 아무리 카일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 마법에 무영보까지 쓰긴 벅찰 거다. 뭐 머리가 두 개쯤 달린 거 아닌 이상.

나는 검을 수납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상회 훈련소까진 무슨 일이야? 너도 요즘은 대부분 저택에서 수련하잖아.”

“잠깐 상회에 일이 있어서 들렀어요. 훈련장까지 올 생각은 없었는데, 베이크 지부장님이 사무실로 와달라고 전해 달라 해서요.”

영감님이? 상회 일은 대부분 일임해 놔서 웬만한 일 아니면 나 찾을 일 없을 텐데.

“이유도 물어봤어?”

“아뇨. 그래도 딱히 급한 일은 아닌 거 같았어요. 형이 한 달째 상회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불평하시긴 했지만.”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영보에 익숙해지느라 다른 곳에 눈 돌릴 새가 없었으니까. 아무튼, 일단 가 보긴 가 봐야겠다. 하루 종일 잔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카일을 배웅하고 훈련장에 딸린 샤워실로 향했다. 별로 급한 일은 아니라 했으니까. 차가운 물에 몸을 씻자 정신이 또렷해진다.

들숨 4번, 날숨 7번. 이제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호흡하지만, 가끔 이렇게 상기시켜 줘야 할 때가 있다. 보통 격렬히 움직인 이후다. 전투나 훈련 같은. 일상적인 활동은 무리 없이 가능해도 아직 실전까지 완벽히 적용하긴 힘들 것 같다. 잠깐 쓰는 거면 몰라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로 향했다.

“대체 왜 이렇게 늦는 게냐?”

들어서자마자 영감님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소파에 앉았다.

“몸이 땀 범벅이어서요. 잠깐 씻고 왔죠.”

“……네놈이 땀도 흘리더냐?”

영감님이 살짝 놀란 기색으로 물어왔다.

“사람이 땀 좀 흘리는 게 뭐 그리 대수예요?”

“수년 동안 흘리는 걸 한 번도 못 봤으니까 그러지. 수백 킬로씩 되는 흑철석을 백 번 넘게 들고도 멀쩡하지 않았느냐.”

“요즘 그만큼 힘든 훈련 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상회일 밀렸다고 잔소리할 생각이면 좀 봐주시죠.”

내 말에 영감님은 혀를 쯧쯧 차면서도 별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갑자기 웬 종이 뭉치를 건네 온다.

“이게 뭐예요?”

“보고서다. 중요한 거 3개만 요약해서 간추렸으니 훑어봐.”

중요한 거라…….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진짜 전부 내 승인이 필요한 일일 거다. 슬쩍 맨 앞장부터 읽어 봤다.

첫 번째 거는 내가 예상하고 있던 문제였다. 예전의 그 칼페온 거래건. 싸가지 없던 것과는 별개로 조건이 꽤 괜찮다. 아마 저번 일 때문에 미움살 박혔을까 봐 몇 가지 추가했나 본데, 뭐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다.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싸인했다.

“……이건?”

헌데 그다음 건은 생각도 못 했던 문제였다.

“영감님, 이 정보 어디에서 얻었어요?”

“얻기는 무슨……. 자체적인 조사다. 그런 쪽은 항상 노블레스한테 맡기는 거 같은데, 거기도 결국 경쟁자라는 거 꼭 명심해 둬라. 우리 정보는 우리가 찾아야 해.”

……이걸 자체적인 조사로 알아냈다고?

종이에 적혀 있는 건 최근 들어온 1기사단에 관한 얘기였다. 신원미상의 실력자들이 수십 들어왔는데, 어쩌면 제국 기사단의 잔당일지도 모른다는 추론까지 포함돼 있다. 물론 1기사단이라는 생각까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이 정도로도 상당히 놀랐다. 그 정보는 노블레스 쪽에서 은폐한 지 오래니까.

적어도 허름한 무기 상점 하나 운영하고 있던 사람이 내보일 만한 수완은 아니다.

나는 조금 뜸 들이다가 슬쩍 얼마 전부터 의심하고 있던 얘기를 꺼내 들었다.

“영감님, 지금 와서 물어보는 건데.”

“뭐냐.”

“혹시 제국 황실에서 일하셨어요?”

“…….”

들려오는 대답이 없다. 힐끗 보자 담담한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봐도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하게 알겠다.

“별로 따지려는 거 아니니 그냥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어떻게 알았느냐?”

진짜 맞을 줄은 몰랐는데.

슬쩍 머리 위를 바라봤다.

[NPC-1-MH-S]

S등급 상인을 뜻하는 코드.

무력 쪽과 달리 정치나 상업 같은 곳에선 등급이 곧 그 사람 위치를 나타내 주는 건 아니다. 다른 환경에 많이 좌우되는 분야니까. 그냥 이 정도 가능성을 가진 인재라고 알려 줄 뿐이라는 소리다.

단순히 작은 무기점에서 재능을 썩히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런 과거사가 있을 줄이야.

코드 능력만 온전히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늘었다. 범용 코드의 인간이라고 과거사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 않은가.

“저희 브랜드 각인, 영감님이 혼자 만들었잖아요.”

“……그게 왜?”

나는 종이 뭉치를 흔들며 말했다.

“여기 적힌 기사들이 그거 보고 저희 집까지 찾아왔더라고요. 황실에서 쓰던 문양과 비슷하게 생겼다던데.”

“…….”

영감님은 당황한 얼굴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갑자기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무슨 의도가 있던 건 아니었어. 워낙 단순하게 생겼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배어 들어간 모양이다.”

실제로 각인은 방패와 검이 교차한 흔한 그림일 뿐이다. 리카르도가 워낙 작은 단서라도 간절했던 상황이라 그렇지, 그것만으로 상회와 제국을 연관 지을 사람은 없을 거다.

“괜찮아요. 어쨌든 잘 해결됐으니까.”

“……헌데 그 찾아왔다는 기사들은 대체 누구냐? 황실을 얘기하는 것 보면 상당히 높은 직위였을 텐데.”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이걸 말해 줘도 되나? 뭐 저 사람을 못 믿거나 그런 게 아니라, 듣기엔 조금 충격적인 얘기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판단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제 와 떼 놓고 갈 수 있는 사이도 아니니까.

나는 궁금하단 눈치로 바라보는 영감님에게 담담히 말했다.

“1기사단이요.”

“……뭔 기사단?”

“제국 제1기사단이요.”

“…….”

영감님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러더니 힘겹게 입을 연다.

“……내가 아는 그 1기사단 맞느냐?”

“영감님이 아는 1기사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맞을걸요.”

“그 제국 최강의 기사들이 어떻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런 자들이 찾아왔는데 문제는 없는 거냐? 혹시 협박을 당하고 있다든가…….”

“일단은 제 밑에서 일하고 있어요. 충성을 바치고 그런 건 아니긴 한데.”

“……대체 그게 무슨 전개냐?”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그것보다…….”

나는 마지막 세 번째 종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칼페온의 이릴 산맥에서 ‘공백의 시대’ 유적지 하나를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저 여기 좀 다녀와야겠는데.”

내 말에 영감님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건 그냥 참고만 하라고 넣어 둔 거다. 뭐가 있을 줄 알고 거길 가?”

“알고 있으니까 갔다 오려 그러죠.”

“……뭔데?”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늘을 나는 배요.”

일명 스키드블라드니르. 공백의 시대 유물 중에서도 손꼽히는 보물의 이름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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