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79)
화악!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방에서 마력이 나를 찌를 듯 노려 왔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반쯤 실체를 가진 것도 한 개 보인다. 그것도 보통의 4급은 감당하기 힘들 세기로.
저거 날린 거 어떤 새끼야.
살펴보니, 맨 첫째 줄에 서 있는 기사다. 아까 한스 호명했을 때 잠깐 움찔거렸던 녀석.
일단 기억해 둔다 저 자식.
뒤에서 자이어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그 실체를 가진 마력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다.
맞는다고 부상 입고 그럴 수준은 아니나, 기분이 나빠지기엔 충분해 보인다.
우선 혼원력을 내뿜어 그에 부딪혔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던 마력이 파스슥 흩어진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약간이지만 놀란 기색으로.
“호응 감사합니다. 워낙 반응이 없어 뭐 보릿자루라도 꿔다 놓은 줄 알았지 뭐예요.”
“단장님께 얘기는 들었다만, 상당히 건방진 놈이구나.”
한스로 의심 가는 녀석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우리 보고 밥버러지라……. 그래서 낸 결론이 이거냐? 도시 경비?”
“도시 경비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오히려 굉장히 명예로운 일이라 생각하는데요.”
비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제국의 도시는 전부 왕국에 넘어간 지 오래고, 마지막 황족은 우리 집에서 리카르도의 호위를 받고 있지 않나.
즉, 레이튼을 경비하는 건 제국 최후의 도시를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란 소리다.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지만.
“도시 경비는 보통 마력도 얻지 못한 일반 병사들의 몫이다. 여기 모두는 경비단장을 맡아도 부족함이 전혀 없는 자들이지. 그런 우리에게 일개 경비를 맡으라 하는데, 이걸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일단 이름을 밝히시지요.”
“한스다.”
역시. 사실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뭔가 생긴 것도 한스 같으니까.
“좋습니다, 한스 경. 그럼 제가 묻죠. 그럼 레이튼 경비 말고 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습니까?”
“황녀…… 요인 경호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지.”
“그쪽은 리카르도 경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그분의 호위를 뚫을 실력자라면 어차피 경들이 있어도 막지 못하겠지요.”
한스는 인상을 찡그리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야 저건 그냥 단순한 사실이니까.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슬며시 물었다.
“아니면 혹시 원하는 명령이 있는 건 아닙니까?”
“……무슨 뜻이지?”
“가령, 세 왕국 침략이라든가.”
쿵!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수준으로 강당에 마력이 휘몰아친다. 나를 향해 집중되는 것도 있고, 갈 곳 잃은 것처럼 하염없이 사방으로 발산되는 것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모두가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
저 성난 마력 폭풍을 보고 있자니, 뭔가 나룻배 타고 표류하는 조난자라도 된 심정이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그 분노의 파도를 견디려 했다.
“여러분을 이해한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왕국에게 가족을 빼앗긴 것도 아니고, 보금자리를 빼앗긴 것도 아니니까요.
파도는 여전히 거세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솔직히 여러분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타냐도 세 왕국과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기사들을 바라봤다.
성난 마력의 기세와는 반대로, 그 눈에 담긴 감정들은 슬픔뿐이다.
“그러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잠깐 여유가 났을 때만이라도 좋으니 주변을 한 번 둘러보라는 것뿐입니다. 경비라도 하면서요.”
거세 보이기만 하던 파도가 조금 잠잠해졌다. 납득은 안 되지만, 일단은 수긍해 보겠단 기색이다.
당장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아무리 높은 파도라도 결국 올라가 보면 한 줄기 햇살이 비추는 법이니까.
* * *
기사들의 구역 배정이 끝나고. 나는 밖으로 나가려는 남자 하나를 붙잡았다.
“한스 경,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 말인가?”
“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를 옮기는데 그리 멀리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여기는 자경단에 딸린 강당이고, 근처에 쓸 만한 사무실이 있었으니까. 바로 함께 자경단장실로 들어갔다.
끼이익.
안에는 서류가 가득 쌓인 책상과, 손님을 맞기 위한 작은 소파 4개가 전부였다. 단장인 동시에 노블레스 후계자란 녀석이 쓰는 방이라 생각해 보면 심하게 단출해 보일 정도다.
적어도 자경단을 장난으로 운영하진 않고 있단 뜻이겠지.
한스에게 소파를 권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그만 나를 따로 부른 이유를 듣고 싶은데.”
“리카르도 경의 명령입니까?”
대뜸 뱉은 질문에, 한스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시치미 떼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연설할 때 은근슬쩍 저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아주신 거 알고 있으니까요.”
처음에 날렸던 마력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세기나 시기가 너무 적절했다.
정확히 주의를 환기시키는 타이밍이라 해야 하나.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보다 훨씬 강한 마력을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까지 감안하고 내뱉은 말이었지만, 이자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계속했던 대답들도 그렇다. 언뜻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정작 내게 진짜 불리할 질문들은 쏙 피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정체가 모호하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막말로 네가 진짜 제국민은 맞냐 따져 묻기라도 했으면 할 말이 궁했다.
증명할 방법도 없고, 솔직히 나도 모르니까.
그에 반하면 한스의 대답은 거의 연설이 더 매끄럽게 굴러가게 해 주는 바람잡이에 가까워 보였다.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리카르도 경께서 심어 두신 거 아닙니까? 대원들이 조금이라도 불만을 덜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심다니. 표현이 좀 그렇군.”
한스가 살짝 웃었다.
“솔직히 눈치챌 줄은 몰랐네. 부른 것도 그냥 연설 중 대든 것에 대한 경고일 줄 알았는데.”
“역시 리카르도 경께서 보낸 것이 맞군요.”
“아니. 그건 아닐세. 단장님은 나와 관련이 없어.”
……이건 또 무슨 뜻이지? 여기까지 와서 굳이 시치미 뗄 필요는 없을 텐데. 어차피 나한테 나쁜 일도 아니고.
하지만 한스의 표정은 정말 결백해 보였다.
“믿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네만, 내가 자넬 도운 건 자의일세. 단장님도 따로 수를 써 두셨을 것 같진 않군. 이 정도도 혼자 못 견뎌 내면 애초에 기대를 버릴 분이라.”
“……자의라고요?”
1기사단원이 자진해서 나를 도울 만한 이유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들보다 한참 어린 꼬맹이에, 아직 실력도 한참 떨어지는 애송이 아닌가. 거기다 내가 명령권을 얻게 된 연유도 전부 알고 있을 거다.
막말로 하극상만 안 벌여도 감사합니다 할 정돈데.
한스는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고 있으니 이제야 그 나이대처럼 보이는군. 1기사단을 앞에 두고 할 말 다 하는 거 봤을 때는 사실 반로환동한 애늙은이 아닌가 했네만.”
“……그래서 절 도운 이유가 뭡니까?”
“나는 1기사단에서 유일한 평민 출신이네.”
……평민? 1기사단에 평민 출신이 있다는 설정이 있던가?
모르겠다. 분명 뛰어난 자들이었지만, 역시 반쯤 몬스터 취급이었으니까. 관련된 퀘스트는 토벌해라 같은 게 전부였다.
“한스 경이 평민인 것과 저를 도운 것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정확히는 내가 평민‘이었다’는 사실이 상관 있다 할 수 있지.”
한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산처럼 쌓인 서류들을 훑었다.
“……정말 일이 많긴 하군. 기사 서른 더한다고 해결될지 모르겠어.”
“대답부터 해 주시지요. 평민이었다는 건 또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평민이 1기사단에 들어오면 받는 혜택이 뭔지 아나?”
분명 세습 귀족 작위와 가족들의 승격일 거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가족들도 전부 죽었을 거란 사실도 알겠군.”
“…….”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귀족으로 승격되었다면 아마 죽었을 거다. 왕국이 제국의 고위직들을 살려 두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괜히 노블레스가 레이튼에서 귀족 행세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한스는 툭.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런 점에서는 나도 다른 단원들과 다를 게 없지. 하지만 평민이었던 덕분에 동료들과 다른 점도 있네.”
“……평민일 때의 인연 말이군요.”
“맞네.”
이웃집 형 같은 얼굴이 살짝 미소 짓는다.
“전쟁 여파로 죽어 버린 자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알고 있던 사람들이 몇 살아남긴 했더군. 그중엔 제니아라는 여자도 있네. 마흔 살쯤 됐는데, 혹시 기억나나?”
기억이 나느냐 묻는 거 보니 아마 나도 아는 사람일 거다. 제니아…… 제니아……. 오래 지나지 않아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하나 떠올랐다. 분명…….
“기억이 났나 보군. 맞네. 헤밀튼 고아원의 원장이지. 지금은 자네 밑에서 일하고 있던데. 상회에서 고아원을 인수해 준 덕분에 말이야.”
“……그렇군요.”
“참고로 내가 거기 공동설립잘세.”
한스가 해맑게 웃었다.
“자네 덕분에 사실상 폐쇄됐던 고아원이 다시 돌아가고 있다고 들었네. 감사를 표하지.”
“…….”
“쑥스러운가 보군. 아무튼, 인연이 완전히 사라진 동료들과는 달리 아직 끈이 남아 있다는 소릴세. 그들 대부분은 결국 하는 말이 비슷했지. 리안 님 덕분에, 성자님 덕분에……. 나는 신들도 저렇게 불리는 것을 본 적이 없네.”
그러더니 그가 내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한참 보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는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나도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말하다 보니 확신이 서는군.”
한스가 허리춤에서 검집을 뽑아 들었다.
“솔직히 나는 제국에도, 황녀님에게도 충성심 따윈 없네. 미천한 평민 출신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말이야.”
1기사단만이 가질 수 있는 휘황찬란한 검집을 양손에 받친다. 기사의 충성 서약이다.
“하지만 자네라면 충성을 바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어차피 명령권도 있는 상태에서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괜찮다면 받아 줄 수 있겠나?”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 숙인 한스를 내려다봤다.
기사의 서약은 아무한테나 하는 게 아니다. 그건 최정예였던 1기사단도 마찬가지. 제국에 대한 맹세는 해도, 서약까지는 가지 않는단 소리다. 누가 뭐래도 평생 단 한 번만 할 수 있는 귀중한 의식이니까.
문제는, 내가 이런 충성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한스가 얘기한 것들도 사실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같은 도시에 있다 보니 눈에 띄었고, 마침 내게 도울 만한 여유가 남아 있었을 뿐.
내가 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성자 같은 인성을 가져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한스는 서약의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결국 한숨을 내쉬며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내가 기사의 충성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한스 경.”
하지만.
“그대는 이제부터 나의 기사입니다.”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