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77)
레이튼의 한 후미진 골목. 그곳에서 부랑자 하나가 바닥에 쓰러진 채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중이었다. 일견 매우 심각해 보이는 상태였지만, 정작 그 주변을 둘러싼 갑옷 사내들의 얼굴엔 어처구니없다는 감정만 가득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걸 한두 번 본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이런 놈이 계속해서 나오는 거지?”
“음……. 나는 솔직히 이해는 가네만.”
콧수염 남자의 말에 민머리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부랑자를 가리켰다. 오줌이라도 지렸는지 바지는 살짝 젖어 있고, 지린내가 사방에 진동을 한다.
“저게 이해가 간다고? 자네 낮술이라도 했나?”
“……저 모습이 이해 간다는 건 아니고, 그 심정은 이해가 간다는 거지. 혼자 돌아다니는 마도구가 어디 흔하겠나? 어떻게 한 번 훔치는 데 성공하면 팔자 펴는 것 아닌가.”
콧수염이 울상 짓고 있는 둥그런 원통형 물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리안 상회에서 만든 ‘누리’라는 마도구다. 레이튼의 위생을 책임지고 있는데, 훔쳐가려는 놈들이 가끔…… 자주 나온다는 게 문제다.
성공하는 사람은 없고 보안 전격 마법에 기절하는 인간만 계속 나오는데, 이 자식들은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민머리가 혀를 찼다.
“시도하는 것 자체가 문제지. 아무리 돈이 궁해도 그렇지, 어찌 성자께서 내린 물건을…….”
“성자라니. 자네도 그 소린가?”
콧수염이 살짝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민머리는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달리 표현할 방법이라도 있나? 레이튼 시민 절반은 그분에게 목숨 빚을 진 거나 마찬가진데.”
“……절반은 과장이 좀 심하군.”
“전혀 심하지 않네. 도시에 남아 있는 고아들 먹여 살리는 것도 사실상 그분께서 다 하고 있지 않나. 거기다 저 마도구가 레이튼을 청소하고 다닌 이후 병으로 죽는 자가 절반은 줄었지. 2년 전 사태를 끝낸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런데도 과장이라 할 셈인가?”
“알겠네, 알겠어. 거 참. 자네도 신봉자인 줄은 몰랐군.”
신봉자. 대륙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이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세상에 신이 수백이나 되기 때문이다. 제국이든 왕국이든 문화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다신교. 그런 만큼 생각보다 개종에 자유롭고, 심지어 몇몇 신전에서는 권장되기까지 한다.
이렇다 보니 한 신만 열렬히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오히려 별종 취급을 받는 것이다. 물론 교황이나 사도, 성녀가 개종하는 건 미친 짓이겠지만…….
하지만 이 반쯤 잊혀져 가던 단어는, 최근 레이튼에서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바로 리안과 그 상회의 존재 때문이다.
“신봉자라…… 부정은 않겠네. 오히려 썩 듣기 괜찮은 단어군.”
“……자네 거기서 뭐 얻어먹기라도 했나?”
“뭔가 얻어먹긴 했지. 내가 아니라 딸이 말일세.”
“……딸?”
저게 무슨 소린가 생각하던 콧수염이 순간 표정을 굳혔다. 그제야 민머리가 전쟁 당시 바깥으로 출병 당했다가 얼마 전 겨우 돌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민머리는 누리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중상으로 병상 신세만 7년을 지내면서, 솔직히 가족이 살아 있을 거란 희망을 버렸네. 레이튼이 어찌 됐는지는 유명했으니까. 심지어 아내는 병약했고, 딸아인 3살 난 갓난아기였지.”
“…….”
“그런데도 몸이 낫자마자 레이튼으로 기어들어 왔네. 실낱같은 희망은 남아 있었거든. 예상대로 아내는 병들어 사망했지만…… 딸아이는 리안 상회에서 고용해 준 덕분에 살아 있더군.”
“……그런가.”
“그래. 만약 성자님이 없었다면, 나는 기껏 돌아와서 시체 두 구나 볼 수 있었을 거야.”
“……미안하군. 말을 함부로 해서.”
민머리가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됐네. 말이 길었군. 얼른 저놈이나 수감하고 단장님께 보고나 드리러 가지.”
“……꼭 수감해야 하나? 별로 들고 싶지 않은데.”
콧수염이 축축이 젖은 부랑자의 바지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슬픈 사연은 사연이고, 그는 괜히 오줌이 묻을까 겁났다. 민머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규칙은 규칙이니까. 합의가 불가능한 사안은 일단 잡아 넣는 게 원칙 아닌가. 됐으니 그쪽 팔이나 들게. 2년 전 그 무늬만 자경단인 깡패새끼들처럼 되고 싶은 게 아니면.”
“으…… 알겠네.”
그렇게 둘이 수감과 보고까지 마친 후.
자경단장실에서는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이마를 부여잡고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감방이 너무 부족하군.”
방금 잡혀 온 부랑자만 해도 그냥 복도 한구석에 떨궈 놓았다. 심지어 사람이 부족해서 감시하는 인원도 없다. 이런 걸 어떻게 수감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냥 숙박업소지. 기절한 거 깨면 슬쩍 나갈 거다.
“후…….”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책상에 놓인 서류 더미들을 뒤적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그 누리라는 청소 마도구의 존재다. 레이튼 곳곳을 쏘다니고 다니는데, 이거 훔치려다가 잡혀 온 놈들이 이번 주에만 열이 넘는다.
저것도 ‘레이튼의 성자’가 내렸다는 얘기 덕분에 저 정도인 거지, 노블레스가 만든 거였다면 그 숫자가 천 명은 됐을 거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어디 똥 싸는 놈, 치우는 놈 따로 있느냔 말이다. 심지어 칭찬은 싸는 놈이 먹고 욕은 치우는 놈이 먹고 있는 상황 아닌가.
결국 참지 못한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밖에 누구 있나?”
“예, 단장님.”
문이 열리며 자경단원 한 명이 들어왔다.
“리안 상회에 전해라. 자경단장이 할 말이 있으니까 그 평민…… 리안 좀 준비시키라고.”
“성자님 말씀입니까?”
“성자 말고 리안.”
“예. 알겠습니다. 성자님께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
자이어 테르베로츠는 기가 찬 얼굴로 나가는 남자를 쳐다봤다. 저게 자경단원인가 리안 상회 직원인가.
“후…….”
앓느니 죽지. 그는 아무 말 없이 리안 상회로 발걸음을 향했다. 어차피 대화는 녀석이랑 하면 될 일이니까.
* * *
“그래서 뭐 어쩌라고?”
“…….”
시큰둥한 표정의 리안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자이어 테르베로츠는 밖에다 소리 지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너희들이 성자라 부르는 새끼는 사실 이런 씹새끼래요!
물론 진짜 하지는 않을 거다. 체면에도 어긋나고, 지금 레이튼에서 저런 소릴 지껄였다간 돌팔매질 맞아 죽을 확률이 높으니까.
“똥 싸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는 게 문제라는 거 아닌가. 누린지 뭔지 하는 거 때문에 인력이 얼마나 모자라는지 아나?”
“누리는 똥 싸는 도구가 아니야. 치우는 도구지.”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지 않나. 그거 때문에 소비되는 인력이…….”
“너는 레이튼이 똥 천지가 되기를 바라는 거냐?”
뜬금없이 나온 말에 자이어 테르베로츠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그게……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우리 누리를 폐기하라고 찾아온 거잖아 지금. 누리가 레이튼을 청소하지 않으면 도시는 금세 똥 천지가 돼 버릴 거다.”
“……우리 누리?”
무슨 마도구한테……. 자이어 테르베로츠는 리안의 머리통을 까 보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았다. 어차피 시도해 봐도 질 것이 뻔했으니까. 그가 2년 전 마력 패스 낮다고 놀려댔던 꼬마는, 어느새 4급이라는 미친 경지에 올라 있었다…….
“별로 폐기하라고 찾아온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저 노블레스 거리만 걸으면 된다 이거냐? 평민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소리군.”
“아니 그게 아니고…….”
“자경단 맡겠다 했을 때는 이제야 철이 들었나 싶었는데. 결국 노블레스의 소꿉놀이에 불과했던 건가.”
“……그게 아닌.”
“그리고 지금 와서 물어보는 건데, 온다는 소식 전해 놓고 바로 뒤따라 올 거면 사람은 대체 왜 보내는 거냐? 아까 자경단원이 너랑 마주치고 황당해하는 표정 못 봤냐?”
“…….”
말 좀 하자고 이 개새끼야. 노블레스 체면도 잊고 그렇게 소리칠 뻔했던 자이어는, 이내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일단, 방문하기 전 사람을 보내는 건 귀족의 상식이다.”
“너 귀족 아니잖아. 나도 아니고.”
“……그와 닮고자 하고 있다. 자경단을 맡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고.”
“좋은 것만 닮아라. 좋은 것만.”
리안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혀를 찼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자이어가 상당히 고생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보통 경찰 같은 치안 유지 비용은 세금에서 나온다. 허나, 정부도 없는 레이튼에서 그 누가 세금을 걷고 분배까지 한단 말인가?
결국 자경단은 그 이름 그대로 거의 자원봉사에 가깝게 운영되고 있다. 리안 상회나 노블레스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수준일 거다.
자이어 입장에서는 속이 탈 만도 하다.
“무슨 얘기 하러 온 건지는 알겠는데, 보조금 더 못 올려 준다. 요즘 상회 확장하느라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
“……레이튼 치안이 올라가면 너한테도 좋은 일 아닌가.”
“좋은 일이지. 상회 직원들도 대부분 레이튼 사람이고, 안에서 하는 사업도 많으니까. 근데 진짜 돈이 없다니까?”
“……소문에는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 중이라고 들었다만.”
“갈퀴로 쓸어 담은 그 돈,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나가는 중이다. 아무튼 지금은 못 늘려 줘. 너희 아버지한테 가서 졸라 봐.”
“……정말 조금도 안 되겠나?”
“응, 안돼.”
“……알았다.”
자이어 테르베로츠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레이튼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성자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하려 한 거 같다……. 그냥 잊어라…….”
“…….”
“나는 그냥, 평민들이 조금 더 안전히 살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
이 개새끼가 근데. 리안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여윳돈이 얼마나 있나 생각해 봤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뺄 수 있는 비용이 없었다. 버는 족족 투자에 올인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것도 하나 같이 알짜배기로만.
결국 한숨 쉬며 거절하려는 순간, 리안의 머릿속에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너희, 사람은 안 부족하냐?”
“가장 부족한 것이 사람이다. 보조금 늘려 주면 그걸로 고용을 하려고 했지.”
“그럼 잘됐네. 마침 우리 집에 놀고 있는 인력들 있거든. 사람은 내가 지원해 줄 테니, 너는 걔네 숙소만 좀 제공해 줘라.”
“……미안하지만 자경단원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무력도 있어야 하고, 신뢰도 있어야 하지.”
“걱정 마라. 무력이든 신뢰든 충분히 갖춘 자들이니까.”
리안은 집에서 놀고 있는 밥버러지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전부 기사들이거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