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81)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판단이 안 선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는 제법 눈치가 있는 편이라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아리나는 여태 만나면서 그런 낌새를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타냐의 경우엔 금방 알아챘는데 말이다.
그 덕분에 편히 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그때 내 얼굴을 보던 아리나가 피식 웃는다.
“농담이에요. 얼굴 심각해진 것 봐.”
“……진짜 농담 맞냐?”
“그럼 진담일까 봐요? 도끼병이에요, 그거.”
……그건 좀 찔리는데. 실제로 얼마 전까지 내가 도끼병 걸려서 과민반응하는 거 아닌가 의심했던 차니까.
아무튼, 아까 그게 진담이 아니었다는 건 알겠다. 저게 연기로 꾸며 낸 모습이면 쟨 신관이 아니라 연극을 해야지. 그쪽 관련된 특성이나 설정도 없었고.
아리나가 타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90도 직각으로.
“진짜 죄송해요. 내심 그런 거 아닌가 생각은 했는데, 입으로 튀어 나간 건 충동이에요. 가끔 말이 뇌를 안 거치고 나갈 때 있잖아요.”
“…….”
타냐는 멀뚱히 그 노란 정수리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됐어. 나도 조금 과민 반응한 거 같고.”
“진짜 죄송해요.”
아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엔 진짜 미안한 감정이 가득하다.
“주교님한테 입방정 그만 떨라고 혼날 때마다 납득 못 했었는데, 이젠 진짜 정신 좀 차려야겠어요. 얘가 막 지 혼자 움직이네.”
“아는 사람 상대론 조절할 필요 없는데, 처음 보는 사람 상대론 그래야겠다. 특히 신도들.”
사실 쟤가 여태 신전 안내역 맡고 있는 게 레이튼에서 제일 미스터리하다. 진작 잘렸어야 하는 건데.
아리나는 살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안 님은 제가 입방정 떠는 게 나쁘지 않은가 봐요? 주교님은 항상 너 그 버릇 못 고치면 시집 못 간다고 뭐라 하던데.”
“뭐, 나름 재미는 있어.”
“음……. 그럼 고치는 건 생각해 볼게요. 잔소리 좀 더 듣지 뭐.”
커다란 눈동자가 둥글게 휜다.
……솔직히 저 모습을 보니 왜 여태 안내역에서 안 잘렸는지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럼 그만 나가 볼까요? 전부 식사 끝나신 거 같은데.”
그 말대로 우리는 가게 밖으로 나섰다. 물론 나가기 전 종업원에 대한 컴플레인 넣는 것도 잊지 않고.
* * *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의자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옆에는 아리나만 남긴 채.
“……축하빵은 빵이 아니라니까.”
“저도 이제 알아요. 그래도 한 번 가 봐야지 생각했었는데 안 가 보면 아쉽잖아요.”
그 말에 한숨을 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레이튼의 유일한 디저트 가게. 좀 궁금하긴 했는데, 이건 뭐 그냥 데이트 코스다. 근처에 자리 잡은 것도 대부분 젊은 연인들이고.
아까 들었던 농담이 떠올라 조금 뻘쭘하다. 우리도 남들 눈엔 그렇게 보일 게 뻔했으니까.
게다가 손님 대부분이 노블레스다. 나를 알아본 녀석들이 있는지 아까부터 시선이 따갑다. 이상한 소문만 안 났으면 좋겠는데.
“타냐 님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죠?”
아리나가 갑자기 물었다.
글쎄. 그림이 더 이상하지 않았을까.
“피곤하다잖아. 그럴 만도 해.”
“체력이 좀 약하신 편인가 봐요?”
“그것도 그런데…….”
나는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아리나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래도 굳이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아마 오랜만에 나와서 정신적 데미지가 심한 거 같은데, 남들이 알면 좀 쪽팔릴 얘기 같아서. 살짝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근데 이건 네가 사는 거지?”
“네. 혹시 떼먹을까 걱정이면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돈 아니니까.”
아리나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웃었다.
“뭐, 진짜 그럴 거라 생각해서 물은 건 아닌 거 같지만요.”
“……그래.”
떨떠름하게 의자에 몸을 기댄 순간이었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내 또래 남자와 호위기사로 보이는 사내 하나다.
노블레스인가 했는데, 그보단 복장이 좀 더 단조로워 보인다. 좋은 의미로.
걔네는 본인들도 귀족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고 있기 때문인지 자격지심 같은 게 좀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걸 보통 화려하게 치장하는 방법으로 덮고는 한다.
요컨대 존X 튄다는 뜻이다.
그에 반하면 저 둘은 딱 적당한 느낌이다. 너무 호화스럽지도 않고, 별로 후줄근해 보이지도 않고. 딱 귀족의 정석이라 해야 하나.
휘황찬란한 의상만 보다가 저리 정돈된 옷을 보니 좀 반가운 기분마저 든다.
그래, 옷은 저래야지. 딱 봐도 인성까지 바를 거 같다. 차림새가 그 사람을 나타내는 지표라 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런 나의 기대는 남자가 입을 열자마자 깨져 버렸다.
“하찮은 놈들.”
……뭐지? 이 신박한 새끼는.
차림새는 그 사람을 대변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나도 2년 전에 옷차림 때문에 차별당한 경험이 많지 않았던가.
그때 옆에서 아리나가 속삭였다.
“노블레스는 아닌가 봐요.”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한데, 왜?”
“다른 사람들 얼굴이요. 뭐 저런 게 다 있나 하는 표정이잖아요. 리안 님은 왜요?”
“노블레스에 저런 새끼들 많았는데, 보일 때마다 밟아 주다 보니 어느새 사라져 있더라고.”
“…….”
아까부터 괜히 시선이 꽂히던 게 아니다.
나는 유명세에 비하면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인데, 2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훈련장이나 사무실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끔 있는 외출 때마다 저런 군상들이 보이는 거 아니겠나. 그냥 두고 보자니 꼭 나한테까지 시비를 걸어서 몇 번 자연스레 상대해 주게 됐다.
덕분에 나는 노블레스에 얼굴이 꽤 알려진 편이다. 여기도 익숙한 놈들 몇 보이고.
그중 하나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너희 당장 사과하지 못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버러지 주제에.”
“제발 사과해 줘…….”
목소리가 애절하기까지 하다.
아리나가 황당하단 듯 나를 바라봤다.
“대체 뭔 짓을 했으면 저래요?”
“딱히 뭘 따로 한 건 아닌데……. 힘 조절 안 될 때라 주위에 피해가 조금 가긴 했지.”
“…….”
“전부 배상했어.”
“……네.”
아리나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보다 평민 주제에라……. 너무 전형적인 건 둘째 치고, 확실히 노블레스가 할 대사는 아니다. 정확히는 몇 있었는데, 이제는 없다.
왕국에서 온 귀족인가?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레이튼을 찾는 놈들이 있긴 하다. 딱히 출입이 금지된 것도 아니니까. 굳이 오려는 인간이 없어서 그렇지.
아무튼, 노블레스의 애절한 목소리는 저 녀석 마음속에 닿지 못했나 보다.
놈은 싸늘한 눈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레이튼에는 귀족인 척하는 버러지들이 득실거린다더니, 정말 사실이군. 역겹고, 천박하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
“…….”
젊은 연인들이 많은 만큼 한둘쯤 객기로 나설 만도 한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슬쩍 보니 대부분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다.
내가 나설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솔직히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어느 정도 쟤 말에 공감하는 것도 있고.
귀족제도도 납득 못 하고 있는 판국에 그런 척하는 애들이 이해 갈 리가 있나.
입은 험하지만, 딱히 주변에 피해를 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신경 끄고 주문한 메뉴나 기다리는데, 녀석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네놈이 이들의 리더인가?”
“……대체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냐?”
옷도 수수하게 입었는데.
녀석이 코웃음 치며 주위를 훑었다.
“역시 아닌가 보군. 저 하찮은 놈들이 너만 보고 있길래 혹시나 했을 뿐이다. 자네는 어느 가문 출신인가?”
“가문 없는데.”
“별로 밝히고 싶지 않은가 보군. 이해한다. 우리 같은 고귀한 혈통이 이런 쓰레기통에 왔다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
“아니. 평민이라고.”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거 보니 아르곤 출신인가? 나는 칼페온에서 왔다.”
“…….”
대화가 안 통하네. 너는 떠들어라, 하는 심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녀석이 멋대로 우리 테이블에 와 앉는다.
“너는 레이튼에 무슨 볼일이지?”
“난 여기 주민이다. 그보다 좀 가 주면 안 되냐?”
“나는 리안 상회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
꺼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가 쏙 들어갔다. 갑자기 너무 익숙한 이름이 들려서.
“리안 상회는 왜?”
“아버지의 명령이다. 커질 가능성이 보이니 거래를 트라고 하더군.”
우리 고객님이었나? 그럼 얘기가 다르지.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세를 고치려는 순간. 녀석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래 봤자 레이튼의 버러지가 차린 곳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아버지께서도 보는 눈이 떨어지신 거지.”
“…….”
“조금 잘나간다는 건 인정한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숙이고 갈 필요는 없잖으냐 말이다. 그 버러지를 직접 부르면 될 것을, 어째서 내가 이런 쓰레기통까지 직접 와야 하는 거지? 정말, 귀족의 자존심이…….”
“야.”
그제야 녀석이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뭐지?”
“거래할 일 없으니까 그만 돌아가라.”
놈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칼페온의 귀족인 내가 직접 왔는데, 대체 어떤 인간이 거래를 거절한단 말인가?”
“나라는 버러지다 새끼야.”
멍청해 보이는 두 눈이 껌뻑거린다. 녀석은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이윽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계속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군. 자네가 평민일 리 없지 않은가.”
“평민……은 모르겠고, 그분은 진짜 상회주 맞아요.”
옆에서 상황을 보던 아리나가 끼어들었다.
“그쵸, 리안 님.”
“…….”
리안이라는 이름에 녀석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리고 주위를 슥슥 둘러보더니 한참을 침묵한다. 갑자기 사색이 되는 게, 거짓이 아니라는 판단을 마쳤나 보다.
“……자네가 리안 상회 주인 리안이라고?”
저렇게 들으니 리안리안이 생각나서 별론데.
“맞아.”
내 말에 녀석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자연스레 고귀함이 흘러나온다 싶었다. 타고나는 성품은 신분을 따지지 않는 법이군. 이런 도시에서도 그런 반짝임을 유지하는 게…….”
“알겠으니까 일단 좀 가라.”
“……거래해 줄 건가?”
“생각해 보고. 근데 네가 계속 앞에 보이면 그 생각도 안 날 거 같다.”
“바로 눈앞에서 꺼져 주도록 하겠다.”
녀석은 군말 없이 호위기사를 데리고 가게를 나섰다. 입구 쪽으로 어이없다는 시선들이 쏟아진다.
“눈치는 없어 보이는데, 판단은 빠르네요. 의외로 능력 있는 귀족이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아리나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저희도 일단 나갈까요? 계속 있기엔 분위기가 좀 그런데.”
그 말에 나도 주위를 둘러봤다. 아까완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중엔 두려움이 포함된 것도 몇 개 있다.
아니,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아무튼, 확실히 마음 편히 있을 환경은 아니다. 살짝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여기서 뭐 먹다간 체하겠다.”
테이블에 디저트값을 올려놓고 밖으로 나섰다. 아리나가 곁으로 쫄래쫄래 따라붙는다. 슬쩍 보니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엄지와 검지로 턱을 받치고 있다.
아닌 척하지만 디저트 가게 은근히 기대했던 거 같은데, 웬 미친놈을 만나서는…….
거리 중간쯤 왔을 때. 나는 살짝 겸연쩍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나중에 사람 시켜서 신전으로 저기 디저트 배달 좀 해 줄게.”
내 말에 아리나가 턱을 받치고 있던 손가락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아뇨, 괜찮아요. 리안 님 잘못도 아닌데요, 뭐. 결국 돈도 제가 안 냈잖아요.”
“내 잘못은 아닌데, 나 때문인 건 맞으니까. 거기다 먹지도 않은 걸 너한테 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진짜 괜찮아요. 솔직히 디저트, 별로 관심도 없었고.”
관심이 없기는.
“너는 관심도 없는 데를 두 번씩이나 가자고 하냐?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너희 신전 사람들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배달해 줄 테니까, 이참에 이런 사람이랑 계약했어요, 뻐기기나 해라.”
“음…… 진짜 괜찮은데.”
아리나가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여상하게 말한다.
“그럼 얻어먹기만 하는 것도 죄송하니까, 대신 제가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드릴까요?”
솔직히 별로 궁금하진 않았다. 또 별 내용 없는 입방정이나 떨겠지.
하지만 평상시처럼 아니라고 하기에는 아직 가게에서의 일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뭔데?”
내가 묻자, 아리나가 다시 슬쩍 웃었다.
“혹시 신관은 하루에 한 가지 거짓말밖에 할 수 없다는 거 아세요?”
“…….”
의미심장한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아리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렇게 꽤 거리가 벌어졌을 때쯤. 갑자기 휙, 뒤돌아 선다.
“그럼 제가 오늘 리안 님 좋아할 수도 있다고 한 게 거짓말일까요, 그걸 농담이라고 한 게 거짓말일까요?”
커다란 눈동자가 호선을 그린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