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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코드가 보여-82화 (82/225)

너의 코드가 보여 (82)

“무슨 생각해?”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멍 때리고 있었나?

훈련장 밑을 보니 미르와 서율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

“빨리 오셨네요. 기척도 못 느꼈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보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물어보고 싶은 게 조금 있었거든요.”

“에이, 뭔지는 몰라도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벌써 이 집에 얹혀 산 게 2주가 넘어가는데.”

서율이 원래 좀 밝기는 한데, 지금은 유독 좀 과장스럽다.

내가 그리 심각해 보이나?

살짝 검을 뽑아 얼굴을 비쳐 보았다.

대부분은 평소와 비슷하다. 다크서클 조금 내려온 것만 빼면. ‘초인’ 달고 이러기가 쉽지 않긴 하다. 최근 훈련을 너무 많이 했나 본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확실히, 두 분이 차지하고 있는 방값이 어마어마하긴 하죠.”

“그……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서율이 훈련장 위로 올라온다. 미르도 하품하며 뒤따라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둘을 맞았다.

“혹시 진짜 숙박료 내려는 생각이면 농담이니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 그게 아닌 건 아닌데……. 아무튼.”

서율이 고개를 흔들었다.

“용혈, 차원 폭풍 말하셨던 거 있잖아요. 그거 리카르도 경이 조사하셨는데, 진짜라고 하셨어요. 언제 멎을지 모르겠다고…….”

“유감스럽게 됐습니다.”

솔직히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이라 별생각 안 들었다. 그래도 예의상 말했는데, 서율이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진짜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된 거죠. 돌아가자니 목숨을 내놔야 하고, 여기 살자니 몸 누울 곳이 없고.”

“누울 곳은 제가 마련해드릴 수 있는데. 미르 경은 이미 싸인한 거 아시죠?”

“네. 저 망할 인…… 사형이 뭐 제대로 알고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망할은 안 고치는 거야?”

미르가 불쑥 물었다. 서율은 그쪽을 찌릿 째려봤다.

“사형은 좀 닥치고 있어요. 만날 그 직감이니 뭐니 하면서 넘어가려 하지 말고. 솔직히 계약서 내용 제대로 보지도 않았죠?”

“어차피 이쪽 말로 쓰여 있을 텐데 뭐.”

그 말에 서율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첫 장도 안 읽어 본 거예요? 리안 경이 옆에 살짝 동대륙 언어로 내용 요약까지 해 놨는데?”

“세심하네. 맨 앞장에 싸인만 해서 몰랐어.”

“……진짜 죽어 인간아.”

서율은 크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확실히 조건은 괜찮더라고요. 거기에는 불만 없는데, 진짜 다른 국가랑 충돌하고 그럴 일은 없는 거죠?”

이미 한 번 했던 질문이다. 설마 까먹은 건 아닐 테고, 그만큼 걱정된다는 뜻이겠지. 충분히 이해는 간다. 본인 나라는커녕 대륙도 아닌 곳에서 모르는 인간들과 싸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확언은 못 드려요. 제가 먼저 시비 걸 생각은 없는데, 그쪽은 어떨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만약의 경우라도 인명 피해가 발생할 일은 없을 거고, 두 분이 연관될 일도 없을 거예요.”

“음…….”

서율은 살짝 웃으며 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안심이 되네요. 여기요. 싸인은 해 놨어요.”

그러면서 두 손으로 공손히 계약서를 건네 온다. 나도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조심스레 그걸 건네받았다.

동방의 마지막 용 미르.

동방의 마지막 봉황 서율.

동쪽 서쪽 합쳐서 최정상의 재능을 가진 둘을 영입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진짜 한 5년만 지나도 왕국 하나랑 떠 볼 만하겠는데.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계약서를 곱게 접어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대우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동쪽은 생각도 안 나게 해드릴 테니까.”

“말만 들어도 안심되네요.”

서율이 살포시 웃는다. 그 옆에서 미르가 늘어지게 기지개 켜더니 대뜸 물어왔다.

“그래서 뭐 물어보려고 부른 건데?”

“이거요.”

말하면서 책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2년 전 제리스에게 받았던 정체 모를 무공서다. 방 한쪽 구석에 박혀 있던 걸 얼마 전 발견해 읽어 봤는데, 이게 좀 묘하다.

“동쪽에서 건너온 책인데, 무슨 소린지 영 이해 안 가서요. 혹시 두 분이라면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불러 봤어요.”

“동쪽 언어 익힌 거 아니었어?”

“읽을 수 있는 거랑 해석하는 건 별개더라고요. 뜬구름 읊는 소리가 너무 많아요. 대충 보법 설명하는 건 알겠는데…….”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쏴라. 이 정도면 납득이라도 하겠다.

그런데 ‘흔들바람에 흩날리는 황소와 같이 하늘로 솟구쳐라. 두 발로는 자연을 딛고, 그 몸은 운명에 맡겨라.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결국 길이 열릴 것이니.’ 이딴 소리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

인간의 언어인데, 이해가 가는 건 두 발로 자연을 디디라는 말 하나뿐이다. 뭐 대충 땅을 박차라 그런 뜻이겠지.

헌데 세상에 대체 어떤 황소가 흔들바람에 흩날린단 말이냐. 몸을 운명에 맡기란 건 또 어떻고? 절벽에서 점프하고 인생 하직이라도 하라는 뜻인가?

그나마 저것도 수백 페이지 되는 내용 중에 가장 명확해 보이는 내용들이다. 솔직히 나머지는 저자가 약 빨고 쓴 거 아닌지 의심 간다.

미르는 피식 웃더니 책을 건네받았다.

“동쪽 책들이 좀 그런 편이긴 하지. 대부분 일부러 꼬는 거야. 일종의 암호문 같은 거거든. 연이 없는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게.”

알고는 있다. 내가 설정으로 넣었던 내용이니까. 문제는 알아도 방법이 없다는 거지.

미르가 계속해서 말했다.

“뭐, 일단 읽어는 볼게. 해석할 수 있다고 확언은 못 하겠지만.”

그러더니 바닥에 쫙 책을 펴 놓고 서율과 같이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한다.

책상이라도 준비해 놨어야 하나.

저게 만약 쓸 만한 보법이면 바로 익혀야겠단 생각만 해서 장소는 신경도 못 썼다. 자연스러운 거 보면 동방에서도 자주 저러고 있던 거 같기는 한데……. 하긴, 훈련하다 말고 서재에 가서 비급 읽고 오는 것도 우습긴 하지.

나는 그쪽을 일별하고 근처에 있던 바벨을 들어 올렸다.

인상 찡그리는 거 보니 생각보다 오래 걸릴 거 같아서.

하지만 저 둘이 해석을 못 할 거라는 상황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무려 용과 봉황 아닌가.

동방에서 그 칭호는 절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진짜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들에게만 붙이는 거지.

게임에서도 저 둘이 이해하지 못하는 비급서는 없었다. 시간이 좀 걸릴 수는 있어도, 결국은 나한테 번역본을 줄 거란 소리다.

나는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참 뒤 미르가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거, 그냥 약 빨고 쓴 거 같은데?”

* * *

설마 진짜 약 빨고 쓴 책일 줄이야.

‘저 높은 하늘을 알록달록 색 고양이들이 평화로이 거니는구나.’라는 구절 봤을 때 닫아 버렸어야 했는데. 난 또 뭐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움직여라, 그런 뜻인 줄 알았지.

“…….”

별로 1골드 주고 샀다는 비급에 대단한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다. 나부터가 여태까지 방 한구석에 처박아 두기도 했고. 저게 뭐 알고 보니 절대무공이다 이런 걸 바랐다면 오히려 인생을 너무 물로 보는 거지.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었는데. 이제 와 갑자기 시선이 갔던 거 보면, 뭔가 정신 돌릴 곳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후…….”

아리나가 요상한 말 던지고 간 것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신경 쓰인다.

말만 들으면 고백 같은데, 걔가 진심으로 내뱉은 건지 아니면 또 농담으로 지껄인 건지 구분이 안 가서. 태도가 워낙 여상스러워야지.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제껏 애써 회피하고 있던 생각이 머릿속에 박혔단 거다.

멸망을 피한다는 목표는 세웠는데, 정작 나의 미래는 한 번도 그려 본 적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지구로 돌아가나? 여기서 삶을 꾸리나? 그럼 가정은? 결혼도 해야 하는 건가? 등등.

덕분에 요새 머리가 좀 멍하다.

“…….”

나는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 냈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한 문제지만, 일단 살고 보는 게 더 중요한 문제 아니겠나.

지구로 돌아갈 방법의 실마리도 안 보이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멸망에 대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뭐라도 하긴 해야 하는데…….”

너덜너덜한 책을 구석에 던져 놓고 크게 한숨 쉬었다.

솔직히 지금 나는 그냥 힘센 애새끼랑 다를 게 없다.

마력이나 신체는 상당히 키웠지만, 정작 검술이나 보법 같은 건 거의 문외한 아니던가.

그게 뭐 내 노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다. 감당 안 되는 힘 조절하는 법 익히는 것만으로 빡세서 그랬지.

물론 그 마력이나 신체만으로도 웬만한 기사들은 줘 패고 다닐 자신이 있다. 동급은 당연하고 조금 무리하면 한 단계 위까지.

사실 성장세만 보면 오히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가끔은 나부터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

하지만 슬슬 플러스 알파가 필요한 시점이기는 하다. 언제까지 계속 바벨이나 들고 주구장창 마력만 모을 수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마침 내게는 인생을 날로 먹을 수 있는 수단도 있었다.

‘콘솔 창.’

[현재 포인트: 8,000]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 창이 시야를 채운다.

거두절미하고 보법들부터 검색해 봤다.

발을 떼는 것만으로 적을 무너뜨린다는 천마 군림보(S) 8,000포인트.

81가지 변화로 상대의 시선을 현혹시켜 버린다는 구구미종보(S) 7,000포인트.

움직이지 않는데 가장 빠르게 움직인다는 부동명왕보(S) 7,500포인트.

…….

무협지 좀 읽어 본 사람들이면 다 알 만한 보법들이 줄지어 이어졌다.

전부 말은 거창하지만, 요컨대 상대를 쫄게 만들고 부산스럽게 움직인다는 뜻이다. 부동명왕보는 이게 보법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모두 내게 필요한 스킬들은 아니었다. 적을 위압하는 건 검의 능력으로 대체 가능하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건 내 전투 스타일과 맞지 않으니까.

내가 생각해 둔 건 하나뿐이다.

바로 무영보(A).

등급은 위에 있는 것들에 비해 낮지만, 보법의 기본에 가장 충실하다. 좌우로 순식간에 움직여 공격을 피하고, 숙련되면 적 뒤로 넘어가는 것까지 가능하다.

보법은 이게 보법이지. 뭐 패기 같은 거 뿌리고 다닐 게 아니라.

포인트도 저 위에 있는 것들의 절반에 가까운 5,000점밖에 안 든다. 코드 변경을 통해 습득하면 3,000점, 그리고 서책으로 받으면 2,500점이다.

조금 고민하다가 서책으로 선택했다.

특성은 습득하는 순간 바로 몸에 적용이 되지만, 스킬은 어차피 숙련될 때까지 익혀야 하니까.

동시에 허공에서 빳빳한 책 한 권이 갑자기 나타났다. 아니, 그보다는 원래 거기 있었는데 내가 인식을 못 하고 있었을 뿐인 느낌이다.

이미 몇 번 본 적이 있던 터라 별 감흥도 없이 책의 첫 장을 펼쳤다.

[달빛에 비추는 토끼의 그림자가 박쥐처럼 날쌔게 움직이니…….]

턱.

바로 책을 덮었다.

“……일단 미르한테 다시 가 봐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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