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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83화 (83/225)

너의 코드가 보여 (83)

“……이거, 대체 어디서 얻은 거예요?”

비급 앞부분을 해석하던 서율이 황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책을 덮는 손이 덜덜 떨린다. 처음에는 잘못 봤나 했는데, 몇 번씩 돌려 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이건 확실히 무영보다.

중원의 지배자들이나 익힐 수 있다는 절세무공에 비할 바는 아니나, 그 효용성 하나만으로 바로 뒤에 나열되던 신공.

분명 그 마지막 후계자의 사망과 동시에 실전(失傳)됐다 들었는데…….

“아까 보여드렸던 책이랑 같은 곳에서 찾았어요.”

리안은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상회 일 하다 보면 은근히 그런 게 들어올 때가 있거든요.”

“이렇게 뻣뻣한 새 책이요? 방금 써낸 것도 이렇진 않을걸요.”

“필사본인가 보죠.”

“……그게 말이 되나 싶긴 한데.”

“출처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이번에도 다시 해석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가르쳐 주기까지 하면 더 좋고요.”

리안의 말에 서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 가르쳐 주면 좋다는 건, 저도 익혀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네. 배우지도 않았는데 가르쳐 줄 수는 없을 거 아니에요.”

서율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 제안이 싫어서가 아니다. 좋아서 문제다. 그녀는 눈을 꾹 감고 책을 리안에게 넘겼다.

“……이런 신공을 배울 수 있으면 오히려 제가 엎드려 부탁드려야죠. 그런데 리안 경은 이 책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는 거 같아요.”

무공의 가치는 그 폐쇄성에서 나온다. 거대 문파 일대 제자만 배울 수 있는 일류무공. 명문 세가 직계 자손에게만 내려오는 가전무공.

무영보 같은 신공쯤 되면, ‘봉황’의 칭호를 받은 후기지수인 서율도 쉬이 익힐 수 없다.

“동쪽에서 가장 흔한 무공인 삼재검법조차 남에게 그냥 알려 주는 경우는 없어요. 하물며 무영보까지 와서야. 정 해석본이 필요하신 거면 저랑 사형이 각각 절반씩…….”

“알고 있어요.”

리안은 서율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저도 동대륙 문화는 나름 잘 안다고 했잖아요.”

“……근데도 저희가 배워도 된다고요?”

“아까 계약할 때 말씀드렸잖아요.”

리안이 씨익 웃었다.

“동대륙 못 돌아간 거 후회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

저게 성자? 서율은 살짝 눈물까지 글썽이며 옆의 의자를 흔들었다. 나른하게 앉아 있던 미르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또 왜.”

“사형, 들으셨죠? 아무 조건 없이 무영보를 알려 주겠대요!”

“조건 있는데요. 저 가르쳐 주는 거.”

“사소한 조건으로요!”

서율의 말에 미르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대답했다.

“그래. 잘해 봐.”

“왜 사형은 빠진다는 투예요?”

“빠질 거 맞으니까.”

“……네?”

저도 모르게 맥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서율이 사형을 미친놈 보듯 쏘아봤다. 하지만 미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용천보 외엔 익힐 생각 없어.”

“……또 그놈의 용 타령이에요?”

“세상에 보법은 두 개면 충분해. 승룡식, 하룡식. 좌우가 어떻니 방위가 어떻니는 아무 쓸모가 없지. 하늘로 솟구친 용을 그 누가 잡을 수 있겠어?”

“화살이요.”

“나한테 그런 게 닿을 거라 생각해?”

“제발 안 닿는 곳까지 멀리 가 줘요. 이왕이면 선계까지.”

서율은 한숨을 내쉬고 리안을 바라봤다.

“그렇다는데, 가르쳐드리는 건 저 혼자 해도 돼요? 해석은 사형이랑 같이 최대한 빠르게 마칠게요.”

“내가 해석도 해야 돼?”

“꼬우면 봉급 받지 마시든가요. 싸인은 사형이 먼저 해 놓고.”

미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매우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서율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게 누가 아무 데나 막 싸인하래요? 아무튼, 오늘부터 바로 해독 들어갈 거니까 농땡이 부릴 생각 마요.”

* * *

무영보의 해독이 끝난 건 그로부터 2주일이 흐른 뒤였다. 책 한 권을 해석하고 필사까지 끝마쳤다고는 믿기 힘든 시간이었지만, 서율의 얼굴에 드러난 다크서클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사실 무영보는 상당히 단순한 무공이다.

결국 더 잘 피하고,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법을 적은 것뿐이니까. 무슨 환영을 만들어 내지도, 위압감을 뿜어 내지도 않는다.

그렇다 보니 서율도 그 위상과 별개로, 난이도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 여겼었다.

‘단순한 것이 가장 어렵다 했던가.’

예전 스승님이 하셨던 말 중에 비슷한 게 있었다. 수련은 모르는 걸 채워 넣는 게 아니라, 알고 있던 걸 덜어내는 과정이라고.

무영보는 그 ‘빼기’의 정점에 선 무공.

단 한 톨의 무의미한 동작도 용납하지 않는다. 의식적인 움직임이든 무의식적인 움직임이든 전부 인식하고 조절해야만 한다는 소리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건가?’

이건 전투 중에만 잠깐 켜고 끄고 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그랬다가는 본인도 모르는 습관이 배어 나오게 될 테니까. 평상시에도 모든 걸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할 거다.

일상적으로 내딛는 발의 각도. 늘어진 팔의 위치. 저도 모르게 내쉬던 숨소리까지.

서율은 이 무공이 실전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이 안 미치고 배기겠어?’

전부 광인이 됐거나 죽었겠지. 서율도 어떻게든 익혀 보려 했었지만, 결국 이틀 만에 포기했다. 그녀가 내심 한숨 쉰 순간. 훈련장으로 리안이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죽상이네.”

“아, 리안 경…….”

서율은 이걸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한참 고민했다. 힘들게 해독은 했는데, 사람이 배울 수 없는 쓰레기였어요 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안 좋은 소식이 좀 있는데.”

“해석에 오류라도 났어요?”

“그게 아니라…….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이건 사람이 배울 수가 없는 무공이에요.”

“배울 수가 없어요?”

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정확히는 배울 수 없다기보다는, 배우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가 맞긴 한데…….”

서율의 말에 리안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해석엔 문제없는 거죠?”

“네. 일단은요.”

“그럼 구결이랑 요령 좀 알려 주시겠어요? 제가 이런 쪽은 영 문외한이라.”

“……배워 보시려고요?”

“그래도 있는 비급인데 시도도 안 해 보면 아깝잖아요.”

그 말도 맞긴 하다. 당장 서율부터 세상에 이게 가능한 건가 하면서도 이틀간 연습해 보지 않았던가. 뭐든지 직접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도 있는 법.

“그럼 일단 알려드리긴 할게요. 그래도 절대 무리는 하지 마세요. 전 어제 호흡 조절 연습하다가 숨넘어갈 뻔했거든요.”

“저런.”

리안은 개의치 않는 듯 중얼거리고는 서율의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그냥 걸을 때도 힘 조절해야 한다고요?”

“네. 무영보란 무공이 워낙 그래요. 일상적으로 몸에 습관이 배어야지, 싸울 때만 그럴 수가 없어요.”

“근데 굳이 호흡까지 그럴 필요가 있어요?”

“무의식적으로 내쉬는 들숨이나 날숨도 움직임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데……, 괜히 미친 무공이라 한 게 아니라니까요.”

“음……. 일단은 알겠어요.”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수련에 들어갔다.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다. 서율은 그걸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만 들으면 실감이 안 날 만도 해.’

행동 하나하나를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느니, 호흡까지 의식해서 해야 한다느니. 어떻게 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에 가까워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은 그런 걸 항상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으니까. 원래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던 걸 조금 바꿔 보라 해 봤자 뭐 그리 어려워 보이겠는가.

그러나 누구든 저 방식대로 10분만 움직여 보면 생각을 달리할 거다.

사람은 뭐든 그렇게 하나하나 계산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30분 정도면 그만두겠지.’

그것도 길게 잡은 거다. 그야 상대가 스물도 안 된 나이에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세운 괴물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카일이 했던 얘기도 기억한다. 힘은 강하지만, 아직 검술 같은 움직임 쪽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 하지 않았던가.

무공에 익숙한 서율도 1시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으니, 문외한인 리안이 더 적게 버틸 거란 건 나름 타당한 추측이었다.

‘남아서 위로라도 해 줘야겠다.’

서율은 그런 생각을 하며 구석에 가 앉았다. 얼마 전 대련을 구경하던 그 자리다. 같은 곳에서 똑같이 훈련장 위에 있는 리안을 보니, 문득 그때 사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던가. 서율이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허튼소리는 내뱉어도 거짓말은 않는 사형의 얘기였지만, 서율은 도저히 저걸 농담 취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등급의 차이는 그만큼 절대적이었으니까.

가끔 동급에서도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천재들이 나오기는 한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서율도 그중 하나고, 미르는 그 사이에서도 천재로 떠받들여지는 인물이다.

허나 그들 중 누구도 윗 단계를 상대로는 10분조차 버티지 못한다. 신체가 좀…… 많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4급이 3급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믿기가 힘들었다.

‘……20분 정도는 버틸지도 모르겠네.’

서율이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그날 보여 준 광경이 너무 압도적이긴 했다. 동급의, 그것도 숙련된 기사를 순식간에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해 봤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3급을 이기는 건 말이 안 된다.

허나 서율은 동시에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

만약이라도 사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대로 된 무공까지 익힌 리안은 대체 어느 경지에 오르는 것인가.

“…….”

살짝 몸을 떤 서율이 정신을 되돌리고 훈련장 위를 바라봤다. 리안은 살짝 인상을 찡그린 상태로 몸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서율이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계약 기념으로 리안에게 선물 받은 것들 중 하나다.

‘50분…….’

이미 짐작했던 시간은 지났다. 서율이 살짝 놀란 눈으로 훈련장을 힐끗거렸다. 리안은 이제 인상을 찡그리는 기색도 없다. 오히려 꽤 평온해 보이기까지 한다.

‘……설마 저거 그냥 움직이는 거 아니야?’

의심이 돼서 유심히 보았으나, 정말 무영보의 훈련법 그대로다. 호흡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제대로…… 아니, 완벽히 해내고 있다. 오히려 그녀가 시도할 때 보다 더 흠잡을 데 없이 말이다.

‘……검술도 제대로 못 익힌 사람이 저러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서율이 경악하고 있는 그 순간이었다.

“역시 잘하네.”

“……사형?”

어느새 미르가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여긴 웬일이에요? 무영보 관심 없다더니.”

“익힐 생각 없다고 했지 관심이 없다고는 안 했어. 워낙 특이한 무공이기는 하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미르가 근처에 앉는다. 서율은 잠시 뚱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면서 해독할 때 게으름은 왜 피워요? 거의 7할은 나 혼자 했잖아요.”

“사매 직관이 늘었으면 해서였지. 항상 봐야 하는 걸 놓치잖아.”

“말 진짜 얄밉게 한다니까.”

서율이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역시 잘하네, 라는 건 무슨 뜻이에요? 무영보가 리안 경한테 맞을 거라는 거 알았어요?”

“당연하지.”

“……그건 왜 당연한데요?”

또 무시당할 걸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이유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미르는 서율을 업신여기는 기색 없이 순순히 답했다.

“쟤는 평상시에도 항상 생각하면서 움직이고 있잖아.”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원래부터 무영보 훈련을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힘 조절 때문에.”

“……힘 조절이요?”

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신체잖아. 아마 보통 사람들처럼 움직이면 문제가 발생할 거야. 살짝 열려 했을 뿐인데 문이 부서진다거나, 악수하려 했을 뿐인데 상대 손을 아작 내 버린다거나.”

“……이미 평상시에도 그거 하나하나를 전부 의식하면서 움직이고 있었다고요?”

“그래.”

미르는 숨을 고르고 있는 리안을 담담히 바라보며 말했다.

“무영보는 쟤를 위한 무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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