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코드가 보여 (76)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서율의 머리가 잠시간 기능을 멈췄다. 아니, 그걸 뇌의 탓으로 돌리는 게 맞을까. 정말 잠깐 시선을 뗐을 뿐인데, 사람이 하나 사라져 있다. 이건 눈의 문제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라이놀 경은 어디 갔어요?”
“저기.”
미르가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커다란 구멍과 함께 사람의 형체가 하나 박혀 있었다.
눈에 기운을 증폭해 바라보니, 아무리 봐도 라이놀 경이다. 어떻게 훈련장 위에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저기까지 가 있는 거지?
“저게 서쪽의 마법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헛소린 말고 사매.”
서율의 멍한 중얼거림에 미르가 기가 차단 듯 대답했다. 하지만 정작 서쪽의 인간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거, 마법인가?’
카일은 다린에게 배우고 있던 몇 가지 주문들을 떠올려 봤다. 아직 마나를 다룰 수 없어 사용해 보진 못했지만, 저런 위력을 낼 수 있는 마법들이 떠오르긴 한다. 전부 6성급 이상의 식이라 문제지.
‘……아니, 마법은 익히지 않았다고 했지.’
카일이 살짝 고개를 저어 정신을 되돌렸다. 잠깐 겉으로 드러났던 경악의 표정도 다시 수면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후…….”
마법을 익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순간 그런 의심이 들었다. 알고 보니 몰래 마법을 쓴 거 아닌가 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카일의 세계에서 기술이란 절대적인 무기였다. 등급까지 차이 나는 게 아닌 이상, 기술이 뛰어난 인간이 이기는 게 당연했다는 소리다.
마검사 같은 개잡종 직업을 권하는데 수긍한 것도 그 때문이다. 카일은 그 두 가질 완벽히 다뤄 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니면?’
압도적인 힘 앞에 기술 따윈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래도 마검사의 길을 걸어야 하나?
카일의 두 눈에 고뇌의 기색이 가득 찼다.
“카일, 듣고 있어?”
어느새 서율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카일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뇨. 뭐라고 하셨어요?”
“저거, 마법이란 거 아니야? 아니면 말이 안 되는데……. 혹시 서쪽에선 흔한 일이야?”
“리안 형은 마법 익힌 적 없어요. 흔한 일도 아니고요.”
“그치? 리안 경이 이상한 거지?”
“네. 보통 기사보다 월등히 강한 국가기사라는 게 있기는 한데…… 그 사람들도 기술이 숙련된 거지, 저렇게 힘이 강한 건 아니에요.”
“……결국 신체 능력 때문이라는 거네.”
서율이 살짝 몸을 떨었다.
동쪽에서도 신체 단련을 등한시하는 건 똑같다. 서쪽과 이름은 다르지만, 혈맥(血脈)이라는 마력패스와 같은 기관이 존재하니까.
외공(外功)을 익히는 사람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나, 그런 자들은 보통 깡패짓 하고 다니는 불한당들. 사실 무공이라 해 주기도 민망한 수준인 것이다.
허나, 그와 동시에 동쪽엔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도 존재했다.
‘……외공과 내공을 모두 익히는 자가 대륙을 지배할 거라 했던가.’
말이 안 되기에 전설. 그렇게만 생각해 왔는데…… 저 모습을 보니 그리 허황된 얘기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서율이 옆에서 다시 하품하고 있는 사형을 바라봤다.
‘결국, 사형 말이 맞았네.’
그 사실이 별로 기쁘지 않다. 차원 폭풍이 일어났을 확률도 높아졌단 거니까. 동쪽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결국 싸인해야 하나?
애초에 사형이 이미 계약한 시점에서 선택권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어차피 연고도 없는 곳. 조금이라도 안면 있는 사람 밑에 들어가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 고용주가 ‘성자’니 뭐니 하는 칭호로 불리고, 괴물 같은 재능을 가진 천재라면 말이다.
그렇게 마음이 싸인으로 기울어 갈 때쯤. 서율은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벽으로 다가가는 리안을 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사형. 사형은 저 결과 정확히 맞혔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져서 물어보는 건데, 사형은 리안 경이랑 싸우면 얼마 만에 이길 거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등급 차이가 있으니…… 5분? 10분?”
“모르겠어.”
“……설마 10분도 넘게 걸릴 거란 말이에요?”
“아니.”
미르는 라이놀에게 손을 뻗고 있는 리안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 * *
“괜찮아요?”
“……아마.”
라이놀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검막이 스르륵 흩어진다.
“더 넓은 공간이었으면 이렇게 빨리 끝나진 않았을 거예요. 검을 맞대지 않고 피해 다니면 되니까.”
“결국 네가 이기긴 이겼을 거란 소리잖아.”
“그건 그렇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내숭 떠는 건 오히려 라이놀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다.
대련을 원하기에 했고, 전력으로 오라기에 갔다. 이외의 상황은 고려할 바가 아닌 거다.
라이놀이 옷에 붙은 벽돌 가루를 털며 홀가분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제 좀 개운하네. 항상 찝찝했거든. 네가 대련 피하는 게.”
“죄송해요.”
“아니. 네 마음도 이해는 가.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괜히 불편해질 수도 있는 상황 만들어서.”
끝까지 천사표라 해야 하나. 아무리 봐도 기사보다는 신관이 어울릴 인간인데.
돈에 환장한 예비 성녀 하나를 떠올리면서 나도 몸에 붙은 먼지를 털었다.
“불편해질 상황은 제가 하나 더 만들었죠.”
“그게 뭔데?”
“제가 한 집에서 타냐 계속 피한 거요. 신경 못 썼는데, 다들 꽤 불편했다고 하더라고요.”
라이놀이 쓰게 웃었다.
“그건 나도 할 말 없는걸.”
“저는 해결했어요. 완벽히는 아니지만. 라이놀도 이참에 카트발과의 사이 좀 수습해 보는 게 어때요?”
“…….”
미처 털어 내지 못한 벽돌 조각이 우수수 쏟아진다. 그 타닥거리는 소리가 침묵을 잠시 가려 주었다.
“별로 카트발을 싫어하는 건 아니야.”
“그건 알아요. 이종족이 싫은 거잖아요.”
“……맞아. 솔직히 이종족을 좋아하진 않지.”
라이놀이 검을 한 번 훑어보고 허리춤에 갈무리했다.
“제국의 교육 탓도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좀 힘들어. 혐오, 까지는 아니긴 한데.”
“그럼 계속 이종족과는 말도 안 섞을 거예요?”
“……그건, 고쳐 봐야지.”
라이놀이 어색한 얼굴로 웃는다.
지금은 저 정도면 됐나, 그 말대로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느새 밑에서 구경하던 세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라이놀 경은 좀 괜찮은 거예요?”
가까이 다가온 서율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라이놀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뇨.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떡해요! 의, 의원 불러 올까요?”
“농담입니다. 검막 덕분에 별로 다치진 않았거든요. 따지자면 장외패죠.”
“……제가 의원한테 보내드릴까요?”
서율이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을 뽑아 들 자세다. 라이놀이 항복 자세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아픈 건 사실입니다. 검막이 충격까지 흡수해 주는 건 아니거든요.”
“이거 발라.”
미르가 품속에서 무언가 꺼내며 말했다.
[IT-C-64]
금창약(金瘡藥)이다.
“원래는 칼 맞은 데 바르는 건데, 가벼운 근육통에 써먹어도 충분할 거야.”
“감사합니다, 미르 경.”
라이놀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약을 받는다.
금창약은 포션보다 효과가 좀 떨어지지만, 가격이 훨씬 싸다. 잘만 하면 상품 가치 좀 있겠는데……. 그 외에도 저 둘이라면 동방의 물건들을 많이 알고 있을 거다. 몇 개 만들어서 팔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일단 속으로만 생각해 두면서 시선을 벽 쪽으로 돌렸다. 대공사가 필요할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려 있다.
“…….”
조금 심했나?
이 정도야 그냥 조금 강한 4급이구나 하겠지 싶은 심정이었는데, 저건 누가 봐도 4급이 낼 만한 위력은 아니다.
뭐…… 여기 입 싼 인간은 없으니 괜찮으려나.
검을 갈무리하고 카일을 바라봤다.
표정엔 티가 안 나지만, 눈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역시 저러고 있을 줄 알았다. 아래에서 하는 대화 전부 들었으니까.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도요.”
“그래? 기술 같은 거 배워 봐야 쓸모가 있나, 하는 표정 같았는데 내가 잘못 짚었나 보네.”
“…….”
카일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고민 해 봐야 쓸모없어. 어차피 이 신체에 이런 마력 가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으니까.”
“……지금 놀리러 온 거예요?”
“아니. 힘이 답은 아니라는 거 알려 주려고.”
떨어져 있는 벽의 파편을 주워, 세게 움켜쥐었다. 파스슥. 벽돌이 가루로 변해 흩어진다.
“너 이런 거 할 수 있어?”
“……아뇨.”
“그렇겠지. 그럼 너 다음 동작 생각하면서 마법 캐스팅까지 같이 할 자신은 있어?”
카일이 조금 생각하는 기색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치? 근데 나는 그거 할 자신 없거든.”
“……그래서요?”
“생각해 봐. 네가 마법으로 함정 깔아두고 날 공격해서 거기로 몰면, 내가 피할 방법이 있을까?”
“부수긴 할 거 같은데요.”
얘가 똑똑하단 걸 잠시 잊었다.
“그래. 부술 순 있겠지. 그게 5성급 정도 되면 말이야. 6성급 되면 나도 힘들어.”
“……결국 수준의 문제라는 얘길 하고 싶은 거예요?”
“맞아. 방향이 어느 쪽이든, 본인이 경지에 다다르면 기술이 어떻고 힘이 어떻고는 무의미해진다는 소리지.”
카일이 뭔가 고민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서율이 끼어들듯 말했다.
“저희 동방에도 비슷한 뜻 있어요. 만류귀종이라고.”
“거봐. 서쪽 동쪽 갈라진 지 오랜데도 이렇게 통하는 게 있잖아. 결국 자기 방향에 맞는 길로 꿋꿋이 걸어가면 되는 거야.”
내 말에 카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형을 이기진 못할 거 아니에요.”
“너 시X 나랑 싸울 생각이니?”
“그건 아니고요.”
“근데 뭐가 문제야? 그냥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걸어. 네 재능이면 언젠가 나 따라잡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래서 형 이길 수 있다고요?”
“나는 너 걸을 때 놀겠냐?”
피식 웃으며 답하자, 카일의 입가에도 살짝 웃음기가 돈다. 바르나울에서 용병과 싸우러 나갈 때 빼고 처음 보는 모습이다.
아직 완벽히 납득한 것 같지는 않지만……, 결국 본격적으로 수련에 들어가면 깨닫겠지. 자신의 재능이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걸.
괜히 내가 칼페온까지 가서 데려온 게 아니다. 누가 뭐래도 2부 주인공 아닌가.
나는 카일의 어깨를 다시 한 번 쳐 주고, 라이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남아서 훈련할 건데, 라이놀은 어쩔 거예요?”
“나는 일단 저택으로 돌아갈게.”
라이놀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카트발이랑 얘기도 해 봐야겠고.”
“그래요. 그럼.”
말하면서 배웅하려는 순간이었다.
훈련장으로 다가오는 두 개의 코드가 보인다. 한 개는 바로 근처에 있고, 한 개는 그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이건 또 뭐지.
하나는 심지어 아는 인간이다. 좋은 예감은 안 드는데…….
가깝던 코드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기색이더니, 곧 안으로 들어온다.
“아, 여기가 맞았군요. 성자…… 리안 님 맞으십니까?”
“그런데요.”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자이어 테르베로츠 자경단장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오늘 방문할 예정이니 전해 달라고……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남자가 말을 하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내가 그가 아니라 입구 쪽만 보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무슨 문제냐는 말은 바로 내가 하고 싶었다. 왜냐면 방문 예정이라고 소식을 보낸 인간이, 벌써 근처까지 와 있었으니까.
* * *