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78)
“……전부 기사들이라고?”
“그래.”
“레이튼에 기사급 전력이 그리 흔했나……?”
“흔하겠냐?”
당장 2년 전만 해도 A급 용병 몇 온 것만으로 죽네 마네 하던 게 레이튼이다. 하물며 1기사단은 그 기사급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 자들. 하지만 굳이 이런 이야기들을 해 주진 않았다. 할 수도 없었고.
그 대신 나는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요즘 사업 확장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렇다만……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나?”
“그중에 무력단체도 하나 만들 생각이거든. 그래서 방랑기사 몇이랑 계약했어.”
“……설마 4급 이상은 아니겠지?”
“맞는데.”
자이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단은 4급 이상 기사들을 고용할 수 없다는 거 모르나? 그건 국가의 영역이다.”
“큰 상단은 다 암암리에 한둘씩 데리고 있잖아. 너희 노블레스에도 제리스 경 있고.”
“그야 네 말대로 한둘이니까 암암리에 인정해 주는 거다. 기사로 단체를 만들어? 죽고 싶어 환장한 게 아니고서야…….”
그러더니 나를 미친놈처럼 바라본다.
뭐, 충분히 이해 가는 일이라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 같아도 테이어 테르베로츠가 갑자기 기사단 만든다고 지껄였으면 자살에도 갖가지 방법이 있구나 했을 거다.
“그건 네가 걱정할 필요 없고. 따로 생각해 둔 거 있으니까.”
“……숫자는 몇인가?”
“서른.”
“미친……!”
자이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놓여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진다.
“진짜 그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나? 세 왕국이 아는 순간 바로 군대를 파견할 거다!”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니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언제 생각 없이 일 벌이는 거 봤냐?”
나는 혼원력으로 떨어진 찻잔을 다시 테이블 위로 되돌렸다. 자이어는 흥분하던 것도 잊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두둥실 떠다니는 찻잔을 바라봤다.
“나도 꼭꼭 숨겨 두고 있던 비밀 전력이야. 굉장히 힘들게 모은 걸 자경단을 위해 빌려 준다는 건데, 이런 취급 받을 줄은 몰랐네.”
“어…… 어?”
“싫으면 됐어. 네가 아쉽지, 내가 아쉽냐? 그만 나가 봐.”
진짜 볼일 끝났다는 듯 업무 의자에 앉아 서류를 훑었다. 자이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별로 따지려 한 것은 아니다.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지.”
“알면 됐다. 그래서 받을 거야 말 거야?”
“……정말 문제없는 게 맞나?”
“없다니까. 대신 노블레스의 정보 공작이 조금 필요하긴 하겠지. 지금 당장은 밝힐 수 없는 전력이니까.”
조건을 슬쩍 끼워 넣었다. 고위급 기사 수십을 숨기는 건 수천 골드가 드는 일. 그런데 이참에 공짜로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아서다.
자이어는 한참 고민하는 기색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 정도라면 아빠…… 아버지한테 부탁하면 해결해 주실 거다.”
“그럼 계약 성립이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굳이 꾸미지 않아도 입가에 자본주의 미소가 달렸다는 게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최근 가장 고민하던 두 가지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됐으니까.
나는 기사들에 대한 정보공작 책임은 전적으로 노블레스 측이 진다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환하게 웃으며 자이어와 악수했다.
“고생했다 호구…… 아니, 친구야.”
* * *
“단원들에게 처음 내린 명령이 경비 일이라고?”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대답하는 클라우스의 얼굴은 심각 그 자체였지만, 정작 리카르도는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1기사단 명령권을 가지고 경비 일에 쓰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군.”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웃지 않으면 뭘 어쩌겠나? 쓰라고 준 명령권 쓴다는데.”
리카르도가 의자에 앉은 채 연초를 불어댔다. 평상시 저 모습에 아무 불만이 없던 클라우스였지만, 오늘은 왠지 한 대 쳐 주고 싶었다.
“불만을 가지는 단원들이 나올 겁니다. 그런 일을 맡을 만한 인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끔 황궁 경비도 하지 않았나. 비슷한 일이라 여기면 될 걸세.”
“어떻게 황궁 경비와 도시 경비를 비교하십니까?”
“다를 건 또 뭔가. 어차피 단원들도 살고 있는 도신데. 이웃을 지킨다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지 않나.”
“그리 생각하시면 단장님도 나가시지요.”
“내 짬밥에 경비는 좀 아니지.”
리카르도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죽여 버릴까. 클라우스의 손이 검집으로 향하다, 닿기 직전 멈췄다. 싸우면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자네야말로 답지 않게 흥분한 것 같군. 혹시 경비 일 들어가나?”
“……저더러 자경단 부단장직을 맡으라 하더군요.”
“저런. 그래도 기사단에서도 부단장이고, 자경단에서도 부단장이니 호칭이 헷갈릴 일은 없겠군.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리카르도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클라우스는 이번에야말로 검을 뽑으려 하다가, 결국 참았다. 역시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장은 갓 5급에 오른 애송이라더군요.”
“나이는?”
“스물이 좀 안 될 거라 했습니다.”
“그 정도면 재능이 있군. 옆에서 잘 보좌해 주게. 얼마 남지 않은 제국의 젊은이 아닌가.”
화르륵. 연초가 불타 사라진다. 클라우스는 그 푸른빛의 마력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정말 괜찮은 겁니까?”
“단원들의 불만 말인가?”
“예.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최근 단원들 대부분은 움직이는 화약고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소한 불만에 터져 버릴지도 모르죠.”
“…….”
리카르도가 말없이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나는 오히려 더 잘됐다고 생각하네.”
“……잘된 것 같다고요?”
클라우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 한 말을 어떻게 들었으면 저런 소리가 나오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마음 내키는 대로 도시를 돌아다니는 꼴인데 말이다.
“혹시 세 왕국 대신 레이튼이 파괴되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자넨 여기 오고 나서 훈련장에 가 본 적이 있나?”
리카르도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불쑥 물었다. 클라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희 경지에 굳이 훈련장에 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검술은 이미 어느 수준 통달했고, 심법은 혼자 방에서도 수련할 수 있다. 3급이 넘어가는 기사들에게 훈련장이란 그냥 인테리어 장식과 비슷한 거다.
“그건 단원들도 마찬가지지. 허나, 얼마 전부터 녀석들이 훈련장에서 검만 휘두르고 있더군. 마력도 쓰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동작만 골라서 말일세.”
“……몸이라도 움직여 잊으려 하는 거군요.”
보통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평생을 수련해 온 기사들 입장에서 몸 움직이는 것만큼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도 없다.
단원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참고 있는 것이다. 세 왕국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직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기 때문에.
동시에, 클라우스는 리카르도가 왜 잘된 것 같다 생각했는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뭐라도 하면 다른 곳에 정신 팔릴 일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반쯤은 그렇네.”
리카르도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는 연초를 하나 더 꺼내어 물려 하다가, 품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눈치채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대륙 최고의 도시 중 하나였던 레이튼은, 이제 연초 하나 구하기 힘든 거지 같은 동네가 되었다.
“적어도 시커먼 사내놈들끼리 작은 훈련장 안에서 다 같이 검이나 휘두르고 있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편이 정신 건강에 더 좋지 않겠는가?”
“……당장의 불만은 사그라들지 않을 겁니다.”
“그거야 리안이 해결해야 할 문제지.”
리카르도는 피식 웃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설마 그 녀석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랬겠나?”
* * *
드디어 저 인간들 쓰임새를 찾았네.
나는 단상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넓은 강당에 갑옷으로 얼굴을 가린 기사들이 일렬로 정렬해 있다. 그 덕분에 표정이야 보이지 않지만, 왠지 모를 살기가 느껴진다.
이게 착각은 아니겠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살짝 몸을 풀었다.
명령권 주니까 받긴 했다만, 사실 1기사단을 써먹을 만한 곳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정체가 문제다.
제국 제1기사단은 대륙에서 가장 명성 높던 집단 중 하나. 그만큼 그 면면들도 상당히 널리 알려진 편이다.
이런 놈들을 여기저기 써먹는다?
차라리 세 왕국에 대놓고 선전포고하는 게 싸게 더 먹힐 거다.
결국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건데, 그냥 놔두자니 이건 뭐 거의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제발 얌전히 있기만을 바랐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써먹을 수 있다면 잘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음…… 하, 한스 경?”
옆에 서 있던 자이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저 기사들이 하나같이 본인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걸 느꼈나 보다.
심정이야 이해는 가지만, 부하에게 겁먹은 상사는 존중받지 못하는 법이다.
아니나 다를까, 분명 목소릴 들었을 텐데도 한스란 기사는 묵묵부답이었다.
근데 진짜 한스란 이름이 있긴 한 건가? 한국에서 철수, 영희 같은 건데 그거.
슬쩍 단상에 놓인 명부를 바라보니 진짜 맨 첫 번째에 적혀 있다, 한스.
호명해도 당사자가 나오지 않자, 자이어는 당황해서 강당을 두리번거렸다.
“음…… 아, 아직 오지 않았나 보군. 그럼 다음…… 리, 리카르도 경?”
……그 이름은 갑자기 왜 나와? 그 인간한테는 경비 일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슬쩍 명부를 보니 종이 상단 중앙에 단장 리카르도라고 딱 박혀 있다.
아무래도 밑으로 읽어야 하는 걸 긴장해서 시선이 위로 향한 거 같은데, 이쯤 되면 보기 좀 짠하다. 심지어 실소나 비웃음 소리조차 없다는 점에서 더.
“아……차, 착각해서 잘못 읽어 버렸군. 지인 중에 비슷한 이름이 있다 보니. 하하하…….”
……저거 집에 가면 혀 깨물고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는데.
별로 나설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 거의 자경단 존폐의 위기다.
결국 내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자경단장님. 실례지만 제가 잠시 한마디만 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어…… 어? 아. 그, 그래. 해 보게.”
자이어가 단상 뒤로 빠진다. 나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그 자리를 꿰찼다. 좀 전까지만 해도 흩어져 있던 시선들이 앞으로 집중된다. 눈밖에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감정은 하나뿐이다. 네까짓 게 명령을?
어디든 오갈 곳 없는 분노를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인간들. 저 눈길을 받아 보니, 자이어의 심정이 더욱 이해가 갔다.
흡사 맨몸으로 호랑이라도 마주한 기분이었을 거다. 아무리 기센 인간이라 할지라도 떨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이상하게 내 마음은 평온하다.
저들이 당장 나 해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런가, 그동안 겪은 일이 워낙 스펙터클해서 그런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안녕하세요. 대부분 아시겠지만, 리안입니다. 집주인이죠.”
굳이 혼원력으로 목소리를 키우지는 않았다. 육성만으로 충분하니까.
“여러분이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 바람둥이 제비족새끼. 뭐, 그런 쪽이겠죠. 부정은 않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니까요.”
여전히 침묵뿐이다. 닥치고 내려오라는 아우성 정도는 기대했는데.
“하지만 저도 인정한 만큼, 여러분도 인정할 건 인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야 한 가지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 의아함. 기사들은 내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고 차가운 눈으로 단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 나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내는 밥버러지라는 사실을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