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80)
서약을 받고 다시 이주일이 흘렀다.
여태 동안 1기사단은 생각보다 경비 일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황궁과 귀족의 안전만을 떠올리던 자들이 요즘은 나름 시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거의 천지가 개벽했다 여길 만한 변화다.
아마 한스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덕 같은데,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네.
뭐, 그렇다고 저들이 겨우 2주 만에 감정을 털어 냈다고 여기는 건 아니다. 그래도 묵묵히 경비일 해내는 것만으로 대견하지 않은가.
세상에는 본인 일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판국이니까.
그래, 눈앞의 예비 성녀처럼 말이다.
“……진짜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아요? 키탄 님이 비교적 겸업에 관대하긴 한데, 컴퍼닌지 뭔지 듣도 보도 못한 집단 가는 것도 인정해 주실지는 잘 모르겠어요.”
“각각의 신이 관장하는 영역에 관한 정의부터 경전에서 명시하는 초법적 권한 문제까지 전부 확인했어. 대충 설명해 주려면 며칠 걸릴 거 같은데, 해 줄까?”
“그냥 싸인할게요.”
아리나가 질린 얼굴로 종이에 이름을 써넣었다. 작성된 계약서를 품속에 집어넣고, 흐뭇하게 웃었다.
자그마치 키탄의 성녀가 될 녀석을 컴퍼니에 들인 거다. 그것도 거저나 다름없는 돈으로.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지.
“밥 먹으러 가자. 계약 기념으로 고기 없는 고기 수프 사 줄게.”
“제가 순순히 싸인했다고 싸게 볼 생각은 마세요. 빚져 둔 게 있으니까 하는 수 없었을 뿐이에요.”
아리나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이야. 그럼 ‘왕도’에 갈래? 2년 전 갔던 음식점 있잖아.”
“뭐, 음식도 좋은데요…….”
아리나가 조금 뜸 들이더니 불쑥 묻는다.
“혹시 리안 님은 진짜 리안교를 차릴 생각이에요?”
그 말에 막 일어나던 다리를 되돌렸다. 미친 건가. 2년 전에도 같은 소리를 했던 게 기억나긴 한다. 그때는 농담이라는 기색이 강했는데, 지금은 반쯤 진심으로 물어보는 것 같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그렇잖아요. 요즘 신전에 오는 신자들이 항상 하는 소리가 뭔지 알아요? 리안 님은 어땠느니, 성자님은 어땠느니……. 돈이라도 내고 얘기하면 말도 안 해.”
아무리 봐도 신관이란 직업 달고 할 소리는 아닌데.
“너희가 더 일을 잘하면 되잖아.”
“무슨 소리세요? 저는 항상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요. 문제는 신도들이죠. 제가 제대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안 만들어 주거든요.”
“네 담당이 뭔데?”
“성금, 헌금이요.”
“……아, 그래.”
손님 맞이하는 신관부터 이런데 신도가 늘 리가 있나.
아리나는 턱을 괴더니 늘어지게 하품했다.
“아무튼, 리안 님 때문에 찾아오는 신도가 얼마나 줄었는지 아세요? 살아 있는 성자가 있는데 신이 무슨 소용이냐고. 요즘은 신전을 돈 내면 치료해 주는 의원 정도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설마 그게 나 때문이겠냐.”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키탄의 신전. 2년 전에도 신자들이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는데, 지금은 더하다. 어느 수준이냐 하면, 거의 신관이랑 신도 숫자가 엇비슷해 보일 정도다. 아니, 오히려 신관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대륙에서 가장 큰 키탄의 신전이 이 정도면 다른 신전 사정은 안 봐도 뻔하다.
결국 악순환의 반복이다. 신전은 수금 수입이 없으니 치료 수익에 목을 매게 되고, 신도들은 그걸 보고 신관이란 자들이 돈에 환장했다고 신앙심을 놓아 버리고.
아리나의 말을 농담으로만 받아들일 건 아니란 소리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신전 수입이 준 게 내 잘못이면 뭔 방법이라도 생각해 보겠는데, 별로 관련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진짜 나 때문에 신도가 줄었을 리도 없고.
성자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반쯤 농담 같은 거니까.
“뭐 그래도 너는 이제 계약금도 있으니 문제없잖아. 고기나 잔뜩 사 먹어라.”
“리안 님은 가끔 저를 육식동물 비슷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채식이 잘 안 받을 뿐이지, 딱히 고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요.”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 육식동물이라 해.”
“요즘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어요. 고기 안 먹는다고 죽을 정돈 아닌데요.”
“그래서, 고기 없는 고기 수프 먹겠다고?”
“아뇨. 왕도로 가죠.”
아리나가 벌떡 일어난다. 그 속도가 거의 기사에 버금갈 정도다. 진작 그럴 것이지. 나도 피식 웃으며 문을 열고 나섰다.
밖은 2년 전과 비교할 바 없이 깔끔했다.
흡사 돼지 축사와 21세기 길거리 정도의 차이랄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현대보다 나은 거 같기도 하다.
나는 그 모습을 일별하고 말했다.
“다른 데 괜찮은 곳 있으면 거기 가도 되고.”
“저야 돈도 별로 없는데 음식점을 뭐 알겠어요? 그래도 가 보고 싶은 곳이 있기는 해요.”
“어디? 음식점이야?”
“아뇨, 디저트 가게요.”
……디저트?
얘한테서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해 본 말인데.
“미트 파이 같은 걸 파나?”
“리안 님은 대체 왜 저랑 고기를 떼 놓지 못하시는 건데요?”
아리나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뭐……. 저는 디저트에 별로 관심 없는 건 맞는데요…….”
“갑자기 입맛 바뀐 거면 병 걸린 거 아닌가 의심해 봐라.”
“저 먹으려는 게 아니고 리안 님 드리려고요.”
“……나한테? 왜?”
얘가 그리 기특한 생각할 인간은 아닌데.
아리나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계약한 건 저희 둘 다 마찬가진데 저만 얻어먹을 수는 없잖아요. 저도 보답하려고요.”
“근데 왜 디저트야? 나 단 거 좋아하게 생겼어?”
“아뇨. 그게 아니라, 밖에선 축하빵이란 걸 선물한다고 들었거든요. 저는 리안 님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 그걸로 퉁 치려 했죠.”
“…….”
마음은 고맙다. 마음은 고맙긴 한데…….
“너 축하빵이 뭔지는 알아?”
“그냥 빵 이름 아니에요?”
이럴 줄 알았다.
“보통 축하받는 상대를 때리는 걸 축하빵이라고 해. 생일빵 비슷한 건데…….”
“……축하받는 사람을 왜 때려요? 지금 저 놀리려고 없는 말 지어내시는 거죠?”
“내가 놀려도 이런 걸로 놀리겠냐.”
“……아니, 뭐 그런 문화가 있대요? 도통 이해가 안 되네.”
그러게 말이다. 그리 생각하며 시선을 돌린 순간, 뜬금없이 보이는 코드에 깜짝 놀랐다. 밖에서 볼 일이 거의 없는 녀석이니까.
[DT-2-32-2]
백만 년 만에 밖에서 보는 타냐의 코드였다.
* * *
살면서 이렇게 불편한 순간이 있었나 싶다.
내 왼쪽 오른쪽 대각선엔 각각 타냐와 아리나가 앉아 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조금 묘하다.
뭔가 아침드라마에서 많이 본 구도 같은데. ‘감히 네깟 년이 내 남편이랑 바람을 피워?’ 하면서 물 뿌리는 그런 거.
“…….”
물론 절대 그런 상황은 아니다.
아리나와는 아예 그런 관계가 아니고, 타냐는…… 조금 관련 있긴 한데, 아무튼 아니다.
그러니까 이게 그렇게 보이는 건, 그냥 내 뇌가 막장에 절어 버린 탓이겠지.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옆에 서 있던 웨이터가 물었다. 그도 우리 조합이 이상해 보이는지 눈빛이 묘하다. 오해라고 말하고 싶은데, 뭐가 오해인지 모르겠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직장 동료만 모아서 회식 자리를 만들면 이런 분위기지 않을까.
나는 일단 오른쪽을 보며 물었다.
“아리나, 너는 고기 요리면 되지?”
“네. 리안 님 편견에 힘을 더해 주는 건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요.”
“타냐, 너는 채식이면 되고?”
“……응.”
의견 수렴이 끝나고 내 것까지 주문을 마쳤다. 웨이터가 나를 살짝 노려보더니 자리를 뜬다. 아마 여자 둘 끼고 노는 놈팡이 같은 새끼라 생각했나 보다. 그런 거 아닌데.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둘은 오늘 서로 처음 보는 거지? 일단 인사해. 여기는 같이 사는 타냐고, 저쪽은 키탄의 신관 아리나야.”
“같이 살아요?”
아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해 살 만한 단어 선택이긴 하다.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너도 와 본 적 있잖아. 다린도 만났고. 우리 저택이 웬만한 신전보다 더 클걸. 같은 집 사는데도 서로 얼굴 못 보는 날이 다반사야.”
“……집에 와 본 적이 있어?”
이번엔 타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런 건 금시초문이란 표정이다. 실제로 처음 듣기도 할 거다. 얘랑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 굳이 얘기해 준 적 없으니까.
“2년 전에 한 번. 신전이랑 얽힌 일이 조금 있었거든.”
“그렇구나…….”
“응.”
“…….”
그리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테이블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아까 그 웨이터가 서빙하며 실실 웃는다. 자기가 생각하던 상황이 아니라고 깨달은 거겠지.
저 새낀 나갈 때 무조건 컴플레인 넣는다.
“흐음…….”
아리나가 고기를 썰며 나와 타냐를 번갈아 쳐다봤다.
“혹시 두 분 그렇고 그런 사이예요?”
타냐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나는 그걸 힐끗 보고 확실하게 말했다.
“아니.”
“그런 거 치곤 분위기가 좀…….”
“그냥 최근 한 번 싸우고 어색해서 그래. 화해했으니 상관없어. 맞지?”
시선을 돌리며 묻자 타냐가 흠칫 몸을 떤다.
“어? 아, 응. 이젠 괜찮아.”
“으음…….”
아리나가 고기를 입에 넣으며 다시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곤 어깨를 으쓱인다.
“뭐, 그러면 상관없는데요. 식사는 안 하세요?”
“해야지.”
식사 도중에도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래도 음식 기다릴 때보다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 그냥 먹는 데 집중하면 되니까. 아까 서로 멀뚱히 보고만 있을 때는 들어간 것도 없는데 체하는 줄 알았다.
제일 먼저 접시를 비운 아리나가 흐뭇한 얼굴로 배를 통통 두드렸다.
“아, 잘 먹었다. 그럼 이제 진짜 궁금한 거 물어봐도 돼요?”
“계약사항 얘기야? 아까 다 말해 줬잖아.”
“아니요, 그건 됐고요.”
아리나가 샐러드를 포크로 찍고 있는 타냐를 보고 살짝 웃었다.
“두 분 진짜 무슨 사인가 해서요.”
“……그게 왜 그리 궁금한데?”
“아무 관계도 없는데 젊은 청춘 둘이 같이 살 리는 없잖아요. 아무리 집보다는 숙소 같은 느낌이라 해도요. 그냥 궁금증?”
나는 살짝 한숨을 쉬며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확실히 가십거리 쓰기 좋은 소재긴 하다. 정작 현실은 많이 다르지만.
“내가 먼저 집에 오라고 했어. 2년 전에 지나가다 맞고 있는 걸 우연히 봤거든.”
“2년 전에는 그런 경우 많았잖아요. 그럼 지금 리안 님 집은 고아원이 돼 있는 거예요?”
“……그건 아니고. 그냥 우연히 쟤가 눈에 밟혔어.”
“우연이라…….”
아리나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타냐에게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빈 접시에 포크질을 하는 중이었다.
“타냐 님이라고 하셨죠?”
“……그런데?”
“혹시 고백하셨어요?”
쨍!
포크와 접시가 맞부딪혀 시끄러운 소음을 냈다. 타냐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든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눈치가 빠른 건 알았는데, 쟤는 뭐 과거라도 보는 건가?
아리나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죄송해요. 그냥 농담이었는데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네. 다 먹었으면 그만 갈까요?”
“맞아.”
불쑥 말한 건 타냐였다. 녀석은 눈꼬리를 내리고 아리나를 살짝 노려봤다.
“내가 고백한 거 맞다고.”
“…….”
아리나는 타냐를 빤히 마주 보더니 턱을 괴던 손을 풀었다.
“……음. 진짜 죄송해요. 이런 분위기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실수로 헛소리를 내뱉어서.”
“진짜 실순지 실수를 가장한 고의인지는 모르겠고, 이렇게 된 거 나도 하나 물을게.”
타냐가 툭. 포크를 놓으며 말했다.
“그러는 너도 리안을 좋아해서 이러는 거야?”
“…….”
둘은 서로 마주 보는 상태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반쯤 아연해져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왜 갑자기 진짜 아침드라마가 된 거지.
일단 분위기 수습부터 해야지 싶었다. 방금 위장에 들어간 것들이 아직 채 섞이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타냐를 바라보며 덤덤히 말했다.
“이상한 소리 그만해라. 아리나가 말실수한 거 같으니까. 너도 사과하고 끝내자.”
“……왜요?”
대답한 건 아리나였다. 그제야 마주 보던 시선을 떼고 내게 돌리는데, 얼굴엔 의문이 가득하다.
“왜긴 왜야. 네가 조금 선 넘은 농담한 건 맞잖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커다란 눈동자가 깜빡인다. 망설이는 듯 입술이 몇 번 움찔거리더니, 이내 살짝 벌어져 내게 묻는다.
“……제가 리안 님 좋아하면 뭐가 이상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